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수사 고송 (3)
굉음과 함께 고송이 절벽을 타기 시작했다.
고송은 약초꾼처럼 손으로 절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잡고 꾸역꾸역 올라가지 않았다. 마치 절벽을 평지처럼 뛰듯이 수직으로 달려서 올라갔다.
그 놀라운 신법에 아래에 있던 무림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을 정도였다.
석획조들이 사나운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자기 영역을 침범한 무림인을 죽이기 위해 돌을 쏘아내는 석획조들의 기세는 어지간한 군대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고송도 만만치 않았다. 주먹을 쥐었다 펴자 강한 기류의 흐름과 함께 허공에서 북 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먼 거리의 적을 장력으로 타격하는 상승의 수법, 격공장(隔空掌)이었다. 탄궁으로 쏜 것처럼 살벌하게 날아드는 돌멩이들이 허공에서 박살나고 떨어졌다.
고송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손가락이 연달아 공중을 찌르자 날카로운 지력이 석획조들의 급소를 찔렀다. 몸이 돌처럼 단단한 새였지만 고송이 뿜어낸 지력은 그 껍데기를 뚫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
고송은 일갈하며 허리춤에서 채찍을 하나 꺼내들었다. 흰 뱀의 껍질을 엮어서 만든 채찍이 쭉 늘어나더니 마침내 목표로 했던 둥지에 닿았다. 돌처럼 단단하게 절벽에 고정되어 있던 둥지가 잘리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그와 함께 고송도 뛰어내렸다. 고송은 정신없이 둥지를 파헤치더니 한 줌의 종이뭉치를 들어올렸다.
“찾았다!”
고송의 눈빛에는 광기 어린 환희가 엿보였다. 늙은 고수는 체면도 잊고 발을 구르며 외쳤다.
“찾았다, 찾았어! 범망공이다. 범망공이야! 포쾌, 네가 나를 살렸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고 대협!”
저 멀리 절벽 아래에서 외치는 고송의 모습에, 연우혁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사파의 무인은 기분이 좋을수록 더 조심해서 접근해야 했다. 언제 감정이 뒤집힐지 알 수 없었으니까.
“괜찮은 건가? 냉수사가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제갈규는 고송이 살인멸구를 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범망공은 고송이 몇 년 넘게 노리고 있었던 무공이었고, 강호에는 자신의 무공을 숨기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림인들이 즐비했다.
“그러진 않을 겁니다.”
물론 영안으로 고송을 확인한 연우혁은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송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으니까.
보아하니 고송은 난폭한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냉정하게 주판을 튕기는 성격이었다. 당장 아까도 오대세가의 핏줄들은 일부러 손을 대는 일을 피했었다.
범망공이 희귀한 무공이라지만 소림의 정식 무공도 아닌 서장의 무공, 게다가 필사본이니 소림의 추적이 그리 심하지 않을 것이란 계산 정도는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오대세가의 무인들을 죽여서 목숨을 걸 이유가 없었다.
“받아라!”
고송은 아까 둥지를 수확할 때 썼던, 흰 뱀 같은 채찍을 꺼내더니 연우혁에게 던졌다.
“무공에 대한 보답이다. 하하!”
“받을 수 없습니다!”
연우혁은 깜짝 놀라 외쳤다. 그러나 고송은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라 포쾌의 거절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백사격각편(白蛇隔角鞭)이다. 오행산에 사는 커다란 흰 구렁이를 잡아서 독에 절이고 절인 놈이지. 소싯적에는 이 놈 덕을 많이 봤다. 가지고 가서 써라! 목숨을 한 개 정도는 구해줄 테니까.”
“대협. 정말로 받기 어렵...”
“아. 편법(鞭法)이 없겠군. 옛다.”
고송은 ‘백사편법’이라고 쓰여 있는 꼬질꼬질한 무공서를 하나 던졌다. 누가 봐도 고송이 직접 쓴 것 같은 무공서였다.
“내가 채찍을 쓰면서 만든 수법들을 기록했다. 심법은 따로 없지만 이것만 해도 쓸만할 거다. 저잣거리의 어지간한 삼류 무공 따위보다야 훨씬.”
“그게 대협...”
연우혁은 계속 거절하려고 했지만 고송은 더 이상 듣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순식간에 경공을 펼치더니 저 멀리 날아가서 사라졌다.
옆에 있던 팽주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왜 받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둘 다 쓸만하잖아?”
백사편법은 명문정파의 무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찮은 무공은 아니었다. 고송 정도 되는 고수가 자신의 수법들을 기록해 넣은 무공이라면 제법 괜찮은 무공일 것이다.
물론 초식들이 지나치게 실전적이고 살기가 넘칠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저 포쾌에게는 그게 장점일 수 있었다. 비교적 무공 수준이 낮은 적들과 치고받고 싸우려면 저런 수법들이 더 유용했다.
낭인들은 단전 안에 정순한 내공을 쌓으며 커다란 깨달음을 줄 대기만성의 무공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그 날 바로 쓸 실전 무공이었고 저 편법은 바로 그런 무공이었다.
그리고 저 백사격각편은 편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훌륭한 보물이었다. 오행산의 영물이나 요괴를 잡아 만든 게 분명한 저 채찍에는 독기와 함께 서기(瑞氣)도 번뜩였다.
“그게 말입니다.”
“아. 혹시 냉수사에게 받았다는 게 신경이 쓰이는 건가?”
팽주성은 누이동생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 거라면 전혀 신경 쓸 것 없네. 심법 하나 없는 편법에 무슨 마기(魔氣)라도 있겠나? 또, 저 채찍은 독 기운이 좀 강하긴 해도 그건 조심하기만 하면 되는 일일세. 만약 누가 냉수사의 이름을 들먹이며 시비를 걸어온다면 팽가의 이름을 대도 좋네.”
팽주성은 듬직하게 말했다.
이번 일에서 저 포쾌가 보여준 활약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도 모자랐다.
흔히 뛰어난 무림인은 검으로 자신의 동료를 지킨다지만 이 포쾌는 그런 것 하나 없이 자신의 머리만으로 여기 있는 무림인 전부를 지킨 것이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
“아마 고 대협께서 가져가신 무공은 가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연우혁은 머쓱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실, 남들 앞이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 것이지 연우혁은 고송이 가져간 무공이 가짜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절벽 아래에 발견된 스물 두 구의 무림인 시체.
실제 사건에서는 여기에 몇 가지 단서가 더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바닥에 떨어진 색다른 둥지였다. 이 둥지를 잘 확인하면 가짜 무공이라는 게 바로 나왔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백면신투는 남궁세가의 담장을 넘으려다가 붙잡혀서 죽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소림의 장경각에 들어갔겠습니까.”
“......”
자리에 있던 무인들은 너무 황당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팽주희가 다그치듯이 물었다.
“그러면? 냉수사가 가져간 무공은?”
“아마 백면신투가 만든 가짜 무공일 겁니다. 나중에 고 대협이 이 주변을 뒤져서 가져갈 때를 대비해 저 둥지만 색을 따로 물들였겠지요. 애초에 백면신투 같은 노련한 도둑이 자신의 보물을 숨기는데 들키기 쉽게 색을 달리 만들 이유가 없잖습니까. 진짜 무공 비급들은 다른 둥지들일 겁니다.”
무림인들은 연우혁의 말에 조심스럽게 절벽 위에 있는 나머지 둥지들을 하나씩 떨어뜨렸다.
종이를 하나하나 뜯어 기름을 먹인 뒤 꽁꽁 싸매놔서 전체 내용을 파악하긴 힘들었지만, 백면신투가 따로 남긴 겉표지 위의 글자를 보니 글자를 알 수 있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무공은 아니었다. 팽주성은 인상을 찡그리며 집중하듯이 기억을 떠올렸다.
“이 태둔권법은 분명...”
“우가장의 권법입니다. 팽 형.”
제갈규가 슬쩍 조언했다. 우가장은 무림에 그리 이름이 널리 퍼지지 않은 중소 가문이었지만, 그래도 태둔권법은 나름 괜찮은 무공으로 제갈세가 내에서 평가받고 있었다.
“아하. 고맙군. 규 아우. 그래. 우가장의 권법이었어.”
다른 무공들도 이름을 확인해보니 대부분 중소 가문들의 무공이었다.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의 무공이 없다는 걸 확인한 제갈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제갈세가나 당문, 혹은 팽가를 제외한 다른 명문정파의 무공이 발견되었다면 꽤나 귀찮아졌을 것이다.
아무리 그들이 보지 않았다고 주장한들 상대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을 테니까. 제갈규도 입장이 바뀌었다면 의심을 버리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중소 가문의 무공이라면 별다른 오해를 받을 일이 없었다. 그쪽에서 감사하면 감사했지 오대세가 무인을 상대로 무공을 도둑질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진 않았다.
‘백면신투의 실력이 부족해서 다행이군.’
“이 무공들은 나와 규 아우, 그리고 당 소저가 책임지고 주인에게 돌려주겠네.”
“냉수사만 안타깝게 됐네? 잔뜩 기대를 했을 텐데 말이야. 그래도 교훈을 얻었겠어. 도둑의 말을 믿으면 안 된다는 교훈 말이야.”
팽주희는 고송이 허탕을 쳤다는 게 재밌는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팽주성은 고개를 저으며 그 사실을 부정했다.
“틀렸다. 진짜 교훈은, 연 포쾌처럼 지혜로운 사람을 멋대로 힘으로 겁박해서 부리려고 하면 화를 당한다는 거지.”
자리에 있는 무림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 염일립마저도 웃음을 터뜨릴 정도였다.
일행은 주변을 정리한 뒤 하산을 시작했다. 산을 다 내려오고 나자 팽주성은 산채 쪽을 쳐다보았다.
오대세가 출신이라 하더라도 오늘처럼 생과 사가 팽팽하게 오가는 상황은 자주 겪지 않았다. 아까 고송과 기세를 맞부딪쳤던 게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오늘 가장 커다란 공을 세운 옆의 포쾌는 무심한 표정으로 염일립 뒤에 바짝 붙어서 내려오고 있었다. 팽주성은 새삼스럽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연 포쾌. 혹시 백면신투가 왜 가짜 무공을 숨겨놨는지도 알겠나?”
“이유 말입니까?”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딱히 백면신투가 무슨 생각으로 가짜 무공을 숨겨놨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알 필요 없는 일이었으니까.
“백면신투도 무림인인 만큼, 무시받은 게 자존심이 상했던 거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네. 연 포쾌보다 아둔한 생각이지만 들어주겠나?”
“경청하겠습니다.”
“백면신투는 부끄러웠던 걸세. 허세를 떨어놓고 사실 범망공이 없다는 걸 들키는 게 말이야.”
“...!”
“일단 가짜 무공을 숨겨놓고, 나중에 진짜 무공을 찾으면 냉수사 앞에서 ‘이렇게 숨겨놨는데도 못 가져가다니’하며 허세를 부리려는 게 아니었겠나?”
“흥미로운... 생각이십니다.”
연우혁은 팽주성의 말이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둥지의 색이 다르다고 해서 실제로 찾아서 가져가기는 쉽지 않았다. 당장 고송도 연우혁이 도와주기 전까지는 찾지 못했으니까.
나중에 진짜 무공을 찾았을 때 상대를 놀려주기 위한 용도라면 그럴듯했다.
“그런가? 그럴듯하다고 해주니 기쁘군. 실은 범망공이 남궁세가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서 해본 생각일세. 백면신투가 왜 남궁세가에 들어가려고 했는지 계속 궁금했었거든.”
“도역유도(盜亦有道)군요.”
“그래. 포쾌의 도보다는 한참 아래지만 말일세.”
‘별 차이 없는 것 같은데.’
* * *
무사히 돌아온 연우혁은 바로 오 포두에게 산채를 토벌했다고 보고부터 정리해서 올렸다.
쪼잔해보여도 이렇게 차곡차곡 공적을 최대한 부풀려서 남겨놔야 나중에 더 높은 지위를 노릴 수 있지 않겠는가.
용맹무쌍하게 산채의 산적들을 토벌하고 온 부하의 모습에 오 포두의 입가는 찢어질 듯이 올라갔다.
“자네. 곧 포두가 될지도 모르겠군. 이거,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어!”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무림인들과 엮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보니 가끔씩은 쓸만하군.”
“아닙니다. 포두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무림인들과 엮이는 건 아주 위험하고 괴로운 일입니다.”
연우혁은 혹시라도 나중에 무림인을 상대하는 일을 시킬까봐 정색하고 대답했다.
무림인들과 엮이는 건 오늘 일만으로 충분했다.
운이 좋아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목숨이 몇 개라도 남아나지 않았을 일 아닌가.
무공의 수준을 올리고, 관직의 직위를 올리기 전까지는 무림인들과는 정말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나?”
“예! 포두님의 말씀이 틀린 게 하나 없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으음. 사실은...”
오 포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팽주성과 팽주희가 안으로 들어오려다가 멈칫했다.
“이런.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직 대화중이었다니.”
“아! 아닙니다. 다 끝났습니다.”
“????”
연우혁이 상관에게 배신당한 부하의 눈으로 오 포두를 쳐다보자, 오 포두는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북팽가 출신인데 예의까지 바른 청년이라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