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32)화 (32/107)

객잔의 독 (5)

“제가 죄를 저지른 사람은 백 리 밖에 있어도 알아채지만, 당 소저가 화증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습니다!”

속으로는 욕을 했지만, 겉으로는 깜짝 놀란 척을 하며 연우혁은 말했다.

영안으로 본 당령의 기분은 더욱 더 흡족해졌다.

“너 같은 포두가 사천에 있어야 할 텐데.”

“하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만약 사천에서 포두를 해야 한다면 연우혁은 진지하게 관직을 그만두는 걸 고민해볼지도 몰랐다.

“그런데 무공을 익히고 있었나?”

“예. 저번에 보셨잖습니까?”

당령과 같이 싸운 건 처음이 아니었다. 저번 산채 토벌전에서 같이 싸운 적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합을 맞추지는 않았지만...

“...아! 물, 물론 알고 있었지. 그걸 모를 리가 없잖나.”

‘이 사람, 잊고 있었군.’

하긴 산채 토벌에서 냉수사를 설득한 연우혁의 화술은 기억해도 무공은 기억 못할 수 있었다. 별로 싸울 일이 많지도 않았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같이 싸웠는데 아예 잊고 있었다니...

당령도 머쓱했는지 급히 화제를 바꿨다.

“방금 보여준 권법의 위력이 제법 강맹하던데 무슨 권법이지?”

“위국권법입니다.”

“......”

당령은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해야 적절한 대답일지 알 수가 없어서 머뭇거렸다. ‘대단한 이름의 권법이다’라고 말하면 조롱하는 것 같았고, ‘그딴 권법으로 저런 위력을 내다니 대단하다’라고 말하는 것도 좀...

“저, 포두님.”

언변이 부족한 당문의 무인을 구해준 건 포쾌들이었다. 방금 있었던 싸움에 넋이 나가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포쾌들이 연우혁에게 말했다.

“팔은 괜찮으십니까?”

포쾌들이 머뭇거리면서 하는 말에 연우혁은 긴장이 풀려서 피식 웃었다.

방금 철갈권과의 싸움은 연우혁에게도 상당히 긴박한 싸움이었다.

냉수사한테 채찍을 받고 나서 동급의 무인 정도는 우위에 서서 싸울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싸움에는 정해진 결과가 없다는 것만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영안이나 술법이 없었다면 크게 다쳤으리라.

괜히 상승무공에 ‘상승’이란 이름이 붙는 게 아니었다.

고송이 만든 백사편법은 전진과 공격에만 초점이 맞춰줘 있었지만, 정파의 상승무공이었다면 아까 같은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는 초식이 있었을 것이다.

“포두님?”

“방해하지 마라. 깨달음을 정리하는 게 안 보이나?”

당령은 짜증스럽게 포쾌들을 쳐다보았다.

싸우고 나서 깨달음을 정리하는 게 무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저 돼지 새끼 같은 포쾌들은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연우혁은 새삼스럽게 당령이 명문세가의 무림인이라는 걸 느꼈다. 정작 연우혁 본인은 이게 깨달음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과연. 이게 깨달음인가.’

“죄, 죄송합니다...”

“아니다. 왜 불렀지?”

“빨리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그러지? 독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을 텐데.”

“그, 노인분께서 안에 계실 텐데 그 분도 중독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걱정하지 마라. 당문의 무인과 친분이 깊은 노인 아닌가. 독에 대처하는 방법 정도는 알고 계실 거다. 그러니까 당 소저께서도 과감하게 하독을 하셨겠지.”

“아하!”

모르는 게 없는 연우혁의 말에 포쾌들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그들은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뛰어 들어가야 하나 고민했는데...

“과연 그런 거였습니...”

타타탁-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당령은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연우혁과 포쾌들은 예상 밖의 모습에 당황해서 뒷모습만 쳐다보았다.

*   *   *

다행히 강 노인은 멀쩡했다. 철갈방의 무인들이 중독되는 걸 보자마자 당문이 왔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위로 올라가는 독연(毒煙)의 성질을 파악한 강 노인은 낮은 곳으로 몸을 피하고 물에 적신 천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재빨리 독을 전부 처리한 당령은 강 노인이 무사한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세요??”

“콜록. 괜찮습니다. 아기씨. 이렇게 구해주러 오셔서 감사합니다.”

연우혁도 정정한 강 노인의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만약 강 노인이 다치기라도 했다면 당문의 분노가 어디로 튈지 예상이 불가능했다.

“이 사파 새끼들을 젓갈로 담가버렸어야 했는데...”

“그러실 거 없습니다. 이 늙은이는 나름 괜찮게 지냈습니다.”

강 노인은 당령을 달래며 말했다.

연우혁이 보기에도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질 좋은 철과 무기를 몰래 만들어 밀매하던 철갈방 입장에서 강 노인 같은 대장장이가 앓아눕기라도 하면 피해가 컸을 테니까.

“역시 그걸 보고 오셨군요. 제가 남긴 암호를 보셨습니까?”

“?”

“쓰지 않아(歇) 먼지가 낀 선반 위에 벌레(虫)를 올려놓았으니 갈(蠍)이지요. 이 근처에 갈을 쓰는 흑도 무리는 많지 않으니 말입니다. 철갈방이란 걸 알아보신 줄 알았습니다만...”

“!!”

당령은 강 노인의 말에 포두가 왜 선반을 유심히 쳐다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짧은 사이에 강 노인이 남긴 뜻을 알아차렸단 말인가!

“알아보신 게 아니었습니까?”

강 노인은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그게 아니라면 당령이 이렇게 찾아올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저기 뒤의 포두가 찾았습니다.”

“포두라면 설마 사 포두...?!”

“그 새끼가 아니라... 그, 새로 온 포두요.”

당령은 이 주변에 익숙하지 않아서 설명이 서툴렀지만 강 노인은 금세 이해했다. 매우 놀라워하며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설마 당문의 무인이 아니라 포두께서 찾아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만...”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연우혁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운으로 이 한경에서 사람 하나를 찾을 수는 없지요... 허허. 고맙습니다.”

“포두. 사례는 다음에 하도록 하지. 일단 의원부터 만나보도록 하죠.”

“정말 괜찮습니다만...”

“그건 의원이 할 소리고!”

당령은 다음에 보자고 말한 뒤 강 노인을 끌고 나갔다. 연우혁과 포쾌들은 그제야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정말... 무림인들은 상종하질 못할...”

“쉿. 조용히 하게.”

양 포쾌는 기겁해서 동료의 입을 막았다.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데, 저런 무인을 욕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다들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포두님! 포두님의 지혜가 없었다면 저희는 살아서 자리를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포두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포쾌들은 진심 어린 태도로 감사를 표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니 새삼 이 젊은 포두에 대한 충성심이 샘솟았다.

새로 온 포두가 한경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다거나, 이 주변에 혈연이 없다거나 하는 단점들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런 포두 밑에서라면 정말 충성을 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니 겸연쩍군.”

“아닙니다. 포두님. 포두님께서는 잠시 쉬고 계십시오. 저희가 나머지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한다면 솜씨를 한 번 보도록 하지.”

영안으로 부하들의 감정을 볼 수 있었던 만큼 연우혁은 이들이 진심으로 나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싸우느라 내공도 꽤 소모했겠다, 연우혁은 옆에 걸터앉아 포쾌들이 싸움 현장을 정리하는 걸 구경하려고 했다.

착착착-

포쾌들은 경쾌한 움직임으로 시체들을 한곳에 늘어놓았다.

‘잘하는군.’

섣불리 칼을 휘두르는 무림인치고 시체를 처리할 각오까지 마친 무림인은 드물었다.

하지만 언제나 뒷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있는 법. 포쾌들도 그 중 하나였다.

이렇게 치열하게 싸움이 벌어진 곳의 시체들은 웃돈을 줘도 무섭다고 꺼리는 경우가 많은 만큼, 포쾌들이 나서서 현장을 정리하고 시체를 치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연 사 포두 밑에서 혹독하게 일했던 포쾌들인 만큼 쉬지 않고 시체들을 정리했다.

그러더니 땀을 훔치고 곧바로 철갈방의 가옥 안으로 들어갔다.

“?”

연우혁은 포쾌들이 왜 가옥 안으로 들어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체는 다 밖에 있지, 가옥 안에 있는 시체는 없었다.

‘뭐지?’

얼마나 지났을까. 포쾌들은 기쁘고 뿌듯한 얼굴로 가옥 안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연우혁 앞에 서더니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전낭을 꺼내 바쳤다.

“포두님. 전부 다 찾았습니다!”

“은자 한 조각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받아주십시오!”

“......”

포쾌들의 얼굴은 충만함으로 빛났다. 시체와 가옥을 수색하면서 조금도 빼돌리지 않았다는 점이 그들의 빛나는 충성심을 증명했다.

‘은자를 찾고 있던 거였군...’

연우혁은 포쾌들의 일처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체들을 치우면서 그걸 다 하나씩 몸을 뒤져보고 있었다니.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그, 그래. 고맙군. 다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은자 말고도 돈이 될 법한 물건을 챙겨 갖고 나오겠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에서 눈치껏 훔칠 수 있는 게 포쾌들의 특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연우혁은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   *   *

오충의 조카, 오 포쾌는 자신이 나름 일류 포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포쾌들이 눈치 없이 뇌물을 받다가 쫓겨나고 죄인을 돕다가 쫓겨나고 맡은 일을 실패해서 쫓겨나는 동안에도 흔들림 없이 한경의 포쾌로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류 포쾌에게는 일류 포쾌만의 고충이 있었다. 바로 숙부인 오충이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연 포쾌, 아니 이제는 연 포두군. 연 포두가 사 포두를 대신해서 구역을 맡았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된다. 사 포두 그 놈이 만만한 놈이 아니거든. 포쾌로 강등됐다 하더라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더군다나 거기 포쾌들은 다 사 포두 놈의 부하 아니었느냐.

-맞는 말씀이십니다. 쩝쩝.

-그러니 네가 그쪽으로 가서 연 포두를 도와라.

-예?! 숙부님, 제가 순찰을 하지 않으면 여기 구역은...

-다 알고 하는 소리다. 내가 포쾌 노릇을 안 해봤을 줄 아느냐? 한 명 정도는 괜찮을 테니 가서 연 포두를 도와라. 가서 눈치껏 상황을 보고 내게 전하란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연 포두는 그냥 포두 자리에서 끝날 것 같지 않다.

오랫동안 한경의 포두로 일한 오 포두는 나름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 면에서 연우혁은 아무리 봐도 포두로 계속 머무를 사람이 아니었다.

오 포두의 재주야 포두 노릇이 한계라지만, 아무리 봐도 연우혁은 얼마든지 기회만 찾아오면 그 이상도 될 수 있는 젊은이였다.

꼭 자기 밑에서 공을 세운 부하라서가 아니라 훗날을 생각해서 은혜를 베풀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시끄럽고 빨리 가기나 해라! 네놈의 녹봉을 누가 주는지 알고는 있느냐?

호통을 치는 숙부의 모습에 오 포쾌는 찔끔해서 물러나왔다.

‘하긴 확실히 사가놈 밑의 포쾌들이 험악하긴 하다.’

정든 구역을 바꾸는 게 귀찮아서 그렇지 숙부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는 오 포쾌도 이해했다.

아마 찾아가면 그 포쾌들이 꽤나 경계심을 품을 테니, 적당히 술이라도 사가서 경계심을 풀고 사가놈이 무슨 작당을 꾸미고 있는지 물어봐야...

“저는 대협을 시기해서 목숨을 노렸으나 대협께서는 제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앞으로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오 포쾌는 안가 마당에서 사가놈이 머리를 쿵쿵 땅바닥에 박고 있는 걸 보고 기겁했다.

대체 무슨 작당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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