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공 강 노인 (1)
사 포쾌는 이마에 피가 흥건히 고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극적인 모습에 다른 포쾌 몇몇은 ‘속임수가 아니냐’라고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사 포쾌가 포두였을 시절 뜯긴 원한이 있는 만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연우혁은 사 포쾌가 지금 진심으로 감복하고 있다는 걸 영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무슨 말을 했길래 저러나?”
연우혁의 질문에 막 포쾌는 자신도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 그냥 있었던 일을 놀라지 말라고 설명했을 뿐입니다.”
객잔에서 끙끙 앓아누워 있던 사 포쾌한테 상황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았던 건 바로 막 포쾌였다.
당문의 무인이 동료들을 끌고 나간 사이, 막 포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에 나섰다.
점소이 놈이 당문 무인한테 누명을 씌우려다 죽었고, 당문 무인이 분노해서 너도 죽이려 했는데 새로 온 포두가 막았고...
사 포쾌는 믿기지 않았는지 몇 번이고 다시 물었다. 하긴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였기에 막 포쾌도 인내심을 가지고 몇 번이고 설명해줬다.
“그게 다입니다.”
“그게 다라고?”
“예... 듣고 나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던데...”
엎드려 있던 사 포쾌는 고개를 들고 외쳤다.
“저는 천성이 거칠고 손속이 독해서 무관에서도 저를 오래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저를 이렇게 믿어주신 분은 처음입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그, 그래. 알겠으니 일어나라.”
사 포쾌 입장에서야 험하고 거친 삶을 살다가 몰락했을 때 받은 은혜가 뼈에 사무칠 수 있어도 연우혁 입장에서는 좀 당황스러웠다.
일단 진심으로 충성하겠다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지만...
“사 포쾌는 믿을 수 없는 자입니다.”
“됐다. 부하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나.”
“...!”
막 포쾌는 연우혁의 대답에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부끄러워했다.
믿을 수 없다고 해서 거칠게 대했다면 애초에 다른 포쾌들은 저 객잔에서 살아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포두가 상관이었기에 그들도 목숨을 부지했던 것 아닌가.
“...예! 과거의 은원은 잊고 대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포쾌끼리 친하게 지낸다면야 좋겠지만...”
연우혁은 포쾌들이 일치단결하는 것까지 바라진 않았다. 서로 성격도 다르고 원한관계도 있는데 어떻게 사람이 일치단결하겠는가.
그냥 각자 시킨 일이나 잘 해오면 충분했다.
“어, 저거...”
“연, 연 포두님.”
정문에서 엿듣다가 발각된 오 포쾌는 머뭇거리면서 인사했다. 연우혁은 반가워하며 들어오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오도록. 무슨 일로 왔나?”
“그, 오 포두님께서 말입니다.”
오 포쾌는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며 속삭였다. 아무리 자기 밑에서 일한 포쾌라지만, 포두가 됐는데 눈치 없게 굴었다가는 호되게 당할 수 있었다.
연우혁은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다른 포쾌들이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인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으면 도우라고 절 보내셨...”
“문제? 무슨 문제를 말하는 거지?”
“저 포쾌들 말입니다. 닳고 닳은 놈들이라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모릅니다. 특히 사 포쾌 같은 놈은 더더욱 믿으시면 안 됩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오 포쾌는 매우 진지했다.
포쾌들의 충성심이 보이는 연우혁 입장에서는 별 의미없는 흰소리였지만 상대가 너무 진지하게 말해서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 렇군.”
“오 포두님이 한동안 여기서 일하라고 하셨으니, 수상쩍은 포쾌가 있으면 슬쩍 말해주십시오.”
“그, 그래. 그러도록 하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하인 하나가 달려왔다.
“연 포두님 계십니까? 전갈을 갖고 왔습니다. 강 노인이라고 하시면 아실 거라고...”
“무슨 일이지?”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지금 가지.”
강 노인이 부른다는 말에 연우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인의 뒤를 쫓았다.
포두가 사라지자 오 포쾌는 매서운 눈길로 다른 놈들을 훑어보았다.
다른 마음을 품은 놈이 있다면 분명 여기서 티가 나리라.
“빨리 순찰 돌러 가세.”
“그래야겠군.”
“저번에 들어온 송사(訟事)는 어떻게 할 건가? 관아에 고발한 주제에 철전 하나 바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냥 처리해야지. 포두님의 체면에 누를 끼칠 수는 없지 않은가.”
‘...???’
오 포쾌는 뇌물 없이 일하겠다는 동료들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눈을 끔벅였다.
대체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신통력으로 출가라도 시킨 건가!?’
* * *
강 노인은 대장간 뒤쪽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작은 집에 의원이 세 명이나 붙어서 강 노인의 상태를 진맥 중이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이제 괜찮으니 돌아가셔도 좋소.”
“아닙니다! 좀 더 확인해야 합니다.”
“...?”
한경의 의원들이 이렇게 책임감 있었나 의아해하던 연우혁은 의원들이 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식은땀을 흘리게 했을지는 뻔했다.
“잠깐, 이제 이야기를 해야 하니 좀 나가주시오.”
“예, 예.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울화나 불편함이 있으면 바로 저희를 부르셔야...”
의원들은 강 노인이 진심으로 걱정됐는지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연우혁이 보기에 강 노인은 딱히 편찮은 곳이 없었다.
‘아프면 죽인다고 협박이라도 한 것 같은데.’
“앉으십시오. 대접해드릴 게 마땅치 않아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강 노인은 형형한 눈빛으로 연우혁을 보며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번에 구해주신 게 포두님이라고 말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할 줄 아는 포두는 그리 많지 않지요... 물어보니, 무공을 꽤 진지하게 익힌다고 들었습니다.”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연우혁은 상대가 왜 이런 말을 꺼냈나 싶어 의아해했다. 그런 속마음도 모르고 강 노인은 여상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저도 한 때 무공에 뜻을 둔 적이 있었습니다. 당가에 데릴사위로 들어오기 전만 해도 가전무공을 열심히 수련했었지요.”
“!”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상대가 당문의 무인과 친한 만큼 당문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아예 당문의 본가에서 활동하던 사람이었을 줄이야.
게다가 더 놀라운 건 당문에서 밖으로 나왔다는 점이었다. 어지간한 신뢰나 공헌이 없다면 당문 같은 가문에서 밖으로 내보내는 걸 허락해줄 리 없었다.
“무림인이셨습니까?”
“허허. 아주 예전에나 그랬을 뿐입니다. 무림은... 철없는 젊은이가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
강 노인은 무의식적으로 옷 위를 쓰다듬었다. 연우혁은 영안을 쓰지 않아도 그 밑에 있는 흉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무림인으로서 살아가는 걸 포기하고 기관진식(機關陣式)만 건드리니 마음은 편하더군요.”
“훌륭하십니다. 무림인보다는 야공(冶工)이 더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연우혁의 말에 강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한 권의 책을 꺼냈다.
“철갈방에서 갇혀 있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대로 죽어도 여한은 없지만... 아무래도 물려받은 무공을 누군가에게 전해주지 않으면 편히 눈을 감지는 못할 것 같았습니다. 이 무공은 당문의 무공이 아닌 제 가문의 무공입니다. 부디 포두님께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
예상치 못한 말에 연우혁은 아까보다 더 놀랐다.
한 때 당문의 무인이었던 노인이 물려주고 싶어하는 무공이라면 평범한 수준의 무공은 아닐 것이다.
그런 무공을 처음 만난 연우혁에게 주고 싶어 하다니.
기쁜 걸 떠나서 걱정이 됐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문의 무인들이 지랄을 하지 않을까 염려됐다.
그 걱정을 알아차렸는지 강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무공은 당문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별 문제가 없을 거라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이렇게까지 저를 높게 평가하고 말해주셨는데, 거절한다면 그것 또한 무례라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해 그 진전을 이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연우혁은 깊숙이 예를 표했다.
당문이 암기와 독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대세가 기준에서 특별히 뛰어난 거고 다른 무공들도 수준이 낮지는 않았다.
하북팽가가 도법에만 능하지 않듯이 당문의 다른 검법이나 권법, 장법이나 보법 등 다른 무공들도 무림의 기준으로 치자면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특히 단순하고 쉽기로 소문난 권법을 쓰는 연우혁에게는 어떤 권법이든 일품의 권법이리라.
안 그래도 철갈권과 싸우면서 균형 잡힌 무공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었는데...
‘당문의 무인이던 사람이 높게 평가하는 무공이라면 분명 대단한 상승의 무공...’
-탈혼비도(奪魂飛刀)
“...앗. 비도술입니까?”
연우혁은 예상치 못한 무공에 당황했다.
생각해보니 상대의 가전무공이라고 해서 꼭 암기술이나 독공이 아니란 법은 없었다.
“맞습니다. 허허. 암기술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잘 모릅니다.”
연우혁이 쓰는 암기라고는 기껏해야 저번에 산채 토벌하러 갔다가 주운 암기를 던지는 게 전부였다.
애초에 무림에서 좋은 암기는 그만큼 비싼 탓에 연우혁 같은 포두가 쓸 만한 무기가 아니었다. 사파 고수가 기묘한 암기를 쓸 수 있는 건 그만큼 은자를 모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암기술이 나쁘지 않긴 하다.’
당황했던 연우혁은 금세 침착을 되찾았다.
당령이 싸우는 걸 떠올려보면 암기술은 절대 나쁜 무공이 아니었다. 특히 자기보다 한 수 낮은 무인들을 상대할 때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불균형한 형태로 무공을 익힌 상황에서 더 특이한 무공을 추가하는 느낌이긴 했지만 분명 있으면 도움은 되리라.
“거궐(巨闕)에서 전중(膻中)으로, 전중에서 기사(氣舍)로, 기사에서 협백(俠白)으로...”
강 노인은 천천히 무공의 구결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무공은 동작만으로 설명이 끝났지만 복잡한 무공은 그 안에 담긴 내력의 흐름은 물론이고 전수자의 비유나 깨달음, 쓰면서 느낀 철학과 이치까지도 설명을 해야 제대로 전수가 됐다.
이 탈혼비도는 강 노인의 가전무공에 당문에서 반평생을 일하며 얻은 암기의 깨달음을 섞은 무공.
제대로 무공을 이해하고 입문하기 위해서는 반 년에서 일 년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강 노인은 꾸준히 인내심을 가지고 이 포두를 가르쳐 볼 생각이었다.
“어떻습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어려운 무공이다.’
확실히 어려운 무공이라는 걸 느낀 연우혁은 영안을 열었다. 그리고 무공서를 쫙 훑은 다음 완전히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