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판관요괴저택 (4)
사실 사 포쾌와 연우혁은 좀 입장이 달랐다.
사 포쾌야 원한 쌓은 것도 많고 저지른 짓도 많으니 금의위가 부르면 바로 도망치는 게 옳은 판단이었지만, 연우혁은...
‘난 비리 저지를 시간도 없었다.’
아마 최근 해결한 소문을 듣고 불렀을 가능성이 컸다. 그 정확한 이유야 짐작할 수 없었지만, 연우혁은 이게 안 좋은 이유는 아닐 거라고 직감했다.
“다녀오도록 하지.”
“...예! 포두님을 믿겠습니다!”
* * *
맹 판관은 몸을 바닥에 바싹 붙였다. 거의 엎드리기 직전의 자세였다.
원래라면 한경에서 맹 판관이 이렇게 비굴하게 굴 상대는 없었다. 설령 지부 어르신 앞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눈앞의 상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금의위의 교위였으니까.
“편하게 앉으십시오. 판관 어르신.”
“아, 아닙니다.”
자기보다 낮은 관직임에도 불구하고 판관은 자세를 낮추고 눈치만 봤다. 눈앞의 교위 놈이 보는 서책이 무슨 내용인지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원래 판관은 관아에 고발하는 사건을 맡아 형사를 처리하는 만큼 다른 동급의 관리에 비해 그 권한과 책임이 컸다.
때문에 자신이 처리한 일들을 잘 정리해놨다가 조정에서 순안어사(巡按御史) 같은 감사가 나오면 그 앞에 쪼르르 달려가 자신이 어떤 일을 어떻게 잘 처리했는지를 해명해야 했다.
금의위 앞에서 하는 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의 일이란 건 얼마든지 트집을 잡으려면 잡을 수 있고, 또 판관의 일이란 건 완전히 깨끗하기는 힘든 일 아닌가. 뇌물을 보내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혼자 청백리처럼 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약 지금 금의위 교위 놈이 보는 서책이 자신이 잘못 처리한 사건의 내용이라면...
‘젠장. 젠장! 왜 하필이면 내가. 다른 놈이 맡아도 됐을 텐데!’
맹 판관은 한경의 다른 판관들을 저주했다. 하필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다니.
“이 안 장주가 죽은 사건은 실로 신기합니다. 어떻게 해결하신 겁니까?”
“예?”
질문에 교위의 눈빛이 찌푸려졌다. 판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떻게 해결했냐 물었습니다.”
“그게... 그러니까...”
맹 판관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안 장주는 견사(繭絲) 장사로 크게 번 사람이었는데, 뒤로는 또 염왕채로 돈을 벌어 번만큼이나 원한도 많이 산 사람이었다. 맹 판관도 뇌물을 몇 번 받았었다.
그런 장주가 장원 외곽의 누각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장주의 발걸음을 제외하고서는 어떤 발걸음도 보이지 않았던 사건 아닌가.
맹 판관은 처음 보고를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죽을 거면 다른 곳에 가서 죽지 왜 하필 내가 맡은 건에서 이렇게 골치 아프게 죽는단 말이냐!
분명 포두 놈들이 적당히 일하는 시늉을 한 뒤 아무나 붙잡아올 테니, 눈치껏 적당히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포두 놈들은 진짜로 문제를 해결했다. 새로 들어온 그 젊은 놈이 무슨 신통력을 부렸는지 범인 놈이 칼을 들고 날뛰었다가 잡혔던 것이다.
‘아차.’
여기까지 떠올린 맹 판관은 식은땀을 흘렸다.
원래 판관은 이런 커다란 일을 마무리하면 조정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아뢰는 보고를 작성해서 바쳤다.
그 때 맹 판관은 분명, 자신의 공을 내세우기 위해 포두들의 활약은 한 줄로 퉁치고 나머지는 자화자찬으로 채워 넣었...
-밑의 포두들이 제법 재주가 좋아 증언을 확인해왔습니다. 그 증언을 훑어보니 위화감이 있어 총관을 심문했는데, 버티지 못한 총관이 칼을 들고 날뛰어 자리에서 베었습니다...
‘제, 제기랄.’
교위가 물어보는 것도 당연했다. 꽤나 특이한 사건에서 증언만 듣고 위화감을 느꼈으니 왜 느꼈는지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맹 판관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 범인을 찾은 건 자신이 아니라 포두 놈이었으니까.
“포두... 포두 녀석이 좀 수상하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수상했다? 어째서?”
“그건... 그냥 믿었습니다.”
“...그냥 믿었다 이 말입니까?”
교위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판관은 이를 악물며 변명했다.
“워낙 영특한 놈이고, 또 아랫사람을 믿지 않으면 누가 충성하겠습니까!”
“흠.”
교위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다음 질문을 던졌다.
“이 팔강채 토벌은 어떻게 무림인들을 동원하신 겁니까? 험하고 거친 자들이라 설득하기 힘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 그건...”
이것도 또 맹 판관이 직접 한 일이 아니었다. 맹 판관은 무림인들을 저주하고, 연우혁을 저주하고, 금의위 교위를 저주했다. 과거에 슬쩍 자기 공으로 적어놓은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저주했다.
“무림인들을 불러서...”
판관이 주절댔지만 이미 교위는 듣고 있지 않았다.
교위는 보고에 적힌 ‘포두를 시켜 불렀다’라는 글귀를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판관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흠뻑 젖은 맹 판관이 돌아가고 나서 교위는 하인을 불렀다.
“여기 관아의 연 포두란 사람이 있다는데. 그 자를 불러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 * *
연우혁이 부름을 받고 도착한 곳은 평소라면 절대 방문할 일 없는 한경 한복판의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군관을 무시하는 명문가들도 금의위 교위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자기 저택에 모시고 싶어하니, 이런 곳에 머무르는 것도 당연했다.
대문을 통과한 뒤 복도를 다섯 개 정도 걷고 정원 세 개를 돈 다음 슬슬 하인의 다리가 아파오지 않을까 생각할 무렵 금의위 교위가 머무르는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
연우혁은 눈을 감고 하해불택신공과 탈혼비도를 생각했다. 남는 시간 틈틈이 무공을 익히는 게 작은 즐거움이었다.
“연 포두, 맞나?”
“예. 맞습니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연우혁은 영안을 열었다.
딱딱하고 무기질적인 목소리. 딱히 욕심이나 분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탐관오리는 아니군.’
판관 같은 탐관오리가 아니라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만약 적이라면 무능한 게 차라리 더 다루기 쉬웠으니까.
“안 장주가 죽은 사건은 어떻게 해결했나?”
“...발자국의 깊이가 지나치게 깊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누군가 수작을 부렸구나 생각했습니다.”
“왜 총관을 의심했지?”
“차를 탈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고, 또 거동이 수상했습니다.”
“능력이 비상하군. 지나치게 직감에 의존하긴 하지만, 그 정도면 아주 비상해. 팔강채를 토벌할 때 무림인들을 어떻게 동원했나?”
“...사라진 비급들이 팔강채에 있다는 소문이 퍼졌을 뿐입니다.”
“그 소문을 퍼뜨렸나?”
“아닙니다.”
“퍼뜨렸다 하더라도 부정할 수밖에 없겠지.”
‘아니 이 새끼가.’
연우혁은 속으로 얼굴도 안 보이는 교위를 욕했다.
다른 무림인들 들으면 연우혁 멱살 잡을 소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산채 토벌은 무림인들이 알아서 토벌하자고 기어간 것에 가까웠다.
그걸 무슨 무림인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부린 것처럼 이야기하다니...
“상단전이 열렸다고 들었는데.”
“예.”
“과연 그 재주가 설명이 되는군.”
‘그냥 판관을 털려고 이러는 건가?’
연우혁은 이 교위가 왜 이러나 의아했다. 그나마 떠오르는 목적은 판관을 탈탈 털기 위해서 정도였다.
당연히 판관은 위에 보고할 때 연우혁의 공은 최대한 줄이고 자기 공은 최대한 올렸을 것이다. 연우혁도 당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와서 읽어보니 판관은 아는 게 하나도 없고 변명만 주절주절 해대면 의심이 안 갈 수가 없으리라.
‘그런 거라면 좋겠군.’
맹 판관이 쫓겨나면 연우혁도 여러모로 편해졌다. 위에 있는 탐욕스러운 상관이 사라지는 건 물론이고 지금 엮여 있는 여러 이들도 한숨 돌리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 내가 판관 자리에 도전할 만큼 공을 세우지는 못한 것 같은데...’
“연 포두. 난 지금 사건 하나를 조사하고 있다. 원래 이 주변 판관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는데, 생각만큼 믿음직스럽지 않더군. 차라리 포두 자네처럼 재주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고 싶은데.”
“...!”
연우혁은 극도로 긴장했다.
금의위 교위의 제안은 칼날 위를 걷는 것만큼 위험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금의위의 권세가 강하고 그 힘이 강한 만큼 도움을 주면 어떤 보답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금의위나 동창은 비밀에 집착하는 조직이었다. 만약 연우혁이 일을 기껏 해결했는데 비밀을 지키겠다고 토사구팽을 해버리면...
“과분한 제안이라 제가 해낼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연우혁은 말을 하면서 목소리에 담긴 상대의 감정을 읽어내려고 애썼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상대가 교활한 마음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다른 교위들도 자네처럼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으니. 마음 같아서는 금의위 교위에 추천하고 싶군.”
“!”
연우혁의 눈빛이 반짝였다.
금의위가 조금, 아니 많이 폐쇄적인 조직이긴 했지만 교위로 들어간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여전히 위험천만하긴 해도 교위라면 그냥 토사구팽 당할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문이 없으니 무리겠군. 역사(力士)라면 모를까.”
“...지부 어르신께서 저를 좋게 봐주셔서 포두의 자리를 내주셨는데, 그 마음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금의위의 일개 관졸 노릇을 할 생각은 없었다. 고되기만 하지 포두보다 더 위험하고 출세 힘든 자리였다.
“자네가 판관보다 더 충신이군.”
“아닙니다.”
연우혁은 상대가 별다른 흑심이 없고, 자신의 능력을 꽤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거라면 한 번 해볼 만할지도 몰랐다.
“자네가 망설이는 이유는 알고 있다.”
“?!”
연우혁은 금의위 교위가 무슨 술법이라도 부린 줄 알고 긴장했다.
“아마 판관이 맡긴 일 때문이겠지. 저택에서 요괴가 계속 나타나고 있다고.”
“...아, 예. 그것도 있습니다.”
‘벌써 소문이 들어갔나.’
이미 퍼진 소문을 부정할 순 없었다. 연우혁은 일단 수긍했다.
“자네가 할 필요 없는 일을 하게 된 만큼 나도 도움을 줘야 한경의 백성들에게 부끄럽지 않겠지.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해주겠다.”
“...!”
연우혁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직도 모르겠나? 자네의 재주는 뛰어나지만, 충성심이 눈을 가리고 있군. 명심하게. 뛰어난 관리란 무릇 그 누구도 의심하는 버릇을 들여야 해.”
교위는 그렇게 비장하게 말하고서 범인이 누군지 말했다.
“범인은 판관이다. 그 자의 자작극이지.”
“......”
‘생각보다 멍청한 사람일지도 모르겠군.’
연우혁은 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