냉수사 고송 (2)
“찾았다고?”
“예.”
“하!”
고송은 기뻐하는 대신 살기를 드러냈다.
절정의 고수가 뿜어내는 살기는 마치 맹수의 그것처럼 다른 자들의 근육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방금 고송의 고함에 비틀거렸던 무림인들은 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절정의 고수라지만 이렇게 집요한 살기라니.
‘고송의 경지가 이 정도일 줄이야!’
팽주성은 심장의 맥박이 거세지는 것을 느꼈다.
정파 출신의 무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파 출신의 무인들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근거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기초와 내실을 탄탄하게 다지고 내공의 정순함을 중요시하는 정파의 무공과 달리, 사파의 무공은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초식들과 빠르게 쌓이는 내공의 양을 중요시했다.
이런 탓에 경지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사파의 무공은 그 한계를 드러냈다. 초식의 불균형과 내공의 불순함이 고수로 올라가는데 발목을 잡는 것이다.
그런 만큼 사파 출신의 고송도 정파 출신의 다른 고수들과 비교한다면 그 경지가 반 수에서 한 수 아래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방금 보여준 살기는 그런 건방진 생각을 싹 사라지게 만들었다. 경지와 상관없이 저런 식으로 살기를 날카롭게 쏘아 보내 사지를 제압하다니. 다른 절정의 고수에게서는 본 적 없는 고송만의 재주였다.
‘내가 어리석었다.’
팽주성은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다른 친우들을 빠져나가게 하겠다는 결심을 후회했다. 고송의 실력을 얕본 오만한 결심이었다.
아무리 사파의 고수라 하더라도 어떤 재주가 있을지 쉽게 예단해서는 안 됐었는데.
“놀랐나보군?”
화를 내던 고송은 팽주성이 식은땀을 흘리는 걸 보고 씩 웃었다. 화를 냈다가 웃는 모습이 마치 광인 같았다.
“보자. 좀 많이 놀란 것 같은데. 오호라! 설마 일이 틀어지면 내 앞을 막아서 시간을 끌 생각이었는데, 그게 착각이란 걸 깨달은 거냐? 내 인귀공(人鬼功)에 어지간히도 놀랐나보군.”
고송은 팽가의 자제가 자신의 초식에 놀란 것에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예전 남궁세가의 제왕검형(帝王劍形)을 본 적이 있었지.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낭인들을 점혈한 것마냥 멈춰 세우는 그 검법. 아느냐? 그걸 따라한 거다.”
신나서 떠들던 고송은 갑자기 화를 벌컥 냈다.
“이 포쾌 놈아! 이 어르신은 일을 한 번 방해하면 묵형을, 두 번 방해하면 의형을, 세 번 방해하면 월형을 가한다. 하지만 네놈은 특별히 나를 화나게 만들었으니 거열형이다. 알겠느냐?”
연우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상단전에 쌓인 내공이 두려움을 없애고 마음을 안정시켜줘서도 있었지만, 그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물러서는 건 죽음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송 같은 괴팍한 마두 앞에서는 오히려 허세를 부려야 했다.
“고 대협께서 저를 거열에 처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그걸 어떻게 거역하겠습니까? 하지만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저처럼 미천한 포쾌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기에 고 대협을 그렇게 분노케 한 겁니까? 알려주신다면 저승에 가서도 곱씹으며 반성하겠습니다.”
화를 내던 고송은 기름이라도 바른 것마냥 포쾌의 말에 피식 웃었다.
겁에 질려서 벌벌 떨었다면 더 화가 치솟았을 텐데 저렇게 말하니 오히려 침착해졌다.
“오냐. 혀만 산 포쾌 놈아. 내 알려주마. 여기 산채에 머문 지가 몇 년이다. 알겠느냐? 몇 년 동안 이 산채 주변을 샅샅이 뒤진 거다. 아까 뒤진 산적 놈의 아비가 누구랑 붙어먹어서 나갔는지, 작년에 죽인 약초꾼의 자식이 몇 살인지, 내가 이걸 왜 알고 있겠느냐? 응?”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네놈이 찾았다고 나를 우롱해? 이게 네놈이 거열에 처해질 이유다!”
“하지만 대협. 제가 정말 찾았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네가 찾았다고? 정말로?”
“예.”
“너는 지금 여기 산채에 와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았고,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해주지도 않았고. 그런데 찾았다?”
“예.”
“그럼 말해봐라!”
“먼저 여쭙겠습니다. 혹시 백면신투는 이 산채 출신이 아닙니까?”
“...!”
고송의 눈빛이 변했다. 고송과 백면신투를 제외한다면, 심지어 여기 산채 놈들도 모르는 정보였던 것이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고 대협께서 이 산채에 오랫동안 머무르셨다는 건, 그만큼 확신이 있으셨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장보도 한 장으로는 그만한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그보다 더 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주변 출신이라거나...”
“그것만으로?”
“예. 그리고 도둑이 보물을 숨긴다면 자신한테 익숙한 곳에 숨기지 않겠습니까.”
“...맞다! 백면신투 놈한테 들었지. 놈에게 직접. 재주가 없지는 않구나.”
고송은 눈앞의 포쾌를 인정했다.
발자국 하나 떼지 않고 백면신투의 출신을 맞히는 솜씨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왜 명문세가의 코흘리개들이 포쾌를 데리고 다니나 했는데, 저 정도 재주라면 오히려 이해가 갔다.
고송은 생전의 백면신투와 나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어쩌다 우연히 목숨을 구해주게 되어서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는데, 잔뜩 취한 백면신투가 이런 말을 했더랬다.
-내 고향... 내 고향에, 훔친 것들을 숨겨놨지.
-금붙이? 숨기지 말고 쓰는 게 나을 거다. 내가 보기에 너는 십 년을 넘기지 못하고 비명횡사할 테니까.
-금붙이 따위는 무슨. 나도 그런 건 얻는 대로 던진다고.
백면신투는 킬킬대며 말했다.
-내가 말하는 건 비급이야. 비급.
-네깟 놈이 훔친 비급이 얼마나 대단하면 대단하다고...
-과연 그럴까? 범망공도 내 손아귀에 들어왔는데.
-...네놈이 그걸 어떻게?!
범망공(梵網功).
서장(西藏)의 불승들은 무림의 불승들과 다른 기묘한 무공들을 익히고 수련했다. 범망공은 그 중 가장 기묘하고 독특한 무공에 속했다.
불순하고 탁한 내공을 정순하게 만들어주는 내가기공!
고송처럼 빠르게, 하지만 불순물이 많은 내공을 쌓아올린 사파의 무인에게 범망공은 피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실제로 고송 본인은 절정의 경지에 오르면서 점점 더 내공의 한계를 느끼고 신음하고 있었다.
절정의 경지에 올랐지만 계속해서 이런 내공을 유지했다가는 발전이 없었다. 점점 육신의 노화가 찾아오는 나이에 무공의 발전이 멈추는 건 치명적이었다.
-소림의 장경각에서 베꼈지. 땡중들은 내가 가지고 나온지도 모를 걸.
-내게 팔아라. 천금을 주겠다!
-천금은 내게도 있어.
-팔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
-죽인다면 평생 찾지 못하겠지. 너는 장경각에 들어가지도 못할 테니까.
-...원하는 게 뭐냐? 뭐냔 말이다!
-아무것도! 내가 왜 목숨을 구해준 네게 모질게 굴겠나?
-그러면 설마 그냥 주겠다는 거냐?
-아니. 그럴 순 없지. 너는 내 목숨을 구해줬지만, 내 실력을 모욕하기도 했으니까. 십 년 안에 죽는다고?
-그건...
고송은 사과하려고 했지만 백면신투는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내기를 제안했다.
-십 년 후. 내가 그 때까지 살아있으면 백면신투 어르신의 솜씨를 몰라봐서 죄송하다고 사죄하라고. 그러면 범망공을 내주도록 하지.
-좋다. 좋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범망공을 준다는데. 하지만 자네가 죽는다면? 나는 어디서 받지?
-그것도 당연히 생각해놨지. 팔강채. 내 보물은 팔강채에 다 숨겨놨어. 내가 죽는다면 거기 가서 찾으라고.
그런 내기가 허망하게 백면신투는 오대세가를 잘못 건드려서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어떻게 보면 고송이 사람을 제대로 본 거였지만, 고송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자신의 무공을 찾을 길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팔강채에 도착해서 찾기 시작했는데도 도무지 나오는 게 없었다. 해가 뜨고 달이 떠도 달라지는 건 한 수씩 던져줬던 산적 놈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것뿐.
약이 오르기도 하고 미쳐버릴 것 같은 때, 찾아온 포쾌가 이 모든 것들을 한 번에 맞춰버리니 고송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것만으로 모든 걸 알아낸단 말인가?
‘대충 됐나?’
연우혁은 고송의 감정을 확인했다. 분노가 사라지고 집중하고 있는 걸 보니 이제 알려줄 때가 된 모양이었다.
사실, 아까 고송이 비급을 찾아내라고 소리를 질렀을 때부터 연우혁은 비급이 어디 있는지 깨달은 상태였다.
산채 뒤에 위치한, 낭떠러지 너머의 하늘을 찌를 듯한 가파른 절벽과 그 위의 기묘한 새들을 보자마자 사건 하나가 떠올랐던 것이다.
-절벽 아래에 스물 두 구의 시체가 있다. 사인은 낙사. 전원이 무림인이다. 무림인들은 왜 여기서 죽어있는가?
밥 잘 먹고 할 일 많은 무림인들이, 절벽 위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땅 아래에서 절벽을 기어오르다가 떨어져 죽은 기묘한 현상.
대체 이 무림인들은 왜 기어오르다 죽은 것일까?
‘진짜 말도 안 되는 답이었다.’
정답은 절벽 위 새 둥지에 비급이 숨겨져 있었고, 그 비급을 챙기러 갔다가 새들에게 습격을 받아서였다.
저 새들은 평범한 새가 아닌, 석획조(石獲鳥)였던 것이다.
이 새들은 단단한 돌을 먹고 부드러운 나무껍질로 둥지를 만드는 요괴에 가까운 새였는데, 자기 영역에 들어오는 적이 있으면 가차 없이 돌을 쏘아내고 부리로 찍어서 낙사시켰다.
아무리 무림인이라 하더라도 저런 드높은 절벽을 기어오르며 기습당하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연우혁 입장에서 이 사건은 ‘대체 어떤 미친 놈이 절벽 위 둥지에 비급을 숨겨놓나’정도였지만, 지금 이 절벽과 날아다니는 석획조를 보니 모든 게 연결되었다.
저걸 누가 숨겨놨겠는가?
백면신투가 숨겨놨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백면신투는 여기 출신일 것이고, 고송이 여기 매달리는 것도 직접 들어서일 것이고...
“저기 보십시오. 고 대협. 저 새가 무슨 새인지 아십니까?”
“무슨 새라니... 그냥 새 아닌가?”
“혹시 산적들이 저 절벽 쪽에는 가까이 가는 걸 피하지 않았습니까?”
“!”
“저 새는 평범한 새가 아니라 석획조입니다. 돌을 먹고, 돌로 사냥감을 죽이는 포악한 놈이죠.”
“지금 말 돌리는 거냐?”
“놈은 둥지를 지을 때 나무의 껍질을 파헤쳐 부드러운 속껍질로 둥지를 만듭니다. 먹는 건 딱딱해도 부드러운 둥지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
“백면신투는 여기서 오래 산 산적이었습니다. 석획조의 성질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거고요.”
“설, 설마!”
고송 대신 제갈규가 비명을 질렀다.
“저 둥지가?!”
“예. 비급을 찢어서 석획조에게 물려준 겁니다. 둥지 자체가 비급이라고 보시면 되겠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어떻게 말이...”
“절벽에 생긴 둥지의 색들을 한 번 확인해보십시오. 색이 다른 둥지가 분명 있을 겁니다.”
고송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놀랍게도 이 포쾌의 말대로 다른 둥지와 색이 다른 둥지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