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두 연우혁 (1)
오자마자 헛소리를 들은 탓에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하자, 팽가 남매는 알아서 이해해줬다.
“그러니까 밖에서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했잖나. 연 포쾌가 부담이 될 것 아니야!”
“아. 미안하네. 미안해. 그래도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입이 가벼운 사람은 없잖나.”
팽주성은 동생에게 사과하고 다시 말했다.
“그래. 그래. 혁숭월이 두종을 고발한 것에 대해서 연 포쾌는 아무것도 상관이 없네. 아무것도 모르는 일일세. 하하!”
“아, 예...”
연우혁은 묘하게 피곤해진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다. 희한하게 상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팽가 남매는 한손에 술을 벌써 들고 있었다.
설마 주방에서 집어오기라도 했나?
‘무슨. 그래도 하북팽가 출신인데...’
“연 포쾌님. 다시 한 번 이번 일을 정식으로 감사드리겠습니다.”
이교는 진지한 자세로 감사를 표했다.
처음에 포쾌를 데리고 왔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의 마음으로 데리고 왔었지만, 그런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였다. 진짜 재주를 가진 사람을 못 믿고 사기꾼처럼 생각하다니.
눈앞의 포쾌에게는 정말 신통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호풍환우하는 그런 신통력은 아니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일에 숨겨진 속내를 알아내는 건 차 한 잔 마실 시간에 끝낼 수 있었다.
“하오문은 이 일을 잊지 않을 겁니다.”
“과분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연우혁도 예의 바르게 답했다. 표정은 태연했지만 속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하오문이 은혜를 하나 빚졌다는 사실은 가볍게 넘어갈 게 아니었다. 연우혁이 부탁한다면 이들은 가능한 들어주기 위해 노력을 다할 테니까.
“실은 포두의 자리를 노리고 있습니다만, 하오문이 도와주신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건 안 되네.”
“......”
팽주성이 대뜸 훼방을 놓자 연우혁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자기가 포두가 되겠다는데 왜...
“왜 안 됩니까?”
“이미 연 포쾌는 포두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일세. 내가 몇 곳에 물어보니 판관께서 새 포두로 연 포쾌를 올리려고 한다더군. 그러니까 연 포쾌는 다른 걸 부탁하게.”
“팽 대협! 감사합니다!”
팽주희는 방금 노려보려다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서 감사해하는 연우혁을 보고 낮게 웃었다. 참 보는 것만으로도 질리지 않는 포쾌, 아니 포두였다.
연우혁은 믿기지 않았는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정말 확정이 된 겁니까?”
“물론일세. 역으로 생각해보게. 최근에 연 포쾌만큼 공을 세운 포쾌가 어디 있나? 포두들도 그렇게 공을 세우지는 못했는데.”
“하지만 포두는 공적만으로 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지금 포두들 사이에 빈 자리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연우혁은 포쾌로 일한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은데다가 윗선에 바친 뇌물도 없었고 연줄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커다란 문제는 지금 포두의 자리가 꽉 차있다는 점이었다. 포두들이 크게 문제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뜨내기 포쾌 하나를 올려주자고 포두들의 사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교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사 포두를 그래서 베어버린 줄 알았습니다만?”
“그래서 사 포두를 베어버린 거 아니었나?”
팽주희도 동의했다. 물론 연우혁은 펄쩍 뛰며 부정했다.
“아닙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팽주성이 의아해하며 동생에게 물었다.
“이것도 그건가? 그, 맞지만 한경 내에서 평판을 생각해서 인정할 수 없는?”
“그런 셈이지.”
“......”
연우혁은 팽가 남매가 전음으로 대화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욕했다.
“그렇군. 우연히 사 포두를 벤 연 포쾌. 사 포두가 다친 것도 다친 것이지만 이번에 한 실책도 실책이라, 판관께서는 연 포두에게 사 포두의 구역을 맡기기로 하셨다는군.”
“그럼 사 포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포쾌로 내려가겠지? 연 포두 밑이 되겠군.”
‘끔찍한데.’
연우혁은 질색했다. 만약 포두가 된다면 일단 사 포쾌부터 다른 구역으로 보내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자길 죽이려는 부하를 누가 데리고 다닌단 말인가!
“잘해보게, 연 포두. 들어보니 한경의 고관들은 자네를 꽤 좋게 보더군. 이번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서 체면이 섰다고들 말이야.”
팽주성의 말에 연우혁의 얼굴이 밝아졌다. 위로 더 올라가고 싶지만 연줄도 돈도 없는 연우혁에게 다른 관리들의 평가는 생명줄과도 같았다.
“나는 자네가 그냥 다 버리고 무림인으로 와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 관직에 꿈을 둔 사람에게 다 버리고 무림인으로 오라니. 그게 할 소리야? 연 포두. 이 사람 말은 너무 귀담아듣지 말라고.”
팽주희는 자신의 오라버니가 하는 헛소리를 막았다.
“이렇게 말은 해도 이번에 한경을 돌아다니면서 어울리지도 않은 청탁을 하고 다녔거든.”
“청탁이라니. 그냥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
팽주성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북팽가에서 귀형의 명성을 듣고 한 번 찾아왔습니다’라는 핑계로 한경의 유지들을 방문하긴 했지만, 유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팽주성이 왜 방문했는지는 눈치 챘을 것이다.
갑자기 방문해서 최근에 포쾌 하나가 해낸 일에 대해 떠들고 포두 자리가 하나 비지 않았냐고 이야기하면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팽 대협...!”
연우혁은 진심으로 감동했다. 이제까지 팽주성이 사지(死地)로 끌고 다닌 것도 용서가 될 만큼 감동적이었다.
겸연쩍은 표정을 짓던 팽주성은 연우혁이 연신 감사를 표하자 눈치를 보더니 말을 꺼냈다.
“혹시 그러면 하나 부탁해도 되겠나?”
“...아. 예.”
연우혁은 걱정이 됐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팽주성 같은 사람이 저렇게 나섰는데 그냥 넘어가는 것도 좀 그랬던 것이다.
“앞으로 팽 형이라고 부르게. 그거면 됐네.”
“관직에서 일하는 사람한테 뭔 그딴 부탁을...”
“팽 형님!!”
“하하! 우혁 아우!”
팽주희는 자신의 말은 무시하고 연우혁을 얼싸안는 팽주성을 보고 혀를 찼다.
앞을 보니 이교도 눈앞의 상황이 예상 밖이었는지 냉정한 얼굴에 금이 가있었다.
노리던 목적을 달성해서 만족한 팽주성이 술을 홀짝이며 말했다.
“그래서, 포두가 아닌 다른 부탁은 생각이 나나?”
“아. 예. 실은...”
“무공이겠지.”
“무공이겠군.”
이교는 팽가 남매에게 미리 들어서 준비했던 만큼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은자를 좀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원래는 은자를 받아서 그걸로 영약을 사거나 무공을 구해 볼 생각이었는데 그걸 밝히기에는 좀 민망해졌다.
솔직히 하오문한테 무공을 받을 수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실은 그럴 줄 알고 취봉에게 내공심법을 부탁했네. 아무래도 위국신공의 약점은...”
팽주희는 웃음을 참기 위해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 특유의 느린 내공심법이라고 생각했거든.”
“!!”
안 그래도 연우혁도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놀라움은 더욱 컸다.
무공에서 내공심법은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아무리 절세의 초식을 익힌다 하더라도 내공의 적절한 조화 없이는 완벽하게 펼칠 수 없었다.
당장 연우혁이 몇 번의 싸움을 치르면서 언제나 느꼈던 건 권법의 떨어지는 완성도가 아니라 내공심법의 부족함이지 않았던가.
“하오문의 서고에 있던 내공심법 중 세 권을 갖고 왔습니다. 이 중 하나를 골라주셨으면 합니다.”
이교는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하나는 내공의 성취가 빠르지만 정순함이 떨어지는 심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공의 성취는 평범하지만 정순함이 앞보다 뛰어난 심법입니다. 마지막은 내공의 성취는 느리지만 정순함이 가장 뛰어난 심법입니다.”
설명이 끝나자 팽가 남매는 연우혁에게 눈짓했다.
‘뭘 골라야 할지 알고 있겠지?’라고 말하는 눈짓이었다.
“은혜를 갚는 쪽에서 이런 말을 하기 죄송스럽습니다만, 한 번 고르시면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서고의 무공은 함부로 유출할 수 없는 것이라...”
“예. 알겠습니다.”
“고르셨습니까?”
“제일 첫번째 무공으로...”
“어째서인가!!!”
팽가 남매는 자신도 모르게 동시에 외쳤다.
* * *
술자리가 파하고 나서도 팽가 남매는 끝까지 아쉬워했다.
물론 연우혁의 입장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포두는 무공을 수련할 시간이 많지 않고 영약을 먹을 기회도 흔치 않으니, 성취가 빠른 게 탐나리라.
하지만 내공이 불순하단 건 생각보다 크게 발목을 잡는 문제였다. 둘 모두 연우혁보다 경지가 높은 무공의 선배이기에 그걸 잘 알았다.
왜 사파의 무공을 익히거나 마공을 익힌 무인들이 가끔 주화입마에 걸리고 광증에 빠지겠는가. 불순한 내공이 쌓이다 못해 상단전까지 올라가서 터지는 것이다.
“우혁 아우. 운기행공을 하다가 이상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서신을 보내게.”
“예. 감사합니다.”
걱정하는 팽가 남매를 돌려보내고 나서 연우혁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너무 많은 일들이 한 번에 일어난 탓이었다.
‘불순함은 별로 문제가 안 될 것 같은데.’
연우혁이 첫 번째 무공을 고른 건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상단전에 기운이 가득차서 아무리 불순한 내공을 익혀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그리고 지금 연우혁은 한시라도 빨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공을 쌓아야 했다. 안 그러면 언제 뇌관이 상단전에서 터질지 몰랐다.
“아. 이 소저. 화희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연우혁은 아까 물어보지 못한 질문을 이교에게 던졌다. 이교는 연우혁이 이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기에 놀라워했다.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런. 혹시 건강이...”
“그건 아닙니다. 충격이 크긴 했지만, 엮인 일이 컸던 만큼 잠시 한경에서 나가있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 거라면 다행입니다.”
대답에 연우혁은 안심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기녀에게 피해가 갈까봐 걱정했는데 별다른 문제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교는 그런 연우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연 포두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예. 물어보십시오.”
심법을 받은 덕분에 연우혁은 매우 너그러워져있었다.
“화희는 왜 제가 아닌 포두님에게 사실을 털어놓은 겁니까?”
“...?”
연우혁은 뭔 소린가 싶었다. 기녀가 사실을 털어놓은 건 정곡을 찔린데다가 양옆에 팽가의 흉악한 무림인 둘이 칼을 차고 서있었기 때문이지 않은가.
하지만 앞의 무림인은 그게 궁금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연우혁은 상대가 왜 질문했는지 깨달았다.
“친한 사이셨습니까?”
“예? 예... 나름대로.”
‘이건 신통력을 쓰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건데.’
연우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친한 사이니까 오히려 말하기 힘든 게 있는 법입니다. 친구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을 어떻게 쉽게 말하겠습니까.”
“...!”
“감히 충고하겠습니다. 화희란 분에게 먼저 서신을 보내보십시오. 그러면 저한테 물어보는 것보다 훨씬 좋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대답을 마치고 연우혁은 돌아섰다. 이교는 돌아가는 포두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깊은 고민에 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 * *
양초는 사 포두 밑에서 일하던 포쾌로, 나름대로 자신의 일에서 소소한 보람을 느끼던 포쾌였다.
하루아침에 사 포두가 포쾌로 강등되고 새 포쾌가 포두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꿀꺽-
양초는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새 포두가 무슨 트집을 잡으며 괴롭힐지 알 수 없었다.
듣기로는 사 포두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으니(항간에는 사 포두를 덤벼들게 만든 뒤 직접 베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계, 계십니까. 포두님!”
“들어와라.”
새 포두는 정말로 젊었다. 이 한경의 포두 중 가장 젊어보였다.
“양초라고 합니다! 앞으로 포두님 밑에서 분골쇄신하여 멸사봉공하겠습니다!”
“그, 그 정도까지는...”
“예?”
“됐다. 오늘 오기 전에 순찰하면서 무슨 일 없었나?”
“앗, 예! 아래 거리 약방에 도둑이 들었다고 합니다. 밤에 창(窓)으로 도둑놈이 들어와서 약재를 훔쳐갔다고...”
“어떤 약재지?”
“예? 그, 방풍 세 뿌리하고, 자미근 두 뿌리...”
“그렇군. 약방 주인을 잡아와라.”
“예??”
“약방 주인을 잡아오라고. 그 사람의 자작극이다.”
“......”
양초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눈만 끔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