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표국의 사람들 (2)
“...열어봐라!”
추 표두는 망설이다가 궤짝을 열도록 명령했다.
표사들은 웅성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궤짝의 문을 열고 안에 든 물건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표, 표두님...!”
자신과 마찬가지로 귀신에 홀린 것 같은 표정을 짓는 표사들을 보자 추 표두는 묻지 않아도 정답을 알 것 같았다.
정말로 사라진 비단옷들이 다른 궤짝에 들어가있었던 것이다!
“몇 개냐? 사라진 비단옷은 없느냐?”
“예, 예! 정말 다 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정말 요괴의 짓 아닙니까??”
“허튼소리. 요괴가 왜 이런 짓을 해?”
표사들이 술렁거리면서 이 일이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떠들어댔다. 그러나 쓸만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고민하던 추 표두는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포두님.”
“?”
눈을 감고 심법을 운기하던 연우혁은 한쪽 눈을 뜨고 힐끗 표두를 쳐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냥 젊은 포두였지만, 방금 보여준 기묘한 재주를 보고 나니 이 모습도 비범하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추 표두는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
“음.”
연우혁은 심법을 운기하던 걸 멈추고 추 표두와 눈을 마주쳤다.
‘괜히 참견했나?’
연우혁이 표두에게 사라진 비단옷의 위치를 말해준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연우혁이 그 위치를 이미 알고 있어서였다.
표국, 궤짝에 든 비단옷들, 사라진 궤짝 하나, 쟁자수 사이에서 도는 요괴의 소문...
이미 정답을 아는 만큼 알려주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물론 연우혁도 알고 있었다. 무림에서 정답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나불대는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걸. 사실 두 번째 이유가 더 컸다.
둘째는 내버려두면 이들이 서로 칼부림을 벌여서였다.
원래 해결한 사건에서는 난투의 흔적만 남아있어서 이유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실제로 옆에서 보니 아마 표두와 고참 표사가 서로 싸웠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무림의 문파들이 대개 그렇듯이 윗사람의 권위에 도전하는 건 아무리 올바른 의견이어도 피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옆에서 칼부림이 벌어지면 연우혁한테도 불똥이 튀니 해결해줬는데, 역시 사람이 배가 부르면 눕고 싶듯이 물건을 찾아주니 사연을 알고 싶어하는 모양이었다.
연우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좋습니다. 어려운 것도 아닌데 알려드리겠습니다.”
“!”
추 표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덕분에 이번 표행의 책임자로서 의문이 풀리게 된 것이다.
“대신 한 가지 약속해주십시오.”
“......”
추 표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 포두가 얼마나 뜯어낼지 예상이 갔던 것이다. 재주 없는 포두도 심심하면 돈을 뜯어내는데, 재주 있는 포두라면 얼마나 뜯어내겠는가.
“무엇인지?”
“이번 일로 아무도 처벌하지 말아주십시오.”
“...예?”
“이번 일로 아무도 처벌하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신지...?”
연우혁은 설명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거리고 눈을 감았다.
몇 번이고 해왔듯이, 신통력 있는 도사인 척 하는 게 백 마디 설명보다 훨씬 나았다.
예상대로 끙끙대며 고민하던 추 표두는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좋소이다! 이 표두의 명성이 보잘것없지만, 나름 정강일창이라는 과분한 별호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한 입으로 두 말하지는 않겠소이다.”
결국 사라진 물건도 없고 잘 마무리 된 만큼 어지간한 일은 눈을 감고 넘어갈 수 있었다.
추 표두는 그보다 어떻게 된 일인지가 훨씬 궁금했다.
“역시. 제가 사람을 제대로 봤습니다. 이리 오십시오.”
연우혁은 추 표두만 들을 수 있도록 가까이 오게 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밤에 짐짝은 누가 관리합니까?”
“표사들은 밖에서 보초를 서니, 쟁자수들이지요.”
“그럼 짐짝을 건드릴 기회가 있는 건 누구겠습니까?”
“쟁자수... 아니, 포두님. 그건 불가능하오.”
추 표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표국도 짐을 옮기는 쟁자수들을 그렇게까지 믿지 않았다. 표사들이야 나름 오랫동안 같이 일하며 대우를 받는다지만 쟁자수는 그보다 한 단계 아래 대우를 받는, 사실상 짐꾼들 아닌가.
그래서 쟁자수들이 짐짝 근처에서 보초를 설 때에도 엄정한 규칙이 있었다. 한 시진마다 보초 인원이 바뀌고, 날이 밝고 나면 모든 쟁자수들이 모여서 표물을 확인했다. 만약 조금의 문제라도 있으면 다 같이 처벌을 받았다.
“차라리 표사라면 무공이 있으니 표물을 훔쳐서 도망칠 수 있소이다. 하지만 쟁자수는...”
연우혁은 그런 지적에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표물을 훔치는 거면 어렵겠지요. 하지만 표물을 다른 궤짝에 숨겨넣는 것 정도는 쟁자수도 할 수 있습니다.”
“!!!”
표두는 눈을 깜박였다. 확실히 그랬다.
“하, 하지만 다음 쟁자수는? 다음 쟁자수뿐만이 아니라 날이 밝았을 때 모두의 눈을 속여야 하는데?”
“모든 쟁자수들이 손을 잡은 거지요.”
“...!!!!!!”
추 표두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연우혁은 고승처럼 차분하게 설명했다.
쟁자수들은 기본적으로 표사보다 더 가혹한 상황에 처한 만큼 서로 아끼는 마음이 강했다.
새로 들어온 쟁자수 중 한 명이 실수로 궤짝을 부수자, 그 쟁자수는 물론이고 다른 쟁자수들도 받을 처벌을 두려워했다.
-차라리 이 일을 숨기자!
-하, 하지만 이 부서진 궤짝을 어떻게 숨긴단 말이오?
-표물이 사라지면 모를까, 다른 궤짝에 들어있다면? 도착하고 나서 이상하게는 여겨도 더 이상 조사하진 않을 것이다!
-!
괜히 다 같이 처벌을 받느니, 쟁자수들은 손을 잡고 부순 궤짝을 없애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도착하고 나서 궤짝 하나가 사라진 걸 깨달아도 표물이 멀쩡히 들어있으면 그리 깊게 파고들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문제는 도중에 눈썰미 좋은 추 표두가 궤짝이 하나 사라진 걸 알아차렸다는 점이었다.
“쟁자수들 사이에서 요괴 소문이 먼저 돈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빨리 도착하게 하려고 그런 소문을 퍼뜨린 거겠지요.”
“이, 이 놈들이...!”
추 표두는 얼굴이 벌게졌다. 서투르고 뻔뻔한 쟁자수 놈들 때문에 외부인 앞에서 표국의 치부를 보이게 되다니.
“약속하셨잖습니까?”
“아, 그. 그랬지...”
눈앞의 포두가 말하자 그제야 추 표두는 정신이 돌아왔다.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대신 다른 감정이 샘솟았다.
대체 왜?
“...여보시오. 포두님.”
“아직도 물어보실 게 있으십니까?”
“그, 미안합니다. 귀찮게 해서... 왜 은자나 그런 게 아닌, 쟁자수들을 처벌하지 말아달라고 하신 거요?”
‘은자 달라고 했으면 안 줬을 놈이 뭐라는 거야?’
연우혁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추 표두나 표사들은 호구가 아니었다. 만약 ‘은자를 내놓아라’라고 했다면 ‘에이 궁금하지만 표물은 찾았으니까 포기하자’라고 반응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저는 일개 포두지만 관인입니다. 관인이 해야 할 일이 뭐겠습니까. 백성들이 가혹한 벌을 받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
추 표두는 오늘 가장 놀랐다. 사라진 표물이 다른 궤짝에서 발견되었을 때도, 쟁자수들이 저지른 짓이란 걸 알았을 때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었다.
‘이런 포두가 있다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청백리, 청백리 하지만 보통 고서나 야담에서나 나올 존재 아닌가. 실제로 추 표두는 살면서 한 번도 청백리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워졌다.
사실 쟁자수들의 불만을 관리해야 하는 건 표두인 본인이었다. 가혹하게 처벌만 할 줄 알지 쟁자수들이 가진 불만은 생각치도 못했던 것이다.
이번 표행이 비교적 안전한 표행이고 쟁자수들의 심성이 악하지 않아서 망정이지, 조금만 악한 마음을 품었다면 표행이 어떻게 틀어졌을지 알 수 없었다.
“...이 추 모, 오늘 연 포두님을 만나 크게 배웠습니다. 쟁자수 또한 표국의 사람이고, 마땅히 덕을 베풀어야 하는 일인데!”
“?”
갑자기 추 표두가 포권하면서 소리치자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핑계에 대한 반응치고는 지나치게 격렬했던 것이다.
“음. 이해해주시니 기쁩니다.”
“한경에 도착하면 연 포두님을 크게 대접하겠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감사해한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밑의 포쾌들이나 데리고 배에 기름칠을 해주게 할 생각이었다.
‘호들갑이 좀 심한 사람이군.’
* * *
방가전장에서 일하는 공 총관은 팔짱을 끼고 하인에게 지시했다.
“아마 오늘이나 내일 표국의 물건이 들어올 것이다. 확인할 준비를 하도록 전하거라.”
“예!”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어린 하인이 물었다.
“주인님께서는 어떻게 백 리 밖에서 오는 표물의 위치를 아시는 겁니까?”
“위치를 아는 게 아니다. 마땅히 와야 하는 시간이니 준비하는 것뿐이다. 정강표국이 이런 표물을 늦을 리 없지 않느냐?”
“만약 늦으면요?”
“한경에 짐 옮기는 표국이 어디 정강표국 하나뿐이더냐.”
총관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어린 하인은 깜짝 놀랐다.
정강표국 사람들과 그리 친하게 지내면서도 저렇게 언제든지 관계를 접을 준비를 하다니.
“놀랐느냐? 하지만 상인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정강표국도 알고 있다. 아무리 친밀해도 정강표국이 공짜로 일을 해주진 않듯이, 나 또한 마찬가지다.”
“예, 옛!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나저나 연 포두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더냐?”
“예.”
“으음.”
공 총관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걱정했다.
소문에 들으면 한경 밖의 관리 놈이 일을 시키겠다고 데려갔다는데, 원래 포두나 포쾌 같은 이들이 그리 대우 받는 위치는 아니었다. 괜히 싸움에 휩쓸려서 비명횡사라도 했을까 걱정이 됐다.
“그, 그래도 지부 어르신께서 그 포두의 재주를 칭찬하셨다고 합니다. 자기가 체면이 섰다고...”
“지부 어르신의 체면이 목숨을 구해주진 않지. 기껏 무공서를 구해놨는데 보답을 할 기회가 사라질까봐 걱정될 뿐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표물이 도착했답니다!”
“역시. 잘 됐군. 들어오라고 해라!”
공 총관은 자기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정문으로 향했다. 수레와 함께 표사들이 들어오고, 말 위에는 낯익은 포두가...
“???”
“앗. 총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니, 자네...? 표국에 들어갔나?”
“그럴 리 있겠습니까? 돌아오는 길에 만나 동행했습니다.”
“다행이군. 일이 잘 마무리된 모양이야! 대체 무슨 일이었길래?”
“별 일 아니었습니다.”
연우혁은 자세히 말하는 걸 피했다. 아무래도 금의위가 주도한 일인데다가 혈교까지 엮인 만큼 떠벌리고 다니는 게 걱정됐던 것이다.
괜히 다른 금의위 교위가 와서 ‘이놈! 어디서 허풍을!’하고 칼을 휘두르기라도 하면...
‘정말 별 일 아니었나보군.’
젊은 포두의 반응에 공 총관도 무심코 넘어가버렸다. 관리가, 그것도 젊은 관리가 자신의 공에 대해 떠벌리면 떠벌렸지 그냥 넘어갈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니, 두 분. 아는 사이셨습니까?”
뒤늦게 들어온 추 표두는 연우혁과 총관의 대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공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오랜만에 한경에 와서 잘 모르겠군. 이 포두가 어떤 포두인지 아나? 바로 한경제일포두일세.”
“아, 아니... 그 정도는...”
연우혁은 좀 민망했다.
다른 포두들이 딱히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저런 별호를 달고 다녀도 되나 싶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뭐라? 혹시 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나?”
추 표두는 오면서 있었던 일에 살을 붙여서 총관에게 설명했다. 공 총관은 감탄해서 무릎을 쳤다.
“저게 젊은 관리의 의기 아니겠는가!”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가도 되나?’
연우혁은 영양가 없는 대화에 멀뚱멀뚱 서있다가 슬쩍 정문을 쳐다보았다.
표국 덕분에 편하게 왔으니 이제 슬슬 관아로 돌아가서 포쾌들을...
“잠깐. 연 포두! 기다리게. 자네가 무공을 찾았었잖나!”
“!”
돌아가려던 연우혁은 공 총관의 말에 놀랐다.
“설마 괜찮은 무공서를 찾으셨습니까?”
“그럼 이 사람이 괜찮지 않은 무공서로 허풍을 떨까? 이리 오게.”
공 총관은 연우혁을 방 안으로 불렀다. 연우혁은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탁!
-흑사보(黑蛇步)
“......”
연우혁은 첫 이름이 주는 강렬한 인상에 아찔해졌다.
‘아니. 이름은 그래도 괜찮은 무공일지도...’
“이게 누구의 무공인 줄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백면신투의 무공이라는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