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두 연우혁 (2)
‘지금... 면신례(免新禮)를 하시는 건가?’
어느 조직이든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는 그 조직의 일원이 되기 위한 일종의 텃세가 기다리고 있었다.
포쾌 또한 새로 들어오면 신참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종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시험들을 통과해야 했다.
선배 포쾌에게 술을 사거나 뇌물을 바치는 건 비교적 가벼운 수준이고 어떨 때는 포쾌의 묵곤으로 두들겨 맞을 때도 있었다. 이런 걸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포쾌도 제법 됐다.
양초가 새로 들어온 포쾌는 아니었지만 포두가 바뀐 이상 이런 텃세는 각오해야 했다. 포두가 마음만 먹으면 그 밑의 포쾌들은 전부 갈아치울 수도 있었으니...
‘그래. 이건 시험이다!’
각오한 양초는 이를 악물었다. 이건 시험이 분명했다.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명령도 따르는지 보는 시험!
열심히 구걸하고 훔쳐서 번 피 같은 돈을 뇌물로 바쳐서 얻은 포쾌 자리였다. 쉽게 잘려나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예! 약방 주인의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데리고 오겠습니다!”
“...아니. 다리를 부러뜨리면 안 되지. 그냥 좋게 말해서 데리고 와라.”
“앗, 예.”
양초는 고개를 숙인 뒤 약방으로 향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이 묵곤을 사정없이 휘두를 생각이었다.
“이보시오!”
“포, 포쾌 나으리. 도둑은 잡으셨습니까?”
약방 주인은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지도 못한 채 뛰어나왔다. 옷은 남루하고 더러웠으며, 약방 안은 아직 정리도 덜 된 것 같았다.
인상이 어찌나 순하고 불쌍했는지 양초는 순간 머뭇거렸다. 평소에 약방 주인이 양초에게 해줬던 일들도 생각났다. 철전을 하나씩 쥐어주며 ‘포쾌 나으리, 포쾌 나으리’하고 깍듯이 감사해하던 사람 아니던가.
이 불쌍한 사람이 자작극을 벌였다니. 새로 들어온 포두는 정말 잔인무도했다.
“따라... 따라오셔야 할 것 같소!”
“예? 도둑이 잡힌 겁니까?”
“포... 포두님께서... 당신이... 스스로 일을 꾸미셨다고 생각하고 있소!”
양초는 눈을 맞추지 못하고 외쳤다.
약방 주인은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바닥에 엎드리더니 대성통곡을 했다.
“그만 울고 따라오ㅅ...”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감히 포쾌 님을 속이려 하다니...!”
“??????”
양초는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했...”
“제가 눈이 멀었나봅니다! 조금이라도 돈을 벌어보려고...”
“......”
양초는 충격과 배신감과 허탈함에 멍하니 서있었다.
“일, 일단 포두님한테 갑시다. 빨리!”
“제가 잘못했...”
“닥치고 빨리 오시오!”
* * *
‘포두의 자리는... 생각보다 좋군.’
연우혁은 권력에 전율하며 눈을 감았다.
포두가 되고 나니 왜 사람들이 권력에 집착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포두 자리만 해도 이렇게 좋은데 그 윗자리들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일단 포두는 녹봉이 포쾌의 몇 배는 됐지만, 사실 녹봉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관료들의 녹봉은 그리 높지 않았다.
중요한 건 포두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였다.
일단 한경의 포두는 자신이 맡은 구역에 위치한 안가(安家) 하나를 쓸 수 있었다.
포쾌들을 불러 모으고 범인을 불러서 간단한 심문을 할 때 쓰라고 준 장소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포두들은 여기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아도 됐다.
순찰이나 추포는 포쾌들을 시키면 그만이니 포두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따박따박 녹봉이 들어오는 것이다.
여기서 좀 더 발전한 포두는 ‘저택도 안가라고 할 수 있다’ ‘주루도 안가라고 할 수 있다’ ‘기루도 안가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식으로 영역을 확장시켜나갔다.
‘나는 그 정도까진 필요 없지.’
연우혁은 그렇게 과감하게 비리를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이런 안가 하나면 충분했다. 연우혁이 이 안가에 기뻐한 이유는 바로 무공 수련 때문이었다.
포쾌로 일할 때는 아무리 유능하고 뛰어나도 각자 나눠서 일을 맡고 순찰을 돌아야 했지만, 포두로 구역을 하나 맡게 되자 밑의 포쾌 놈들을 부려먹으면 되는 것이다.
연우혁은 앉아서 무공을 수련하다가 포쾌들이 돌아오면 확인만 해도 됐다. 실로 완벽한 환경이었다.
‘어쩌면 포두는 완벽한 관직일지도 모른다.’
적극적이고 용맹한 포두들은 밑의 포쾌들을 갈취하고 주변 객잔이나 가게를 돌며 은자를 긁어냈지만 연우혁은 그럴 배짱까진 없었다. 그저 무공 수련만 할 수 있으면 충분히 감사했다.
하해불택신공(河海不擇神功).
이번에 하오문에서 받은 심법의 이름이었다. 받자마자 영안으로 이 심법을 완벽하게 이해해버린 연우혁은 아직도 효과에 전율하고 있었다.
위국신공과 같은 신공이지만 이건 정말로 차원이 달랐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내기가 쌓이는 게 느껴졌다.
좀 탁한 기운들도 같이 흡수하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지금 활짝 열린 상단전에 영기들이 대해(大海)마냥 쌓여있는데...
‘내공을 쌓고 영약을 긁어모은다. 일단 목표는 이류 말입이다.’
목표를 되새기며 명상하던 연우혁의 귀에, 밖의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연우혁은 깊게 들이쉰 호흡을 내쉬며 운기조식을 멈췄다.
하해불택신공의 또다른 장점은 이런 끊고 멈춤이 자유롭다는 점이었다. 정종무공과 달리 사파의 무공들은 기습을 겪을 일이 많은 만큼 내공이 불순하게 쌓인다 하더라도 이런 편이성을 우선시했다.
“왔나?”
연우혁은 약방 주인을 데리고 들어오는 양초를 마루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
영안으로 봤을 때 딱히 ‘사 포두의 원한을 갚겠다!’같은 기색은 없었지만, 사람의 마음은 언제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법.
양초가 제대로 된 충성심을 보이기 전까지는 연우혁도 아직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 사 포두 밑에서 일하던 포쾌들인 만큼 지금은 고개를 숙여도 방심하면 안 됐다.
“연, 연 포두님! 약방 주인이 실토했습니다!”
“그랬겠지.”
연우혁은 하품을 하며 약방 주인에게 말했다.
“돈을 빌렸는데 이문이 나지 않아서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군.”
“?!!!”
엎드린 약방 주인은 깜짝 놀랐다.
자작극을 알아차린 것도 놀라웠지만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도 알아맞힐 줄이야.
마치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신선 같았다.
“하지만 그런 식의 자작극을 펼치면 포두를 맡은 사람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줄 테니, 약방을 다시 운영하게.”
“......”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너무 놀라서 약방 주인이 그대로 굳어버린 탓이었다.
“싫은가?”
“아닙니다! 감... 감... 감사합니다!!!”
영기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연우혁은 약방 주인에게 돌아가라고 손짓했다.
곤장을 맞지도, 혹은 다른 협박을 받지도 않고 그냥 돌아가라는 포두의 말에 약방 주인은 믿기지가 않는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이대로 나가면 밖에 기습이라도 있을까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약방 주인이 돌아가고 나서야 양초는 놀란 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포두를 쳐다볼 수 있었다. 젊은 포두는 방금 있었던 일이 마치 없었던 것 마냥 차분하게 다시 눈을 감았다.
양초는 눈치를 보고 보다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연, 연 포두님.”
“뭐지?”
“그... 약방 주인이 자작극을 꾸몄다는 걸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방풍 세 뿌리하고 자미근 두 뿌리를 듣고.”
“...???”
‘아차.’
연우혁은 자기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를 이해시켜주려면 발자국의 위치나, 부서진 파편이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혹은 다른 돈이 사라졌느냐 안 사라졌느냐로 말해줬어야 했다.
방풍 세 뿌리하고 자미근 두 뿌리를 듣고 무슨 사건인지 떠올라서 맞힐 수 있는 건 연우혁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연우혁은 다시 설명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연우혁은 포두였고 상대는 포쾌였기 때문이었다.
‘이게 권력이군!’
양초는 눈만 끔벅이며 ‘방풍 세 뿌리하고 자미근 두 뿌리’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방풍 세 뿌리, 자미근 두 뿌리...”
“더 물어볼 게 있나?”
“그, 방금 약방 주인은 왜...”
“왜 처벌하지 않았냐고?”
연우혁은 예상이 간다는 듯이 먼저 물었다.
“아, 아니요. 왜 은자를 받지 않고 그냥 보내주셨는지...”
“......”
예상치 못한 대답에 연우혁은 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 비틀거릴 뻔했다.
‘장난하나.’
포두 멋대로 풀어주는 건 의문을 가지지 않지만 그냥 공짜로 풀어주는 건 의문을 가지다니.
연우혁은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은자 좋아하지만 양심적으로 덜 찔리게 받고 싶구나’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다듬어서 말해야 했다.
“녹봉을 받는 사람이 사사로운 뇌물을 받을 순 없지.”
“...!!”
양초는 벼락을 맞은 표정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이런 포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오... 오늘, 정말로 개안했습니다. 저, 저는 연 포두님 같은 분 밑에서 일하게 되어 정말로 기쁩니다!”
“나도 양 포쾌 같은 사람이 밑에서 일하니 기쁘군.”
연우혁은 영안으로 양초를 훑어보았다.
갑자기 충성심을 가득 보내니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안심이 되었다. 나중에 사 포두의 의뢰를 받아 배신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뇌물 안 받는다고 이렇게 충성할 일인가?’
혹시 노점에서 철전을 내기라도 하면 눈물을 흘릴지도 몰랐다.
“처음 뵙겠습니다. 막탁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포두님 밑에서 분골쇄신하여 멸사봉공하겠습니다!”
다른 포쾌들도 차례대로 들어왔다. 연우혁은 대충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겁먹은 놈, 걱정 있는 놈, 불만 있는 놈은 있어도 배신할 놈은 안 보이는군.’
“반갑다.”
“여기 새로 오신 포두님을 위해 저희의 성의를 모아봤습니다!”
막 포쾌는 손톱만한 은자를 하나 꺼내들었다. 그걸 본 양초가 다급히 말렸다.
“관둬라!”
“왜 이러는 거냐? 미친 거냐?!”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연 포두님께서는 사사로운 청탁을 아주 싫어하신단 말이다! 녹봉을 받는 관리가 어떻게 사사로운 뇌물을 받느냐고 하셨다!”
“...!!!”
놀라워하며 술렁이는 포쾌들을 보며 연우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포쾌들 은자는 받아도 괜찮은데.’
망해가는 약방 주인 은자는 좀 그렇지만 포쾌들 은자는 받아도 가책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포쾌들이 일제히 경탄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충...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래라.”
연우혁은 양초란 놈을 가장 부려먹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 * *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 새로 온 포두의 소문은 구역 인근으로 쫙 퍼져나갔다.
이 새로 온 포두는 구역을 돌면서 은자를 뜯지도 않았다. 안가에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그냥 해결해버리는데, 그 해결에 한 번의 어긋남도 없었다.
‘무슨 일이지?’
연우혁은 부하들이 문 밖에서 수군거리는 모습에 기침하며 불렀다.
“들어와라. 무슨 이야기를 그리 하고 있나?”
“앗, 포두님. 죄송합니다! 정말 별 이야기 아니었습니다. 그... 사 포두...”
“이런 멍청한 녀석. 포쾌지, 이제!”
“아. 사 포쾌. 사 포쾌가 독으로 앓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 말입니다.”
연우혁은 자신도 모르게 채찍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단호히 변명했다.
“내가 한 게 아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