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46)화 (46/107)

정강표국의 사람들 (3)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연우혁은 더욱 아찔해졌다.

백면신투가 익힌 무공이 여기서 나올 줄이야.

아니, 이쯤되자 어디서 구했는지가 더 신기했다.

“총관 어르신. 그, 백면신투의 무공을 대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백면신투가 살아있는 무림인도 아니고 소속된 문파가 있는 무림인도 아니었다. 심지어 남궁세가의 담벼락을 넘으려다가 죽은 무림인 아닌가.

대체 백면신투의 무공을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 총관의 입가가 쭉 올라갔다. 연우혁의 질문을 꽤 기다렸다는 게 느껴졌다.

“잘 물어봤네. 바로 흑시(黑市)에서 구했네!”

“!”

흑시, 귀시(鬼市)라고도 불리는 이 장소는 쉽게 말하자면 바로 암시장이었다.

보통 사파나 하오문 같은 이들이 주도해서 열리는 이 수상쩍은 시장에는 온갖 수상쩍은 물건들이 흘러나오고 빠져나갔다. 장물에 위품에 허섭스레기들로 가득찬 만큼 어지간한 이들은 들어가서 뭔가 사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더 수상한데...?’

무림인도 아닌 공 총관이 진짜 무공인지 가짜 무공인지 구분할 수 있나 걱정이 됐다.

그런 연우혁의 걱정을 알아차렸는지 공 총관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내가 직접 보고 구했을까 걱정하는 건가?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물건을 직접 보고 고를 만큼 멍청해 보이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연우혁은 뜨끔해서 반성했다.

무림인들의 안 좋은 습관이 어느새 연우혁에게도 옮아버린 것이다. 무공 좀 익혔다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을 얕보다니.

공 총관은 무공은 모르지만 오랫동안 전장에서 일하면서 사람과 물건을 보는 눈이 탁월했다. 이런 사람이 멍청하게 가짜를 살 리 없었다.

“예전에 하오문 무인에게 은혜를 하나 베푼 적이 있었네. 제법 큰 은혜였지. 그 은혜를 빌미로 부탁한 거니, 암시에서 가장 괜찮은 무공이 나왔다고 봐도 좋을 걸세.”

“...어르신...!”

연우혁은 감동했다.

세상에는 은혜를 받고도 갚지 않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경의 맹 판관이 그랬고, 기남의 현령이 그랬으며, 하여간 대충 관리들은 다 그렇다고 봐도 좋았다.

오히려 장사를 하는 이들이 신의를 지킬 줄 알았다.

“이 연 모는 어르신밖에 없습니다!”

“허허. 사람 참 부끄럽게. 어서 받게나.”

연우혁은 감사히 받아서 영안을 열고 훑었다. 지금 연우혁이 익힌 보법이 전진에 치중한 백사보법과 그냥 별로인 위국보법밖에 없는 만큼 뛰어난 보법이 필수적이었다.

“...?”

흑사보를 이해한 연우혁의 표정이 알쏭달쏭하게 바뀌었다.

이 보법은...?

‘무리(武理)가 괴팍한 건 그렇다 치고, 구결이 이상한데?’

보통 일반적이지 않고 괴팍한 무리일수록 사파 무공이었다. 하지만 연우혁은 이제 괴팍한 무공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익힌 무공들이 대부분 다 그랬기 때문이었다.

연우혁이 놀란 건 이 무공서에 무언가 숨겨진 뜻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영안을 좀 더 깊게 사용한다.’

심호흡을 한 뒤 연우혁은 영기를 사용해 영안에 더욱 더 집중했다. 오랜만에 두통과 함께 머릿속으로 정보가 밀려왔다.

‘이건 두 개의 무공이다!’

흑사보와 사심불구경공(蛇心佛口輕功)!

놀랍게도 흑사보는 뒤의 경공을 익히기 위한 입문 보법이었다. 연우혁은 두통이 몰려오는 와중에도 흥분했다.

입문 보법이 따로 있다는 건 그만큼 그 경공이 대단하단 의미 아니겠는가. 둘의 구결을 분리해서 읽어내자 서로의 위력이 정확히 느껴졌다.

흑사보는 적을 대면한 상황에서도 몸을 돌리지 않고 순식간에 거리를 벌릴 수 있는 기묘한 보법.

그리고 그 흑사보를 익힌 뒤 배우는 사심불구경공은 신법과 보법에도 그 이치가 맞닿아서 적용이 되는, 몸을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거리를 벌릴 수 있는 신공절학...

‘......’

둘 다 정말 도둑놈용 무공이었다. 연우혁은 갑자기 두통이 거세지는 걸 느꼈다.

처음에는 백면신투 놈의 무공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진짜로 두통이 심해지는 거였다.

“으윽.”

“연 포두! 연 포두! 이, 이봐! 의원을 불러와라!”

* * *

잠에서 깨어나자 연우혁은 자신이 왜 기절했는지 깨달았다.

하단전과 중단전이 받쳐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강한 신통력을 사용한 게 문제였다.

‘이게 그 소리였군...’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히고 나자 왜 상단전이 열린 사람은 절명한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몇 번 더 쓰러지고 나면 언젠가는 크게 다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통제 가능한 영안이라 다행인가?’

만약 다른 통제 불가능한 신통력이었다면 실시간으로 몸이 박살나는 걸 지켜봐야 했었으리라.

연우혁은 눈을 감고 쓰러지기 전에 보았던 무공을 정리했다. 영안에 과부하가 걸릴 정도의 무공이었던 만큼 확실히 뛰어난 무공이긴 했다.

지나치게 도둑놈용 무공이어서 그렇지. 게다가 겉모습도 영 소름끼쳤다. 강시처럼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날아가는 무림인이라니.

‘...뭐... 도망칠 일이 있긴 하겠지.’

연우혁은 흑사보 무공서를 보며 새삼스럽게 백면신투에 대해 생각했다.

보아하니 백면신투는 아마 이 무공을 대성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전반부에만 손때가 가득하고 후반부에는 거의 펼쳐진 흔적이 없었다. 아마 두 가지 무공이 섞여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전반부만 익힌 모양이었다.

‘흑사보만 익힌 모양이군. 하긴 흑사보만 해도 나쁘진 않다만...’

연우혁은 백사보법과 흑사보를 섞기로 마음먹었다.

냉수사나 백면신투가 봤다면 기겁했을 광경이었지만 이미 두 보법을 대성에 가깝게 이해한 만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진할 때는 백사보법으로, 나머지 상황에서는 흑사보로. 누가 물어보면 쌍사보법이라고 둘러댈 생각이었다.

‘아닌가? 이름이라도 좀 더 정파스럽게 바꿔야 하나?’

사심불구경공은 마찬가지로 괴팍한 경공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뱀의 마음에 부처의 입’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속으로는 도망칠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는 그런 기색을 주지 않는다는 절묘함이 있었다.

뛰어난 경공은 신법이나 보법에도 영향을 주는데 이 경공이 바로 그랬다. ‘몸을 가볍게 하는 공부’의 이치가 깊어지면 ‘몸을 움직이는 공부’나 ‘발을 움직이는 공부’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공을 정리한 연우혁은 마침내 체념했다.

‘무림에서 싸울 일 생기면 그냥 마두 취급 받자. 관직 오르면 무마되겠지.’

“연 포두. 괜찮나?!”

연우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공 총관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달려왔다.

“괜찮습니다. 과로 때문에...”

“상단전이 열린 탓에 단명한단 이야기는 들었네.”

“...그, 예.”

보는 사람마다 곧 죽을 사람 보듯이 대하는 게 당황스럽긴 했지만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 총관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렇게 재주 좋은 사람이... 재인박명(才人薄命)이라지만 정말 너무하는군.”

“아직 괜찮습니다.”

일 년 안에 죽을 것처럼 말하자 연우혁은 부정했지만, 공 총관은 무시하고 자기 할 소리를 했다.

“실은 흑시에서 한 가지 더 구했네.”

“무엇입니까?”

“소림 소환단일세.”

“...?!!”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에 연우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반적인 영약이 아니라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영약은 그 의미가 달랐다. 누가 들고 있는 걸 들킨다면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

“들킨다면 위험합니다!”

“안 들키면 그만이지.”

공 총관은 소림이든 대림이든 알 게 뭐냐는 듯이 대꾸했다.

무림인들이나 소림을 공경하지 공 총관은 불자(佛者)도 아니었다.

“들키면 하오문 놈들이 목이 날아가지 내 목이 날아가진 않을 걸세.”

“저도 그럴까요?”

“그건 아니지. 그러니까 빨리 먹게. 내가 보는 앞에서 처리해주면 고맙겠군.”

“...어르신...!”

연우혁은 다시 한 번 감격해서 아부를 하려고 했다. 그러자 공 총관이 짜증을 냈다.

“빨리!”

“아. 예.”

먹기 전에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영안을 열었다. 방금 혹사한 탓에 조금 조심스러웠다.

놀랍게도 멀쩡한 소환단이었다.

‘반 갑자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통 일류의 경지를 엿보려면 반 갑자의 내공이 필요하단 게 무림의 정설이었다. 현재 연우혁이 쌓고 쌓은 내공과 소환단의 내공을 합치면 반 갑자 정도가 나왔다.

꿀꺽!

저번 하북팽가의 취옥단처럼 입에 넣고 삼키는 순간 녹아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 기운은 느낌이 달랐다. 훨씬 더 단단하고 정엄한 기운이 단전과 세맥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연우혁은 조금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내공을 흡수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나 반 갑자의 내공을 갖추기에는 조금 모자랐다. 연우혁은 초식을 펼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펼쳐봤자 초식과 초식 사이에 아주 작은 끊김이 있을 거라는 걸.

‘...아쉬워하지 말자. 이 정도면 곧이다.’

연우혁처럼 늦게 시작해서 스승도 없이 이류 말입에 이렇게 빨리 도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걸로 저번 빚은 갚은 걸세.”

“오히려 제가 빚을 졌지요.”

“그런가? 안 그래도 부탁할 게 있었는데 잘 됐네.”

“......”

당했다는 걸 알았지만 연우혁은 불평하지 않았다. 사실 방금 삼킨 소환단이 단전에 묵직하게 자리 잡아서 불만도 생기지 않았다.

“뭐든지 말해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연우혁은 한경의 고관대작들부터 시작해서 다른 전장과의 이권다툼까지 어떤 일이든 해낼 각오로 말했다.

“음. 그게 말일세...”

막상 연우혁이 흔쾌히 수락하자 공 총관은 괜히 꺼내기 저어됐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들어보고 어렵겠다 싶으면 하지 않아도 되네. 사실 자네가 해결해주기보다는, 자네의 식견을 듣고 싶은 거라서.”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의아해하는 연우혁을 앞에 두고 공 총관은 설명을 시작했다.

방가전장쯤 되면 그래도 한경에서 나름 이름 있는 전장이라, 관리들과 친분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있었다.

총관은 은자를 바치고 관리는 친절을 베풀어주는 아름다운 상생이 한경 같은 대도시에는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개방의 거지들이 전장의 근처를 돌아다닐 때마다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게 굴었다. 소리를 높이는 건 물론이고 구걸을 할 때도 시간을 지키지 않고 문을 두드리는 게 비일비재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아. 설명이 적었군. 그러니까 보통 개방의 거지들이 저러는 건 관리 중 누군가가 사주한 걸세.”

“!”

만약 전장의 누군가가 개방의 명예를 더럽혔다면 거지들은 훨씬 더 격렬하게 굴었을 것이다.

저렇게 은근하게, 선을 지켜서 행동한다는 건 아마 거지들 본인은 별다른 원한이 없지만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았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한경에서 개방의 거지를 사주할 수 있는 건 보통 관리들밖에 없었다.

“대충 이런 식이네. 한경의 관리가 나한테 필요한 게 있다 하더라도 그냥 대뜸 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그 사람도 체면이 있고 나 또한 체면이 있는데 말일세.”

‘체면이 저런 곳에 쓰는 단어인가?’

연우혁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연우혁의 윗사람들일 테니 욕해서 좋을 게 없었다.

“예. 그렇죠.”

“그러니까 거지들이 먼저 좀 시끄럽게 굴면, 그 다음에는 사주한 관리가 나를 초청하는 걸세. 연회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겠지. ‘요즘 거지들이 시끄럽게 굴어서 전장 내에 불평이 많다고 들었네, 공 총관. 괜찮다면 내가 도와주겠네.’같은 식으로 말이야.”

‘사파 새끼들 수법이잖아?!’

연우혁은 어이가 없었다.

지가 먼저 거지 풀어서 괴롭힌 다음에 불러서 ‘도와줄까?’라니. 사파 새끼들도 저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공 총관은 이 방법 자체에는 전혀 불만이 없어보였다. 워낙 유구한 전통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것 자체는 별 불만이 없네. 이렇게 관리의 청탁을 들어주면 그게 또 빚이니 말일세. 문제는 어느 관리가 어떤 청탁을 하고 싶어하는지일세. 미리 알아야 대비하기 쉽거든.”

관리의 청탁을 들어주는 건 환영이지만, 미리 내용을 알고 있어야 영리하게 대비가 가능했다.

내용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술자리에서 대뜸 들으면 그 자리에서 거절할 수도 없는 만큼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줘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관리들이 그걸 노리기에 이런 방법을 썼다.

“어느 관리가 어떤 청탁을 하려는지 미리 안다면 거절할 핑계도 준비할 수 있으니 훨씬 수월하지.”

“개방에 직접 물어보면 어떻습니까?”

연우혁의 질문에 공 총관은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자들도 관리의 부탁을 받아서 하는 일인데 그걸 대답해주겠나?”

“으음. 그래도 제가 한 번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제가 나름 친분이 있습니다.”

“아니...”

공 총관은 연우혁이 저렇게 말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젊은 포두가 개방 거지와 가질 친분이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쪽박 안 부수는 정도가 다일 것이다.

“가서 물어보되 억지로 물어보지 말게. 알겠나? 괜히 두들겨 맞을 수도 있네. 거지 놈들은 겁이 없어.”

“예. 알겠습니다.”

정확히 두 시진 후 젊은 포두가 돌아왔다.

“알아왔습니다. 총관 어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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