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판관요괴저택 (5)
한 박자 늦게, 연우혁은 깜짝 놀란 것처럼 반응했다.
“헉! 그, 그럴 수가...!”
“말했지. 충성심이 눈을 가리고 있다고.”
교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담담하게 설명했다.
“애초에 한경 한복판에 요괴가 그리 쉽게 나타나지 못한다. 조정에서 일하는 학사를 불러서 물어봤는데, 딱히 요괴의 흔적이 없다고 하더군.”
도사나 승려처럼 조정에서 일하는 학사 중에는 술법에 능한 이들이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그런 자를 데리고 와 확인까지 했다는 교위의 말에 연우혁은 전율했다.
‘방심하지 말자. 만만치 않다!’
교위가 헛다리를 짚었다 하더라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연우혁의 능력이 사기적인 것이지 교위가 무능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생각해봐라. 판관의 능력으로 계속 범인을 잡지 못하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개방의 무인들이 뛰어나서 그렇지...’
연우혁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판관 입장에서는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아무리 대비를 해도 정보가 새서 매번 농락당했으니.
“가장 가능성 높은 답은 하나밖에 없다. 판관의 자작극이지. 자. 그러면 판관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겠나?”
“...잘 모르겠습니다.”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간을 보며 대답했다. 교위는 이건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설명해줬다.
“판관은 한경뿐만 아니라 조정의 고관들에게도 뇌물을 바치고 있다. 그 액수가 상당하더군. 자. 자네가 뛰어난 포두라면 예상해보도록. 판관이 다음에는 어떤 자작극을 펼칠 것 같나?”
연우혁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지금 교위가 말한 게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위해 궁리에 들어갔다.
‘설마?’
“...혹시 은자를 도둑맞았다고...?”
“잘 맞췄다! 그것밖에 없지. 요괴의 소행을 핑계로 상납을 미루려는 거다. 비루한 수작질이지. 분명 곧 요괴에게 은자를 도둑맞았다고 소문을 낼 거다.”
“정, 정말 놀랐습니다. 상상치도 못했습니다.”
“많은 배움이 되었겠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만약 정말 강력한 요괴가 벌인 짓이면 어떡합니까?”
연우혁은 너무 수긍하는 척만 하면 의심을 받을까봐 일부러 멍청한 질문을 던졌다.
교위는 화를 내는 대신 흔쾌히 설명해줬다.
“그렇다 하더라도 판관의 죄다.”
“예?”
“백성의 형사와 민사를 다루는 자가 얼마나 탐학스러우면 요괴가 나타났겠나? 또 얼마나 무능하면 그 나타난 요괴 하나를 처리하지 못해 쩔쩔맸겠나? 둘 중 무엇이든 판관의 죄다.”
‘세상 천지에 미친 새끼밖에 없구나!’
연우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죄가 있으면 죄가 있어서 유죄고 죄가 없으면 그걸 밝히지 못해서 유죄라니. 하북팽가의 남매가 차라리 그리워질 정도였다.
* * *
당등은 팔짱을 끼고 앉아 분타주와 골똘히 대책에 몰두했다.
아직 상황은 괜찮다지만 낌새가 영 수상했던 것이다.
영리한 포두 녀석은 금의위 교위한테 불려가고, 판관 놈은 또 갑자기 안 보이고...
“은자를 파낼 때는 토룡공을 썼겠지?”
“그렇습니다. 땅을 판 다음에는 흙을 그대로 채워 넣어서 알아차리기 힘들 겁니다.”
“글쎄. 강호에 절대란 건 없다. 땅을 파고 들어갔어도 알아차리는 놈은 나오기 마련이지. 거기에 가짜 흔적을 몇 개 만들어놓자고. 숨겨놓은 은자는?”
“아직 꺼내지 않았습니다만...”
“차라리 빼서 친족들에게 나눠줘라. 야밤에 멀리 도망가게 하면 잡기도 힘들겠지.”
“함정을 파고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확인하겠다. 내 이목을 속이고 매복하기는 힘들 거다.”
“...대협!”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눈깔을 뽑아버리기 전에.”
당등은 분타주가 감동하자 질색했다. 협객행에서 가장 싫은 순간이 이런 눈빛을 받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그 포두 녀석이 걱정인데...”
“...놀, 놀랐습니다.”
“왜 놀랐지? 내가 걱정했다는 게 그리 이상한가?”
분타주는 아차 싶었다. 당등의 괴팍한 성격을 잘못 건드린 것이다.
그러나 당등은 더 성질을 내는 대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재주가 워낙 대단한 놈이라 그냥 버려두기 아까울 뿐이다. 길가에 원석이 굴러다니면 어느 누구든 줍지 않겠나. 음... 좀 더 알아봐라. 녀석이 갇혔다면 그냥 힘으로 데리고 나와야겠다.”
“그, 그건...!”
분타주는 당황했다.
무림인이 힘으로 갇힌 관리를 빼돌리면 그 순간 그 관리의 앞길은 꼬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구해줘도 욕을 먹는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당등은 심드렁했다.
“갇힌 순간 목숨이 위험한 거다. 어느 누가 포두 놈 목숨을 신경써주겠나. 차라리 구해서 사천에 던져놓는 게 낫지. 얼굴 좀 바꾸고 새 호패 던져주면 아무도 모를 거다.”
“하지만 낭중지추라고...”
“그것도 그렇군. 좀 조용히 살라고 하면 되겠지.”
“분, 분타주 님!”
거지 한 명이 황급히 달려와서 문을 열었다. 당등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맹, 맹 판관 놈이...! 곤장을 맞았다고 합니다!”
“뭐? 왜? 무슨 이유로?”
“요괴가 나타났다고 거짓으로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소요시킨 죄로...!”
“...???”
당등과 분타주는 거지를 앉혀놓고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듣고 보니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었다.
금의위 교위가 지부 어른한테 ‘판관이 지금 자기 돈을 아끼려고 한경에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고해바치자 지부 어른이 분노해서 판관을 부른 뒤 곤장을 친 것이다.
정식으로 위에 보고하고 처벌을 가한 것은 아니라 파직되진 않았지만, 맹 판관은 한동안 판관 일을 관두고 근신하게 되었다.
그 거만하던 놈이 한경의 다른 관료들 앞에서 피가 나도록 장을 맞았으니 보통 망신이 아니었으리라.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난 알 것 같다.”
어리둥절해하는 분타주를 보며 당등은 알겠다는 듯이 탁자 위를 쳤다.
“그 포두 놈이 귀신 같은 계략을 부렸구나!”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대협?”
“멀쩡하던 금의위 놈이 왜 판관을 의심했겠나? 그 포두 놈이 혓바닥으로 구워삶은 게 분명하다. 이런 귀신도 부릴 놈 같으니!”
당등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모사(謀士)나 책사들이 차도살인의 계책이라고 말은 많이 해도, 이 포두가 보여준 차도살인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 같은 수준이었다.
어떻게 금의위 교위를 휘둘러서 돈 뺏긴 놈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웠단 말인가?
실로 소름이 돋는 재주였다.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걸 뒤집어 씌우는 게 가능한 일인지...”
“나야 모르지. 애초에 네놈이 도둑질한 걸 찾아낸 것도 그 포두 놈 아니었나? 훔친 걸 잡아냈으니 훔친 걸 뒤집어씌우는 것도 가능했을 거다. 여봐라! 관아에 슬쩍 가서 포두 놈이 뭘 하고 있는지 찾아봐라. 만약 갇혀 있지 않다면 내 추측이 맞는 거다.”
고개를 끄덕이고 허겁지겁 달려간 거지는 반 시진 쯤 지나서야 돌아왔다.
“연, 연 포두가 금의위 교위와 같이 한경을 떠났다고 합니다.”
“역시! 놈을 구워삶은 게 맞다.”
“...!!”
분타주는 눈을 끔뻑이며 전율했다.
재주가 뛰어난 포두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의를 위해 자기 목숨을 거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만약 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졌다면 판관에게 목이 날아가는 건 저 젊은 포두였으리라.
‘협객이다!’
분타주는 젊은 포두가 떠난 방향으로 길게 읍했다. 당등은 무슨 헛짓이냐고 타박하려다가 관두고 고개를 저었다.
* * *
“기남(沂南)에 대해서 아나?”
“한경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번영한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교위를 따라가며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금의위 교위는 거창한 행렬과 호위를 데리고 가는 대신 연우혁과 함께 평복으로 위장했다.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는지 감쪽같았다.
“그렇다. 서쪽에 은 광산이 하나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현령이 사고가 거듭 일어난다고 장계를 올리더군.”
이 당시 광산에 들어가서 광물을 캐내는 건 거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맨몸으로 곡괭이 하나 들고 기어들어가 땅바닥과 천장이 무너지지 않게 감각만으로 캐내야 했으니, 사고가 빈번한 것도 당연했다.
“광산의 일이란 게 워낙 험하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알아보러 간 역사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교위는 진지하게 말했다.
보낸 첩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광산이 별 이상 없이 인부들이 들어갔다 나온다고 보고했지만, 그 안까지 들어간 역사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이 보고를 받은 금의위는 현령이 무언가 숨기고서 면피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 중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음. 저는...”
연우혁이 대답하려던 찰나 멀리서 다른 사람 한 명이 걸어왔다. 교위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일세!”
“누구십니까?”
“이 학사라고 부르도록. 우리 일을 도와줄 거다.”
연우혁은 영안으로 상대의 정체를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다른 무림인들에게는 보기 힘든 영기(靈氣)가 학사 주변에서는 일렁거렸던 것이다.
술법을 다루는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유의 기운이었다.
‘판관의 저택을 확인한 학사가 이 사람이었군.’
“늦었군.”
“미안하네. 여기는 연 포두일세. 이번 일을 도와줄 사람이지.”
“흐음. 이 자가 바로 그...”
학사는 연우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백악신(白嶽神)이 깃든 청동 거울을 꺼내 비췄다. 조정에서 제사를 지내는 산신의 힘을 빌려 상대의 심성을 파악하는 술법이었다.
그러나 청동 거울은 심성을 파악하는 대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조용해졌다. 백악신이 나오는 걸 거부한 것이다. 학사는 그 이유를 알고 깜짝 놀랐다.
“영기(靈氣)를 얼마나 쌓은 건가, 자네?!”
“어렸을 때부터 상단전이 열려서...”
연우혁은 길게 변명하는 대신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학사는 더더욱 놀랐다.
“상단전이 열려도 그렇지, 이 정도라면 피를 토하고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그 정도로 심한가?”
“원래 도사들 중에 뛰어난 자들은 단명하잖나. 다들 상단전이 조금씩 열려 있는 자들이라 그런 걸세. 그런데 이 포두는 아주 활짝 열렸어. 덕분에 영기가 신선마냥 쌓였군.”
사람이 신선마냥 영기를 쌓고 있다는 건 좋은 뜻이 아니었다. 교위와 학사는 연우혁을 곧 죽을 사람 보듯이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연우혁은 아직 멀쩡하긴 했지만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더욱 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어딜 가던 불쌍해보여서 나쁠 게 없었다.
“재주가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은 몰랐군... 광산의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저번에 말한 이후로는 딱히 보고가 없었네. 여기 포두한테는 방금 말해줬고. 혹시 짐작가는 구석이 있나?”
“제 생각에는 흑도 무리가 현령을 협박해서 광산의 은을 밀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