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20)화 (20/107)

갈모 팽주희 (2)

연우혁의 말을 들은 팽주희는 매우 멋쩍어했다. 헛기침을 하더니 수습을 위해 말을 꺼냈다.

“미안하군. 그런데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가 꼭 학사만의 이야기는 아니라서.”

팽주희는 진지하게 말했다.

무림인으로서 진정 높은 경지에만 도달할 수 있다면 단명할 운명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당장 상단전이 열려서 오락가락하는 연우혁 입장에서는 헛소리처럼 들렸다.

‘장난하나.’

연우혁에게 하북팽가의 직계로 태어나겠느냐 혹은 상단전 열린 포쾌로 태어나겠느냐 물으면 무조건 전자였다.

“하지만 연 포쾌한테는 조금 무례하게 들렸겠군. 사과하지.”

“하하. 아닙니다.”

“사과를 받아줄 수밖에 없는 연 포쾌가 사과받게 만든 상황도 사과하지. 이거는 대답할 필요 없어.”

“......”

팽주희는 확실히 팽주성보다 영특한 구석이 있었다. 팽주성도 뛰어난 무인이었지만 몇몇 부분에서는 팽주희를 따라갈 수 없어보였다.

‘제갈규보다 머리 쓰는 게 나아 보이는데.’

연우혁은 팽주희가 왜 명석한 두뇌로 명성을 쌓지 못했는지 의아했다. 당장 제갈규 정도만 되어도 나름 명성이 있지 않은가.

“사과하는 김에 이걸 주지. 원래 주려고 갖고 온 거였지만.”

팽주희는 낡은 서책을 하나 꺼내서 선물했다. 겉표지도 없는 특이한 책이었다.

“무당의 도사에게 받은 책이야.”

“!!”

연우혁은 너무나도 놀라서 바로 대답하지도 못했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진지하게 말할 수 있었다.

“팽 소저. 은혜에 진심으로 감읍드리겠습니다. 절대로,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 연 포쾌. 미안한데, 혹시 이걸 무당파의 무공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팽주희는 아까보다 훨씬 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큼 연우혁이 기대하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아닙니까?”

“무당파의 무공을 멋대로 외인한테 전수할 수 있을 리가 없잖나... 이건 도술이야.”

구파일방 중에서 도가 계통의 무공을 쌓고 있는 문파는 여럿 있었지만 그 중에서 도술(道術)까지 그 맥을 이어가는 문파는 많지 않았다.

무공과 달리 술법이란 건 그 전수가 쉽지 않았을 뿐더러 효과도 들쭉날쭉했다. 게다가 때로는 방문좌도에 빠져 요술(妖術)이라고 몰리는 술사도 나왔으니 이런 술법의 진전이 잘 이어지지 않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당파는 도술의 명맥을 진지하게 이어가고 있는 문파 중 하나였다. 안으로는 무당파의 서고를 찾아 흩어진 고서에 적힌 술법을 기록하고, 밖으로는 술법에 관한 서책을 긁어모아 잊힌 부분을 보완하려고 했다.

“당연히 무당의 술법은 아니고 외부의 술법이야. 팔월문이란 문파였는데, 대대로 내려오는 서책이었다는군.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서 무당에 부탁한 거지.”

“그런데 이렇게 갖고 나오셔도 되는 겁니까?”

“예전에 오라버니하고 같이 무당파의 도사를 도와 같이 싸운 적이 있었거든. 오라버니는 보상으로 도(刀)를 골랐지만 나는 술법을 가르쳐달라고 떼를 썼지.”

팽주희는 추억에 젖은 눈빛으로 말했다. 제갈규 정도만 됐어도 우수에 찬 모습처럼 보였겠지만 팽가의 무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먹이를 두고 고뇌하는 맹수 정도로 보였다.

“술법에 관심이 많으셨습니까?”

“응. 제갈세가의 후기지수들을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 명성 높은 제갈세가의 수준이 이 정도인데 나라면 술법도 쓸 수 있지 않나?”

연우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충 결말이 짐작 갔기 때문이었다.

술법이나 이능 같은 건 의외로 지혜와 큰 상관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영성(靈性), 그러니까 상단전이 선천적으로 열린 정도와 상관이 깊었다.

연우혁처럼 그냥 상단전을 활짝 열고서 안에 영기를 가득 담은 채 시작하면 마구잡이로 신통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고, 그게 아니면 아무리 머리가 비범해도 신통력을 쓸 수가 없었다.

후천적으로 무공 수련을 통해 상단전을 개발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쯤 되려면 몇 단계는 더 올라가야 할 테니...

“아무리해도 안 익혀지는 건 안 익혀지더군. 버리기도 뭐해서 갖고 있었는데, 연 포쾌한테는 잘 맞을 것 같아서 이렇게 갖고 왔어. 잘 익혀봐. 위험한 좌도(左道)의 술법은 아니니까 안심하고.”

‘괜찮은 건가?’

연우혁은 서책을 받아들면서도 조금 머뭇거려졌다.

물론 담풍호에게 가르침을 받은 다음 여러 실험을 통해 상단전과 이능에 대해 나름 파악한 상태긴 했다.

하지만 술법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상단전이 열려 있고 영성이 충만하다지만 잘 익혀질지 의문이었다.

“듣기로는 강신술(降神術) 비슷한 술법이라더군.”

“귀신을 부르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내가 듣기로는 신선의 힘을 조금 빌리는 거였는데...”

팽주희도 자신이 없었는지 살짝 머뭇거리며 설명했다.

원래 도가에서는 사람의 몸에 수많은 신(神)들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고, 이 신을 수명이나 영혼처럼 생각해 잘 간수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했다.

그렇다면 뛰어난 도사들은 역으로 밖의 신들을 자신의 몸에 불러와 그 힘을 빌릴 수도 있었다.

“제가 이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만.”

“이해 못 해도 어쩔 수 없지. 일단 읽어나 봐.”

연우혁은 팽주희의 말에 서책을 펼쳤다. 올챙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복잡한 글자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연우혁은 무심코 영안을 열고 서책을 확인했다.

그 순간 뇌에 강렬한 충격이 몰려왔다. 마치 무공 하나의 복잡한 이치를 순간에 때려 박은 것 같은 일체감이었다.

‘큭...!!’

충격의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방금 배운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연우혁은 이 술법이 어느 신선에게 힘을 부탁하는 건지 깨달았다.

“알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팽주희는 기쁘면서도 시원섭섭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익혀보려고 그렇게 애를 썼던 술법을 저리 한 번에 터득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건 신선 중 남두성군(南斗星君)의 힘을 빌리는 술법입니다.”

“그럼 어떤 효능이 나타나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해봐! 한 번 해보면 알 수 있을 테니.”

“팽 소저.”

연우혁이 갑자기 진지하게 말을 꺼내자 팽주희는 놀랐다.

혹시 이 술법에 무슨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는 것인가 싶었다.

설마 무당파의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비밀이?

“저 정말 이제 순찰 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그러라고.”

*   *   *

팽주희에게 받은 술법은 연우혁에게 새로운 세계를 알려주었다.

무림에서 승패를 가르는 건 꼭 무공만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남두성군의 힘을 빌리는 강신술은 한 번 사용하면 힘이 사라질 때까지 내공과 체력이 배가되게 만들었다. 연우혁처럼 내공이 부족해서 골골대는 무림인에게는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술법에 소모되는 힘이 영안을 한 번 쓰는 것보다 훨씬 적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무공은 내팽개치고 적성에 잘 맞는 술법만 익히고 싶을 정도였다.

‘무공이 술법의 반만큼만 쉬웠으면 소원이 없겠군.’

빈약한 몸을 느끼자 제정신이 돌아왔다. 상단전의 기운을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얼마나 하단전에 내공이 부족한지 실감이 됐다.

영약을 한 번 먹었는데도 이 정도라니.

“오 포쾌님. 저 대신 순찰을 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당연히 해줄 수 있지.”

“?”

연우혁은 덩치 큰 선배 포쾌의 반응에 의아해했다.

저런 마음 따뜻한 말을 해줄 사람은 또 아니었던 것이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일은 무슨.”

오 포쾌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이 근질거렸는지 잠깐 참은 것을 끝으로 바로 입을 열었다.

“곧 포두가 될 것 같다면서? 사숙께서 그렇게 칭찬을 하시던데?”

“에이. 아직 멀었습니다.”

연우혁은 속으로는 기쁘면서도 겉으로는 먼저 승진해야 할 하급자가 해야 할 태도를 취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겸양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오 포쾌는 이미 연우혁이 포두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이 포두나 육 포두, 구 포두가 있긴 하지만 다들 사숙에 비하면 경험도 부족하고 시원찮은 작자들이지. 판관 어르신한테 은자를 적게 바쳤으면 옛날에 쫓겨났을 자들이거든.”

한경에서 나름 오래 구른 오 포쾌의 금과옥조 같은 이야기에, 연우혁은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지금 연우혁이 보기에 좀 더 높이 올라가려면 일단 포두가 좀 필수적이었다. 포쾌로는 아무리 공을 세워도 다른 관료들과 공을 나눠가지게 되어 있었다.

일단 포두가 된 다음, 공을 세워서 포두를 부리는 판관 자리를 노려보고, 그 다음에는 지부 나으리의 부관까지...

‘부관 자리는 너무 터무니없나?’

하여간 판관 정도만 되어도 연우혁은 최대한 은자를 긁어모으고, 길가에 굴러다니는 무림인들을 불러 모아 무공 수련에 몰두해 볼 생각이었다.

한경의 판관이 되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무림인은 무리더라도 적당한 명성의 무림인들 몇 정도는 부를 수 있을 테니까.

하여간 이런 모든 계획의 시작은 포두가 되는 것부터였다. 뇌물을 바쳐야 한다면 바칠 준비도 되어 있었다.

...아낄 수 있다면 당연히 아껴야겠지만.

“그런데 판관 어르신도 위의 눈치가 보이거든. 동지(同知, 지부의 부관)님들이 길거리의 소문만 안 좋아져도 바로 판관 어르신을 부르는데...”

오 포쾌의 말에 따르면 판관 입장에서도 똘똘한 포두 한두명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문제가 터졌을 때 뇌물만 바치는 멍청한 포두들만 있으면 판관도 같이 죽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오 포두 혼자서 그 역할을 해왔지만 판관이 보기에 좀 아슬아슬하긴 할 터.

젊고 뛰어난 포두 한 명을 늘리는 것도 해볼 만한 선택이었다.

“...그런 거란 말이지.”

오 포쾌는 말하면서 참새 꼬치 세 개를 끝장냈다. 노점 주인은 증오를 넘어 감탄의 눈빛으로 오 포쾌를 쳐다보았다. 연우혁은 자기가 대신 철전을 내밀었다.

“그럼 이대로만 있으면 포두가 될 수 있단 겁니까?”

“후후. 물론 아니지. 다른 포두 놈들이 끈질기게 방해를 할 테니까. 네가 올라가면 한 놈은 내려가게 될 것 아니야?”

“그럼 다른 포두 한 명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겁니까?”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오 포쾌는 깜짝 놀라서 꼬치를 떨어뜨렸다.

“그냥 여쭤본 겁니다. 그런 뜻인가 해서 말입니다.”

“무림인들도 아니고! 그런 살벌한 소리를 하다니.”

‘호들갑은 참.’

그냥 질문 하나 던졌는데 저런 반응을 보이는 오 포쾌의 모습에 연우혁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판관한테 뇌물을 바쳐야 하나?’

하지만 당장 연우혁이 쓸 돈도 없었다. 돈이 생기면 약방에 가서 영약부터 찾아야 하는데 무슨 뇌물이란 말인가.

그 다음으로 드는 생각은 역시 실력 승부였다.

‘쓸만한 사건이 하나만 더 있으면...’

지금도 판관이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을 텐데, 다들 관심 있는 사건 하나만 더 해결하면 쐐기를 박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오 포쾌님. 혹시 최근에 무슨 수상쩍거나 이상한 일 들으신 것 없습니까?”

“이상한 일? 그러고 보니 저번에 어시장에서 통통한 생선 몇 마리를 사가지고 왔는데, 돌아와 보니 영 시원찮더라고.”

“그건 팔기 전에 물을 잔뜩 먹인 겁니다.”

“...이런 빌어먹을! 그런 거였구나!”

뒤늦게 진실을 깨달은 오 포쾌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