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잔의 독 (1)
‘설마 내가 안과 밖을 착각했나?’
연우혁이 받은 채찍, 백사격각편은 오행산에 사는 커다란 흰 구렁이를 잡아 독에 절여 만든 채찍인 만큼 마음만 먹으면 상대를 중독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창(戈)을 그치게(止) 하는 것이 무(武)인 만큼 좋은 병장기는 주인이 원하면 상대를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어야 했다.
냉수사 고송은 그런 부분에서 자부심이 있는 무림인이었고 당연히 백사격각편을 만들 때도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
채찍의 안쪽으로 휘두르면 독이 묻은 비늘이, 바깥쪽으로 휘두르면 독이 묻지 않은 비늘이 휘둘러진다고 백사편법에 적어놨던 것이다.
분명 연우혁은 바깥쪽으로 휘둘렀던 것 같은데...
‘혹시 냉수사가 잘못 적은 거 아닌가?’
연우혁은 찜찜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 포쾌의 거처로 가보자.”
“!”
포쾌들은 깜짝 놀랐다.
연우혁이 사 포쾌의 거처로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 그러지?”
“뻔뻔하게 뇌물을 받다 걸린 것도 모자라 독까지 걸려 포쾌로서의 일도 하지 못하는 사람 아닙니까? 포두님께서 굳이 방문하실 이유가...?”
“맞습니다! 그냥 요패를 뺏어오겠습니다. 놈을 파직하시죠!”
이 포쾌들은 사 포두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이지만, 일말의 의리나 충성심도 보이지 않았다. 사 포두가 포쾌들을 어떻게 부렸는지 알 것 같았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눈엣가시 같던 사 포쾌를 쫓아내고 싶어했다. 같은 포쾌라 하더라도 사 포쾌는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무공이 뛰어났으니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되레 그들이 두들겨 맞을지도 몰랐다.
맹수가 약해졌을 때 잡아야 하는 법.
“아니다. 좋지 못한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내 부하 아니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러 가보겠다.”
“......”
포쾌들은 머뭇거리면서 짐꾸러미를 챙겼다. 그 안에 든 물건들을 영안으로 확인한 연우혁은 엄하게 말했다.
“사 포쾌를 조용히 죽이러 가는 게 아니니까 당장 내려놔라.”
“그,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연우혁이 사 포쾌가 아픈 틈을 타 완전히 끝내버릴 줄 알았던 막탁이 머쓱한 표정으로 짐꾸러미를 내려놓았다.
* * *
사 포두, 아니 사 포쾌는 포두들 중에서 재물을 불리는 재주가 제법 뛰어난 사람이었다.
다른 포두들이 부하 포쾌들에게 술을 사주느라 주루에서 은자를 낭비할 때 사 포쾌는 한 움큼의 은자도 낭비하지 않고 알뜰하게 절약했다.
식사도 노점이나 가게에서 해결했으며 거기서 한 끼를 때울 때마다 오히려 본인이 철전을 받는 새로운 개념의 식사를 발명해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밑의 포쾌들이 괜찮다고 거절해도 인자하게 은자를 빌려주고 약간의 이문만을 추가해서 돌려받기까지 했으니...
‘정말 철저하게도 뜯었군!’
걷는 동안 포쾌들이 이를 갈며 외치는 소리에 연우혁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 정도면 포두로 부자가 되는 법을 써서 찍어내도 될 것 같았다.
하여간 사 포쾌는 이렇게 번 돈으로 한경 안의 비교적 좋은 입지에 위치한 번듯한 객잔을 사들여서 운영하고 있었다.
이름도 거창하게 천객객잔이었다.
“놀랍군. 포두가 객잔을 운영할 수 있나?”
국법으로 포두가 객잔을 운영하면 안 된다는 규칙 같은 게 있지는 않았지만, 한경 같은 대도시에서 객잔을 운영하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었다.
개방의 허락 없이 대도시에서 구걸을 하면은 거지들에게 잡혀가듯이 커다란 도시에는 그 직종과 촘촘하게 얽힌 조직들이 있었던 것이다.
객잔이라면 객잔을 운영하는 이들이 모인 방회(幫會)가 있었고, 주루도 주루를 운영하는 이들이 모인 방회가 있었으며, 또 노점상은 노점상대로...
이런 방회에 가입하지 않으면 장사 자체가 불가능했다. 포두가 이런 방회에 가입하려면 보통 뇌물로는 힘들었다. 꾸준한 뇌물과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장사하는 재주만 있는 놈이라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 점소이 놈을 꽤 괜찮은 놈을 구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소문으로 들었는데, 죄를 지은 걸 덮어주는 대신 자기 객잔에서 일하게 했다고...”
“쳐죽일 도둑놈 같으니!”
‘그냥 두고 들어갈까?’
연우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객잔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연 순간 느낀 것은 한적함이었다.
점심이 지났을 때의 한적함이 아닌, 꽤 오랫동안 손님이 없었을 때나 느껴지는 한적함.
‘망했나?’
“어서 오십시오!”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점소이가 튕기듯이 달려왔다. 달려온 점소이는 연우혁과 포쾌들이 앉기도 전에 먹을 걸 추천했다.
“백육(白肉, 삶은 돼지고기 요리)이나 미선(米線, 국수 요리)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오늘 고기가 꽤...”
“식사하러 온 게 아니다. 사 포쾌 안에 있나?”
연우혁의 말에 점소이는 그제야 손님의 신분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겁에 질린 얼굴을 짓더니 뒤로 물러났다.
“포, 포두님은 위에 계십니다. 포두님께서는 아무런 짓도 안 하셨는데 왜...”
“놈! 감히 네놈이 관아의 일에 말을 얹느냐!”
포쾌들이 점소이에게 일갈했다. 점소이는 바들바들 떨며 넙죽 고개를 숙였다.
연우혁은 그런 점소이를 빤히 쳐다보더니 시선을 돌렸다.
“됐다. 행패부리지 마라. 사 포쾌를 만나봐야겠군. 그보다 그 전에, 이 객잔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점소이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있었던 일을 나름대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천객객잔은 숙수의 실력이 그럭저럭이지만 워낙 위치가 좋아 나름 손님들이 꾸준히 들어오는 객잔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객잔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무슨 소문이냐?”
“독... 독이 퍼지는 객잔이라고...”
“독이?”
“안 그러면 사 포두님이 저렇게 쓰러지실 리가 없다고...”
“허. 뭔 이상한 소문이.”
포쾌들은 안 믿겠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면서도 마시려던 백탕을 슬찍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는 문도 활짝 열었다.
“포두님. 여기서 나오는 건 먹거나 마시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됐다.”
이미 주변을 영안으로 보고 독이 없다는 걸 확인한 연우혁은 찻잔을 기울였다.
그 대담한 담력에 포쾌들은 물론이고 점소이까지 깜짝 놀랐다.
독이 퍼졌다고 소문이 난 객잔에 들어가 저렇게 태연히 물을 마실 수 있다니.
‘새로 온 포두가 보통이 아니라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로 그렇구나!’
“그래서 독이 퍼지고 손님들이 끊겼다는 거냐? 실제로 사 포쾌도 독에 걸려서 드러눕고?”
“예... 그렇습니다.”
양 포쾌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숙수의 재료는 확인해봤느냐? 싸구려 재료를 쓰는 숙수의 요리는 독이나 마찬가지다!”
“몇,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포두님께서 직접 확인하셨을 정도입니다.”
“뒤의 우물은? 우물물이 잘못 고이면 독이 된다.”
“의원께서 확인하셨는데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포쾌들은 포두 앞에서 자신들의 예리한 추리가 빗나가자 얼굴이 붉어졌다.
망신을 당한 포쾌들은 좀 더 적극적인 추리를 시작했다.
“요 개자식. 어디서 입만 살아서 나불대는 것이냐! 제대로 불지 못해!”
“네놈이 일을 제대로 못 했겠지! 당장 불어라! 불지 않으면 네놈의 사지를 부러뜨려주마!”
“살려주십쇼!! 살려주십쇼!!!!”
“그만해라.”
연우혁은 점소이를 두들겨 패려는 포쾌들을 손짓 하나로 멈추게 했다.
점소이는 헉헉대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 거친 놈들을 손짓 하나로 말리는 걸 보니 믿기 힘들 정도였다. 사 포두보다 훨씬 더한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사, 사실 수상한 게 하나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이놈! 당장 말해라!”
“그, 객잔에 아직까지 머무는 분이 한 분 계시는데... 그 분이 무림인입니다. 그게 좀 이상해서... 저도...”
점소이의 말에 포쾌들은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무림인이라면 확실히 그럴듯하지 않나?”
“하지만 무림인을 건드리는 건 좀 그런데.”
“여기 인원이면 충분히 잡을 수 있네. 게다가 포두님도 무공의 고수지 않나.”
“헉! 그런 거였나? 하긴 사 포쾌를 일격에 베어서 불구로 만들었으니...”
“...불구로 안 만들었다.”
연우혁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포쾌들은 뜻을 통일했다.
“포두님. 명령만 내려주시면 저 위의 무림인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그, 저기, 하나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만...”
“뭐냐?”
“당문(唐門)의 무인이십니다.”
“......”
“......”
포쾌들은 그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기서 오대세가 중 가장 독하고 악랄한 걸로 이름 높은 사천당문의 악명을 들어보지 못한 포쾌들은 없었다.
한 번 원한을 맺으면 절대 잊지 않고 보복하는 집요한 무림세가!
“당문이라면 독공의 고수인 만큼 이 사태의 원인일 가능성도 높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연우혁의 말에 점소이는 주저하며 대답했다. 그 뒷말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어느 누가 객잔에 독이 퍼졌다고 당문의 무인에게 찾아가 ‘당신의 독이 퍼진 거 아니요?’라고 물을 수 있겠는가.
포쾌들은 기가 잔뜩 죽어서 속삭였다.
“포두님. 돌아가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왜?”
“...그야 상대는 당문의 무인이고...”
“사 포쾌는 어차피 뒤질 것 같은데, 그러고 나서 확인해도 됩니다...”
연우혁은 피식 웃더니 점소이를 불렀다.
“위에 계신 당문의 무인에게 연 포두가 공손히 한 번 뵙고 싶어 한다고 전해드려라.”
“예, 예...!”
점소이는 몇 번이고 고개를 꾸벅이더니 위로 올라갔다. 호랑이 굴이라도 들어가는 것마냥 잔뜩 움츠린 채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 번 본 적 있는 당문의 무인이 걸어 내려왔다. 저번 백면신투의 장보도 때문에 만난 적 있는 당령이었다.
소매 끝으로 드러난 손가락 사이에는 이미 당문 특유의 암기, 수전(手箭)이 그 첨단을 드러내고 있었다. 매우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드러내는 당문 무인의 방식이었다.
“포쾌. 혹시 팽가와 친분이 있다고 해서 무례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당령은 앉자마자 살기를 쏘아내며 말했다.
“그깟 친분을 믿고 말을 꺼낸 거라면 흙 밑에서 후회하게 될 테니까!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깊게 생각하고 내뱉는 게 좋을 거야. 자. 왜 불러냈지?”
“포쾌가 아니라 포두입니다. 당 소저.”
연우혁의 말에 당령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깊어지고 눈매가 살기로 더욱 가늘어졌다.
“그리고 알려드릴 게 있어서 불렀을 뿐입니다.”
“그냥 네가 객잔에 독을 퍼뜨렸냐고 물어보지 그래? 서로 시간을 아낄 수 있을 텐데...”
“독을 퍼뜨린 게 누군지는 이미 압니다. 당 소저. 저 점소이 놈입니다. 당 소저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한 놈을 제가 그냥 처리하기 뭐해서 말씀드리려고 불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