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광산 실종 사건 (3)
‘내가 잘못 본 건가?’
연우혁은 방금 있었던 일이 환상이었나 싶었다.
그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혈옥갑이 파고든 손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마냥 멀쩡했다.
그러나 영안을 열어서 보자 방금 있었던 일이 환상이 아니었다는 게 분명하게 드러났다.
혈옥갑(血玉鉀), 혈교의 신병이기, 영기를 흡수해서 깨어났고, 장갑을 낀 손은 단단하고 날카로워져 혈옥수(血玉手)라는 수공으로 오해를 받고...
“!!”
연우혁은 상단전의 영기를 확인해보았다. 꽤 많은 영기를 흡수한 줄 알았는데 별 차이 없이 여전히 넉넉했다.
‘생각보다 영기를 덜 흡수한 건가?’
영기를 확인한 연우혁은 어떻게든 혈옥갑을 해제해보려고 애썼다. 힘을 받아 깨어난 신병이기인 만큼 주인의 뜻에 따라 해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짓을 해도 장갑은 해제되지 않았다. 강한 의념을 보내 봐도 마찬가지였다.
연우혁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손에 내공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손이 피처럼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
깜짝 놀란 연우혁은 손을 휘둘렀다. 실수로 부딪친 바위가 쇳소리와 함께 깎여나갔다. 실로 놀라운 강도와 예리함이었다.
급히 내공을 거두자 손이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놀라운 보물이었다. 놀라운 보물이었는데...
‘젠장. 보물을 원하긴 했지만 이런 찜찜한 보물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무림에서 신병이기 같은 보물들은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가지는 것만으로도 무인이 자기보다 한 경지는 높은 무인을 상대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겉에서 봤을 때 누가 봐도 사악한 느낌이 드는 보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지금 이 혈옥갑 같은 보물이 바로 그랬다.
쓰는 순간 손이 요사스러운 핏빛색으로 달아오르는데, 누가 봐도 수상하지 않겠는가. 어지간한 명성이나 뒷배가 없는 무림인이 이런 걸 썼다가는 바로 마두 취급 받았다.
사천당문이라면 ‘독을 연구하다가 손이 붉게 되었다 불만 있나’가 가능하겠지만 연우혁 같은 일개 포두라면...
‘장갑부터 껴야겠군.’
연우혁은 대충 낡은 천 장갑을 껴서 손을 가렸다. 어차피 권법이나 수공을 잘 쓰진 않았지만 혹시라도 쓰게 될 때를 대비해서였다.
“다 확인했다. 이만 나가도록 하지.”
“예.”
벌컥!
그 순간 반대쪽 문이 열리더니 옥면살검 동자홍이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
“......”
순간 서로 당황해서 정적이 흘렀다.
잘생기고 반드르르한 얼굴을 한 옥면살검의 눈꼬리가 양옆으로 죽 찢어지더니 살기가 폭발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것이다.
“침입자다!!! 침입자다, 이 구더기 새끼들아!!! 빨리 뛰어오지 않으면 전부 죽여 버리겠다!”
“운이 없군.”
하 교위는 쯧하고 혀를 차더니 검을 뽑았다. 그 담담한 태도에서는 상대에게 겁을 먹은 기세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연 포두. 무공을 익혔다고 들었는데, 다른 무인들을 상대할 수 있겠나?”
“예. 맡겨주십시오.”
연우혁은 자신 있게 말했다.
옥면살검만 하 교위가 상대해준다면 나머지는 연우혁이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들어와라, 들어와! 둘러싸서 도망치지 못하게 해!”
사납게 외치는 옥면살검의 목소리가 동굴 안을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동시에 사방에서 우르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급히 들어온 낭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주변을 가로막고 있었다.
다급하게 들어오느라 서로 어깨를 부딪치는 낭인들과 달리 연우혁은 느긋했다.
“교위님. 이쪽이 유리할 것 같습니다.”
“음.”
이미 영안으로 이 은신처 안의 복잡한 구조를 꿰뚫고 있었던 만큼 어디에서 다수를 상대하기 유리한지 파악한 상태였던 것이다.
앞쪽은 교위한테 맡기고 뒤쪽의 좁은 길을 잡고 버티고 서자 낭인들은 주춤했다. 넓은 곳이어야 일제히 달려들기 좋은데 통로가 좁았다.
“쳐라! 놈을 죽이는 자에게는 은원보(銀元寶)를 하사하겠다!”
옥면살검의 외침에 주춤하던 낭인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연우혁은 한 손에 포쾌의 묵곤을 들고 기다리다가 거리가 가까워지자 재빨리 묵곤을 내려놓고 백사격각편을 뽑아들었다.
상대가 설마 편법을 익힌 무림인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가장 앞의 낭인은 기습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빠르게 날아드는 흰 채찍이 낭인을 강타했다.
“컥!”
충격도 충격이지만 낭인은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역기(逆氣)에 경악했다.
“독... 독이다. 커헉.”
“!!”
“저... 저 놈, 낭인 놈이다! 속지 마라. 포쾌가 아니라 낭인 놈이다!”
낭인들은 연우혁의 정체를 깨닫고 술렁였다. 포쾌의 몽둥이를 들고 있어서 포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포쾌인 척 하는 사파의 무인이 분명했다.
분명 조정의 첩자에게 돈을 받고 호위로 따라온 것이리라.
“......”
연우혁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싸움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곤법을 익힌 척 하긴 했지만, 채찍 한 번 휘둘렀다고 사파 낭인 취급이라니.
“내가 앞에 서겠다!”
초자곤(哨子棍, 도리깨와 유사한 무기)을 든 낭인 하나가 앞에 뛰어들었다. 무기의 특성상 채찍을 상대하기 유리했다.
서로 무기가 얽히는 순간 다른 낭인들이 달려든다면...
푹!
연우혁은 망설이지 않고 강 노인에게 받은 암기, 구궁수전(九宮袖箭)을 발사했다.
영안으로 낭인들의 움직임은 이미 꿰고 있었다. 초자곤을 든 낭인이 외치는 순간 이미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한 뒤였다.
그러나 낭인들 입장에서는 연우혁이 대단한 암기의 고수처럼 느껴졌다.
암기술이란 것은 원래 그 위력도 위력이지만 상대의 움직임을 꿰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위력이 반감되기 마련이었다.
처음 보는 낭인들의 전력을 이렇게 쉽게 파악하다니. 게다가 처음 들어온 낯선 장소에서?
“보통 마두가 아니다. 조심해라!”
“어느 문파 출신이냐, 놈!”
“......”
연우혁은 대답하지 않고 한 손에는 채찍, 다른 손에는 암기를 겨눴다.
어차피 시간은 연우혁 쪽에 유리했다. 왜냐하면...
쿵!
현령의 가족들을 빼돌리는 걸 확인하고 뒤늦게 돌아온 이 학사가 외쳤다.
“위소(衛所)에 연락을 보냈네! 곧 병사들이 올 거야!”
“!”
그 말을 들은 낭인들의 낯빛이 변했다. 연우혁은 이 학사와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하셨습니다.’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빈틈!”
연우혁은 당황하느라 빈틈을 드러낸 낭인 앞에 접근한 뒤 바로 암기를 쏘아버렸다. 낭인은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이 개하고 흘레붙을 놈이!”
분노해서 덤벼들려던 다른 낭인이 채찍에 맞아 쓰러졌다. 남은 낭인들은 그 지독함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관에서 나온 첩자 놈들이 정말 비싼 마두를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 * *
옥면살검과 하 교위는 빠르게 수십 합을 나누었다.
옥면살검의 기세가 악랄하고 패도적이었다면 하 교위의 기세는 단단하고 안정적이었다. 옥면살검은 상대가 누군지 떠올리기 위해 인상을 찌푸렸다.
“...금의위!! 금의위 놈이었구나!!”
불가(佛家) 무공하고도, 도가(道家) 무공하고도 다른 유가(儒家) 냄새가 나는 무공을 사용하는 무림인들은 강호에 드물었다. 그 몇 안 되는 이들이 바로 금의위였다.
하필이면 금의위가 관심을 갖고 있었다니. 이 불운에 옥면살검은 이를 악물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놈을 죽여 버리기만 하면...’
하 교위는 진충보국(盡忠報國) 초식을 펼쳤다. 연우혁이 익힌 권법의 초식과 같은 이름이었지만 그 위력과 심오함은 천지차이였다.
다급하게 덤벼들었다가 한 대 얻어맞은 옥면살검은 울컥 올라오는 핏물을 삼켜야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가장 뒤늦게 달려온 귀 총관은 난장판이 벌어진 은신처 상황에 경악했다.
낭인들은 절반 넘게 쓰러져있고 옥면살검은 웬 무림인과 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총관, 어떻게 된 일이냐! 네놈이 자신한 입구로 침입자가 들어왔단 말이다!”
옥면살검은 검을 섞으면서 외쳤다. 총관은 믿을 수가 없어서 부정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렇게 쉽게 해제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 교위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우릴 도와준 놈이 없었다면.”
“뭐...? 감히!”
옥면살검은 배신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살기를 폭발시켰다. 총관은 다급하게 외쳤다.
“넘어가지 마십시오. 이간계일지도 모릅니다!”
“닥쳐라! 빨리 이 상황을 해결해라!”
“알, 알겠습니다.”
총관은 다급히 술법을 준비했다. 종을 흔들자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핏빛 기운이 끓어올랐다.
“혈귀(血鬼)여, 나와서 부복해라!”
“강시!”
이 학사는 놀라서 외쳤다. 상대 술사가 제법 귀한 보물을 갖고 있었는지 혈강시를 불러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걱정하지 말게! 내가 왜 왔겠나?”
이 학사는 보따리를 풀더니 검을 꺼내서 허공에 던졌다. 동시에 단전의 내공을 심법에 따라 발산했다.
그러자 검이 빠르게 날아가더니 활활 타오르며 혈강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귀 총관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혈귀여, 검을 짓밟고 놈을 부숴버려라!”
“삿된 것을 베어버려라!”
두 사람은 치열하게 대결했다. 혈강시는 날아다니는 검을 부러뜨리고 앞으로 돌진하고 싶어했고, 검은 혈강시를 꿰뚫어서 벽에 박아버리고 싶어했다.
연우혁은 남은 낭인을 마지막으로 쓰러뜨린 다음 거세게 숨을 내쉬며 영안을 열었다.
“기해혈!! 기해혈 찌르십시오!!”
“고맙네!”
이 학사는 쾌재를 부르며 검으로 혈강시의 급소를 찔러버렸다. 귀 총관의 눈이 그 황망한 광경에 부릅떠졌다.
저 혈귀가 어떻게 만든 놈인데 저렇게 쉽게 쓰러진단 말인가?
“저... 저...?”
“이 금의위 잡놈이...!”
옥면살검은 옆의 상황도 모르고 투덜댔다.
금의위 놈들은 고리타분한 검법이나 익히는 온순한 개새끼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제법 강했다.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걸 핑계 삼아서 총관 놈에게 요구를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놈이 제법이다! 차라리 지금 보물을 내놓...”
옥면살검은 옆을 힐끗 보았다. 원래 혈옥갑을 숨겨놓은 비고가 열려서 텅 비어있었다.
“...?!!!!”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 옥면살검의 눈이 충격으로 뒤흔들렸다.
‘뭐지?’
교위는 상대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어 자세를 곧게 잡고 방어에 들어갔다.
옥면살검은 하 교위의 예상보다 반 수는 위였다. 원래 사파 무인들은 뒷심이 약해 쉽게 무너지는데 이 자는 그리 맹공을 펼치면서도 호흡이 그리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저 모습도 함정일 수 있었다.
“어... 어떤 새끼가 감...?”
푹!
그 순간 옥면살검의 가슴팍에 유성처럼 비도가 날아들어서 박혔다. 연우혁은 자신이 던지고서도 탈혼비도가 먹혀들어갔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이게 통하다니!’
영안으로 확인하긴 했지만, 저 정도나 되는 상대가 이렇게 크게 방심할 줄은 몰랐다.
대체 어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