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표국의 사람들 (1)
어이가 없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금의위 교위와 나름 친해졌다지만 대놓고 앞에서 ‘뭐 이딴 걸 주십니까’할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연우혁은 매우 감사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무공서를 읽었다.
사실 읽기보다는 영안으로 한 번에 쭉 흡수했다. 그게 더 효율적이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아니?!’
연우혁이 익힌, 포쾌들에게 나눠주는 위국권법은 초식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고 매우 단순했다. 삼절객의 말에 따르면 옛 무공인 금강선공에서 그나마 어려운 부분을 전부 제거해서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 교위가 내민 무공서의 위국권법은 총 열여덟 초식으로 포쾌들의 권법보다 훨씬 초식이 많았다. 게다가 그 초식 하나하나에 매우 심오하고 깊은 이치가 담겨 있었다. 불문무공의 느낌도 나면서 동시에 유문(儒門)의 향취도 느껴졌다.
머릿속으로 초식을 한 번 그려보니 어느 상황에서도 대응이 가능했다.
‘이게 상승무공이구나!’
이제까지 저잣거리에 돌아다니는 무공이나 웬 사파 마두가 만든 무공만 익혔던 연우혁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초식 이름은 똑같았지만...
“이런 걸 제가 읽어도 되는 겁니까?”
“금의위는 무림의 문파와 달리 무공에 그렇게 폐쇄적이지 않다.”
하 교위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금의위는 그 조직의 특성상 무림의 문파와 다른 규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중 하나가 무공에 대한 개방성이었다.
당장 금의위에서 익힐 무공을 연구할 때에는 국자감이나 도찰원, 한림원에서도 참여했다. 폐쇄적인 무림의 문파와는 천지차이였다.
“원래 금의위에 소속된 역사들이 공을 세우면 포상으로 무공의 초식을 받는 경우가 있었다. 나 또한 이번 경우를 그렇게 해석했다.”
“이렇게 무공서를 통째로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까?”
연우혁은 별 생각 없이 물었지만 하 교위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빨리 외우도록. 규율상 내가 가르쳐 줄 수는 없다.”
‘그런 경우는 없었군.’
솔직히 감동했다.
이번에 연우혁이 공을 크게 세우긴 했다지만, 이걸 이렇게 보상해주려고 하다니.
당장 한경에만 봐도 부하의 공을 무시하고 자기만 아는 놈들이 얼마나 많던가.
‘수틀리면 사람 죽인다고 욕해서 죄송합니다. 교위님.’
“이 권법을 가르쳐주는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경청하겠습니다.”
“하나는 네가 진정 백성을 아끼는 청백리기 때문이다.”
“...그, 그렇군요.”
연우혁은 뭔 개소린가 싶었지만 얌전히 경청했다.
“두 번째는 네 무공이 아직 일류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산에서 보니 초식의 이해는 뛰어나지만 내공이 부족하더군. 초식 사이에 끊김이 있다.”
“예. 느끼고 있습니다.”
이류의 무인과 일류의 무인을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초식을 연달아 펼쳤을 때 드러났다. 이류의 무인은 초식 하나의 힘은 온전히 구현해내더라도 초식을 연결해서 투로를 펼치면 허점이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자신이 익힌 무공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그걸 펼칠 수 있는 정순한 내공과 외공이 있어야 온전한 투로를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연우혁 같은 경우에는 깨달음은 완연했지만 역시 내공이 부족했다.
“이 권법은 그런 깨달음을 수련하기에 좋은 권법이다.”
‘음. 이 권법의 깨달음은 필요 없는데.’
다른 게 더 문제인 연우혁은 슬쩍 물었다.
“내공은 어떻게 수련해야 합니까?”
“영약을 사야 한다.”
“......”
너무나도 현실적인 대답에 연우혁은 할 말을 잃었지만, 하 교위는 매우 진지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무인들이 왜 강하겠는가?
영약을 복용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었다.
금의위의 무인들이 왜 강하겠는가?
마찬가지로 영약을 복용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었다.
‘하. 진짜 탐관오리 되어야 하나?’
“마지막으로.”
“예.”
“네가 익힌 무공들은 아무래도 마두로 오해받기 쉽다. 권법이라도 정종무공을 익혀놓는 게 좋을 것 같다.”
“......”
* * *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연우혁은 하 교위, 이 학사와 작별하고 먼저 출발했다. 둘은 장계부터 시작해서 처리해야 할 뒷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권법 하나로 감당이 되나?’
장갑을 낀 손을 내려다보니 과연 권법을 자주 쓸지도 의문이었다. 육박전 벌이다가 장갑이라도 벗겨지면 정말 포두 다음 관직이 마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싸우면서 느낀 거지만...
‘기문병기가 확실히 편하다.’
왜 경지 낮은 무림인들이 특이한 무기를 들고 다니는지 알 것 같았다. 상대해 본 경험이 적다보니 어, 어 하다가 그대로 당하는 것이다.
특히 연우혁처럼 영안이 있는 경우에는 이런 기문병기를 사용하기에 더 유리했다. 기문병기의 약점이 상황이나 상성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인 건데, 연우혁은 그걸 먼저 주도할 수 있었다.
권법을 수련하더라도 앞으로 한동안은 이 채찍과 암기를 더 이용할 것 같았다.
“어, 포두님. 가십니까??”
“가는데?”
“어, 그게... 그러니까...”
“???”
관아에 있던 하인은 허둥댔다. 연우혁은 이 하인이 왜 이러나 싶었다.
“난 다른 곳의 포두다. 오래 머무르면 위에서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그, 알, 알겠습니다. 으, 어르신께서는 뭐하시는 건지...”
‘뭐지?’
하인이 왜 이러나 싶은 연우혁은 말의 속도를 올렸다.
마을 입구를 벗어나는데 마침 들어오던 관아의 몸종이 연우혁을 보고 놀라워했다.
“포두님. 돌아가십니까??”
“...가는데?”
“어, 그게... 그러니까...”
“??”
‘뭐지?’
뭔가 이상하다 싶은 연우혁은 속도를 더 올렸다. 괜히 이상한 일과 엮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뒤쫓아 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과민했나?’
하긴 아까 봤을 때 둘의 얼굴은 적대심이라기보다는 당황에 가까웠다.
함정을 준비했어도 당황했을 수는 있었겠지만...
* * *
‘이틀이면 도착하겠군.’
교위가 말을 하나 준 덕분에 제법 빠르게 길을 달릴 수 있었다. 달려가던 연우혁은 저 멀리 보이는 폐가를 발견하고 눈빛을 빛냈다.
저런 폐가라 하더라도 여행객에게는 감지덕지였다. 굳이 땅바닥에서 이슬을 맞아가며 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폐가에는 먼저 선객들이 있었다.
“!”
“...!”
선객은 표국의 표사들이었다. 수레 근처에 꽂힌 깃발에는 ‘정강표국’이라고 쓰여 있었다.
연우혁도, 표사들도 멈칫했다. 이런 외진 곳에서 만나는 행객은 기본적으로 서로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연우혁이 관복을 입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표사들은 심하게 경계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표국은 곳곳의 관과 협력해야하는 만큼 관복을 입은 사람에게 무례하게 대하지는 않는 것이다.
“어디서 오셨소?”
“한경의 연 포두입니다. 잠시 일이 있어서 기남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중입니다. 그쪽은?”
“우린 정강표국에서 왔소. 나는 추 표두요. 한경이라면 가는 길이 같게 됐군.”
상대가 정식 관직이 아닌 일개 포두라는 걸 듣자 표사들의 태도는 조금 더 느슨해졌다. 아무래도 포두 앞에서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여기서 머무를 거요?”
“괜찮으시다면.”
추 표두는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연우혁을 훑어보았다.
관상이 사악하거나 비열해보이지는 않았다. 도적놈들이 위장해서 접근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혹시 요패를... 볼 수 있겠소?”
“물론.”
연우혁은 요패를 던졌다. 추 표두는 포두의 요패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게 됐소. 요즘 도적놈들이 기승을 부려서 말이오.”
“표사로서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선선하게 받아들이는 연우혁의 모습에 추 표두는 솔직히 놀랐다.
포두치고는 꽤 젊었는데, 한경의 포두라고 성질을 내거나 은근히 뇌물을 요구하지 않다니. 포두에게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그럼 편히 쉬시오. 이봐, 포두께 물을 좀 갖다 드려라.”
“감사합니다.”
연우혁은 표주박에 담긴 시원한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걸 본 추 표두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직 경험은 적나보군.’
경험 많은 포두였다면 아무리 아는 표국이라 하더라도 저런 물을 냉큼 받진 않았을 것이다.
‘별 거 없군.’
영안으로 물을 확인한 연우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표사들이 함정을 판 녹림 무인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하룻밤 쉬기는 편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냥 한경으로 가면 되겠습니까! 확실하게 범인을 찾아야 한다니까요!”
“그러다가 도적떼라도 만나면 손해가 더 큽니다!”
건량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하해불택신공을 속으로 되뇌던 연우혁은 표사들의 대화가 점점 커지고 격렬해지자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배려심이 없군.’
연우혁은 다시 눈을 감고 새로 배운 위국권법에 깊이 몰두했다.
하 표위의 걱정과 달리 연우혁은 보자마자 권법의 초식들을 모두 이해한 상태였다. 남은 건 머릿속으로 다른 무공들과 어떻게 섞어서 쓸지 고민하는 정도뿐.
‘교위의 무공은 확실히 뛰어났다. 좁은 공간에서도 검봉을 피해 상대를 오히려 밀어붙이던... 음. 역시 내공이다. 연달아 권격을 펼치면서 보법까지 밟다니. 보법... 보법도 지금 너무 사파스럽나? 지독한 느낌이긴 한데.’
“표두님.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말 조심해라, 놈! 네놈이 내 말을 무시하는 거냐?”
“저는 그저 돌아갔을 때 책임을 묻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
연우혁은 하 교위와 옥면살검의 싸움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헛기침을 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오. 목소리가 너무 컸군.”
포두가 다가오자 그제야 표사들은 자기들이 너무 열띠게 떠들었음을 깨닫고 멋쩍어했다.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그렇지 외부의 인물 앞에서 내부의 사정을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다니.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떠드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제가 맞춰보겠습니다. 혹시 표물이 사라졌습니까?”
“...맞소. 목소리가 정말 컸나보군.”
추 표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나 시끄럽게 떠들었는지 자던 포두가 다 들은 모양이었다.
표물을 옮기는 게 표국의 일인 만큼 표물이 사라지는 건 표국의 신용과도 관련된 큰일이었다. 설령 그게 표물 중 단 하나만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출발했을 때 수레에 실은 궤짝의 숫자를 확인했었는데...
어느 순간 하나가 사라져있었던 것이다.
관련된 자들을 모두 불러 확인했는데도 언제 어떻게 사라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유라도 알았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그것도 모르니 표두 입장에서는 속이 썩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어떤 문책을 받을지 모르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사라진 표물 하나를 찾아보자니 지나온 길이 몇 리인가 싶어 막막했다. 쟁자수들 중에는 요괴 짓이 아닌가 이야기가 돌고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된 거요.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오.”
추 표두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마라’는 뜻을 담아 설명을 끝냈다. 이 포두한테 말해준 것도 해결을 해달라는 게 아니라 더 이상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말해준 거였던 것이다.
“표물이 뭡니까?”
“...그건 말해줄 수 없소.”
“비단옷인가보군요.”
“?!!”
추 표두는 깜짝 놀라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연우혁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궤짝이 하나 사라졌을 때 다 확인은 해보셨습니까?”
“당, 당연히 모두의 몸을 뒤졌소.”
추 표두는 눈앞의 젊은 포두한테 압도되어서 ‘어떻게 비단옷인 걸 알았느냐’라고 묻지도 못했다.
“다른 궤짝들은?”
“표물은 함부로 열 수 없소.”
“그럴 것 같았습니다. 다른 궤짝들을 열어서 확인해보십시오. 비단옷이 늘어나있을 겁니다.”
“...?!!!!”
설명을 끝낸 포두는 덤덤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가 다시 눈을 감았다. 추 표두는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