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모 팽주희 (3)
‘아니. 돈 안 내고 먹으면서 그런 걸 예상 못했단 말인가?’
연우혁이 해결한 사건들이 살인사건만 있지는 않았다. 절도나 사기 같은 사건들도 많았다.
그런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느낀 건 이 대환국에서 가장 머리 좋은 이들은 사실 장사하는 상인들이라는 점이었다.
산장에서 벌어진 살인의 범인은 쉽게 찾아도, 산 짐승을 사들이지 않는 푸줏간 주인이 주변 장정들의 배가 터질 때까지 고기를 팔 수 있었던 비법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정답은 죽고 썩은 짐승들을 구해와 특제 양념에 절인 것이었다).
아마 지금 오 포쾌가 먹은 음식들 중에서도 상인의 비법이 몇 개는 들어가 있으리라.
“잠깐. 설마 이것도?”
“아이고, 포쾌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감히 포쾌님을 속여 넘기겠습니까?”
좌판 주인은 기겁해서 손을 내저었다.
양심 없는 상인들은 썩은 고기를 가져다가 팔고, 밀과 쌀에는 모래와 먼지를 섞었지만, 좌판 주인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물을 좀 먹였을 뿐이었다.
“하긴. 내가 주인장의 실력을 알지.”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은 굽신거리면서 오 포쾌에게 꼬치 하나를 더 내밀었다. 출출했던 연우혁이 다 구워진 다른 꼬치를 하나 집으려고 하자 주인은 그건 집지 말라고 눈빛을 보냈다.
“......”
“이걸 드시지요.”
주인은 다른 불 위에서 굽던 꼬치를 따로 꺼내줬다.
영안으로 꼬치의 상태를 확인한 연우혁은 오 포쾌와 같이 다닐 때는 더더욱 입에 넣는 걸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머. 여기서 대협을 만나게 될 줄이야...”
“?”
연우혁과 오 포쾌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본 적 있는 기녀가 웃으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누구지?’
기억은 곧바로 떠올랐다. 저번 제갈규를 따라갔던 객잔에서 범인으로 의심받았던 손님 중 하나인 기녀였다.
그러나 연우혁은 의아함을 느꼈다. 기녀의 이목구비가 저번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 뚫어지게 쳐다보시면 부끄럽사옵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번과 인상이 달라져서 바로 알아보질 못했습니다.”
“야, 야...! 미인의 얼굴은 원래 해가 뜨고 달이 질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걸 모른단 말이냐?”
오 포쾌는 연우혁의 무례한 발언에 기겁했다.
기녀의 분칠을 지적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었다. 한경의 기녀는 번영한 도시의 특성 상 어느 고관이나 유지와 친할지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고작해야 포쾌 정도 되는 놈이 한경의 기녀에게 원한을 샀다가는 베갯머리송사 한 번에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게다가 상대 기녀의 복장을 보니 붉은 비단을 넉넉하게 쓴 게 절대 작은 기루의 기녀가 아닌데...
‘아차.’
뒤늦게 오 포쾌의 뜻을 깨달은 연우혁이 급히 사과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저번에는 워낙 황망했던지라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절대 다른 뜻은 없습니다.”
“당연히 그런 뜻으로 이해했사옵니다.”
기녀가 웃으면서 넘어가자 오 포쾌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이 젊은 포쾌가 쓸데없이 자존심이나 고집을 세우지 않은 덕분에 잘 끝날 수 있었다.
가끔 다른 구역의 포쾌들 중에는 요패를 받은 탓에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것마냥 까부는 놈들이 나왔지만, 이런 놈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포쾌로 오래 가기 위해서는 유연한 허리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소저의 미모는 침어낙안이고 폐월수화입니다. 절세대미에 천지지미입니다.”
“......”
“......”
오 포쾌는 살면서 자기보다 더 자존심이 없는 놈은 또 처음 보았다. 기녀도 당황했는지 할 말을 잃은 채였다.
“고... 고맙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유능한 포쾌님한테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사옵니다.”
“연 포쾌한테 말인가?”
연우혁은 자기 자신을 찾아왔을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오 포쾌의 모습에 감탄했다. 마치 포쾌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예.”
“흠. 잠시만...”
오 포쾌는 기녀에게서 등을 돌린 뒤 연우혁에게 심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청탁은 조심해서 받아야 한다. 특히 기녀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거일 가능성이 있단 말이다. 이거.”
오 포쾌는 목에 대고 긋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한경이 치안이 안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이만한 대도시에 사파나 흑도의 무리가 없을 리가 없었다.
고관대작에 명문정파 출신의 속가제자들도 여럿 있는 곳이라 거칠게 활동하진 못해도, 이들은 나름 견실한 곰팡이처럼 음지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포쾌가 가장 유혹에 빠지기 쉬운 상대가 바로 이런 사파나 흑도의 무리들이었다. 기녀라면 십중팔구 이들과 연결되어 있으리라.
“포쾌로 오래 해먹으려면 이런 놈들에게 부탁을 받을 때 제일 조심해야 한다.”
‘보통 받지 말라고 해야 하지 않나?’
연우혁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미 포쾌 노릇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는 ‘하면 안 된다’가 없었다. ‘적당히 하면 된다’가 전부였다.
“누구에게 주먹질을 한 걸 덮어달라느니, 누구를 집에서 쫓아냈다느니, 누구의 호패를 위조했다느니... 이런 건 괜찮아. 근데 누굴 죽인 걸 덮어달라는 부탁 같은 건 위험하다.”
“누굴 죽인 걸 덮어달라는 부탁일까요?”
“그게 아니면 저런 기녀가 왜 널 찾아와서 부탁하겠냐?”
“으음.”
연우혁은 그 말에 영안을 열고 기녀를 훑어보았다.
딱히 위협적이거나 사악한 꿍꿍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들고 있는 짐도 별다른 게 없었고, 느껴지는 감정은 지루함과 오 포쾌에 대한 적당한 한심함 정도가 다였다.
‘그런 수작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거절합니까?”
“뭐? 여기서 거절하면 안 되지. 따라가서 핑계를 대야지.”
“과연... 알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연우혁은 오 포쾌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오 포쾌는 단단히 의자를 붙든 채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 한 명은 살아야지 나중에 복수를 해주지 않겠냐. 잘 갔다 와라.”
“......”
* * *
“누굴 죽인 걸 덮어달라는 부탁은 절대로 아니옵니다.”
기녀는 오 포쾌가 멀어지자마자 바로 말했다. 연우혁은 목청 큰 선배 포쾌를 속으로 원망했다.
“포쾌님께서는 제가 경험이 부족해서 걱정을 하신...”
“그렇지 않사옵니다.”
기녀는 단칼에 잘랐다. 연우혁은 좀 머쓱해졌다.
물론 오 포쾌가 사건을 해결하는 능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외부인이 저렇게 단호하게 말할 줄은 또 몰랐던 것이다.
“하북팽가나 제갈세가의 콧대 높은 무림인들이 저렇게 후한 평가를 하는 일은 드문 일이오니...”
말을 하던 기녀의 얼굴이 조금씩 변하고, 목소리에는 강한 힘이 실렸다. 연우혁은 본능적으로 영안을 열고 기녀를 확인했다. 아까와는 다른 무림인의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역용술을 쓸 줄 아는 무림인에 기녀로 위장할 줄 안다면?
연우혁은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이름을 말했다.
“혹시 하오문에서 나오신 겁니까?”
“!”
기녀는 놀란 눈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 벌써 하오문의 이름을 알아맞힐 줄이야.
“어떻게 아신 겁니까?”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신데 기녀로 위장하신다면...”
“맞습니다.”
기녀는 감탄하며 말했다.
하오문은 무림의 하찮은 이들이 모여서 만든 점조직 형태의 문파였다. 마부, 짐꾼, 점소이, 기녀 등 이런 이들이 주요 구성원들인 만큼 외부에서 봤을 때는 비웃음을 사기 쉬웠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하오문 내에도 고수는 있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취봉(醉鳳) 이교가 바로 그런 고수 중 하나였다.
연우혁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상대가 그냥 기녀여도 굽신거릴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하오문의 고수라는 걸 들으니 더욱 준비하게 됐다.
“하오문의 능력은 실로 대단합니다. 제가 무림인들의 일을 곁든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파악했을 줄이야.”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번루에서 세가의 후기지수들이 취해서 떠들었으니.”
“......”
연우혁은 팽주성과 친우들을 욕했다.
술에 취할 거면 가문에 돌아가서 취할 것이지 남들의 귀가 많은 곳에서 왜 취한단 말인가?
“지금 이렇게 연 포쾌님을 불러온 것은 뛰어난 지혜가 필요해서입니다.”
“그렇습니까.”
상대의 말에 연우혁은 솔직히 안심했다.
말하는 걸 보니 확실히 수상쩍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일이 터졌는데 범인을 찾거나 하는 일이 분명했다.
“혹시 누가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보물이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뭐지?’
살인도 절도도 아니면 남는 게...
“기루의 기녀 중 한 사람이 상사병에 걸렸는데, 그 상대가 누군지 알아내주셨으면 합니다.”
“...제, 제가 남녀 간의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만.”
“포쾌님께서 이번 일을 도와주신다면 반드시 포두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사실 남녀 간의 일이라 하더라도 세상일과 무릇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 * *
연우혁은 휘황찬란한 기루의 이층으로 올라갔다.
아직 저녁이 되지 않았는데도 일층에는 손님들로 가득했고, 그 손님들의 돈을 노리고 온 악사와 행상들로 몸을 부딪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과연. 오 포쾌가 질색해하는 이유를 알겠군.’
오 포쾌는 ‘이런 곳은 발만 디뎌도 돈을 내야 한다’며 치를 떨었다. 여기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옷차림만 봐도 그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전낭만 다 털어도 수십년치 내공의 영약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관직보다는 거상이 더 효율적인 방법일지도 몰랐다.
‘집중하자.’
연우혁은 자신의 기억을 차분히 점검했다.
해결했던 사건들 중에서 기녀들이 나왔던 사건은?
쌍둥이 기녀 실종사건, 패물 도난사건, 정인을 납치해서 가뒀던 기녀 사건 등등.
‘너무 많은데.’
연우혁은 방향을 바꿔서 접근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이번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었다. 굳이 사건을 떠올릴 필요 없이 영안으로 관찰만 해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에 빠진 기녀라면 정인을 만날 경우 확연히 감정이 드러날 터.
영안의 사용에 익숙해진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려낼 수 있었다.
덜컥!
문이 열리더니 낯익은 얼굴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팽가 남매였다.
“......”
연우혁이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팽주성이 물었다.
“취봉은 만나봤나?”
“하오문의 사람을 알고 계셨습니까?”
“어? 그야 알지. 내가 취봉한테 자네를 추천했는데.”
옆에 있던 팽주희가 ‘나는 안 했다’라는 뜻으로 손을 작게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