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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48)화 (48/107)

정강표국의 사람들 (5)

하지만 연우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제갈규가 말을 끝내버렸다.

“연 아우. 나는 대(大) 제갈세가의 핏줄로, 강호의 많은 이들이 문제가 생기면 내게 물어보곤 했네. 하지만 사실 난 그렇게까지 뛰어나지 않네. 신기묘산, 신기묘산이라고들 하지만 아직 어설프단 말일세.”

자존심 강한 제갈규로서, 세가의 사람도 아닌 무림인한테 이렇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로 말하지 않았겠지만 눈앞의 이 포두라면 왠지 입이 열렸다. 어쩌면 제갈규가 인정한 두뇌를 가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난 도저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네. 연 아우는 알겠나?”

“......”

물론 연우혁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누가 죽었거나 뭐가 사라졌거나 하는 일이라면 차라리 나았다. 그런 건 눈 감고도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치정 문제 아닌가.

제갈규가 당 소저를 좋아하는데 체면에 상처를 주지 않고 좋게 이길 방법 같은 게 있을 리가...

“형님. 당 소저를 왜 좋아하시는 겁니까?”

“...어, 어떻게 알았지!?”

‘큰일났군. 이 사람.’

자기가 방금 태도로 드러내놓고 진심으로 놀라하는 제갈규의 모습에 연우혁은 경악했다.

제갈규가 무림에서 친우는 좀 부족해도 머리가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제 머리까지 부족해지고 있었다.

“이길 수 있는 상대를 두고 고민하시는 이유가 뭐 그리 많겠습니까.”

“그... 그렇군. 하긴...”

사실 연우혁은 예전부터 태도를 보고 알았지만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제갈규가 필요 이상으로 부끄러워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 소저를 좋아하시는 건 사실이지요?”

“...맞네. 호감이 있네.”

“이유가 뭡니까?”

연우혁은 이유를 들으면 해결방법이 생길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가문이나 무림의 정세와 관련된 이유라면 그걸 핑계로 비무를 파할수도...

“예쁘잖나.”

“...그렇군요.”

‘틀렸군.’

예상 밖의 이유에 연우혁은 실패를 직감했다.

어쩌면 무림에 온 후 처음으로 실패하는 사건이 될지도 몰랐다.

* * *

사 포쾌는 팔짱을 끼고 구역 안가의 정문 앞에 섰다.

원래 이런 정문 문지기 노릇은 귀찮고 보람 없는 일이라 포쾌들 중에서는 대충 하거나 꾀를 부리는 자들이 많았다. 한경 안에서 이런 포쾌들 안가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사 포쾌의 자세는 흠 잡을 곳 하나 없이 완벽했다. 사 포쾌를 아는 다른 포쾌들이 보고 놀라워 할 정도였다.

‘달라진 모습을 보여드리겠다.’

사 포쾌도 자신의 평판이 어떤지 잘 알았다. 원래는 부하였던 다른 포쾌들도 사 포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오 포두의 조카 놈은 노골적으로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 포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래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법.

사 포쾌는 악랄한 무림인들 앞에서 아무 상관없는 자신을 구해준 젊은 포두에게 꼭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

“연 포두 안에 있나?”

“...?”

옷을 보니 꽤 괜찮은 집안의 여식으로 보이는 사람이 정문 앞에 서서 말을 걸자 사 포쾌는 멈칫했다.

원래라면 뇌물을 요구하거나 귀찮게 굴지 말고 가라고 했겠지만, 달라진 사 포쾌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말씀드릴 수 없소.”

“...뭐?”

“무슨 일로 오셨는지 말하시오. 마땅한 관무라면 맡아서 처리하겠소!”

눈앞의 소저는 옅게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말했다.

“한 번만 넘어가주지. 비켜라. 안에 있지?”

“무슨 일로 오셨는지 말하시기 전에는 들어갈 수 없소.”

‘미쳤나?’

당령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포쾌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화도 나지 않았다.

무슨 황제를 만나는 것도 아니고 포두 하나 만나는데 이렇게 격식을 철저히 따지는 포쾌 새끼가 어디 있단 말인가.

“분명 한 번만 넘어가준다고 했...”

“아이고!!!”

“사 포쾌! 이리 오게! 포두님!! 당 소저 오셨습니다!!”

뒤늦게 다른 포쾌들이 달려들어서 사 포쾌의 양팔을 잡아끌었다. 사 포쾌는 당황해서 물었다.

“뭐하는 거냐?! 외부인을 멋대로 들여보내다니!”

“입 닥치시오! 당문의 사람입니다!”

“뭐, 뭐!?”

사 포쾌는 기겁했다. 어쩐지 잘 사는 집 같다 했는데 당문이었다니.

“당, 당문의 사람이 여긴 왜...?”

“저번에 포두님께서 일을 해결해주셨잖습니까. 물어볼 게 있나봅니다. 아니, 객잔에서 그 난리를 쳤는데 왜 모릅니까!”

“이봐. 사 포쾌는 그 때 누워있었잖나.”

“아. 그랬지.”

저승을 구경하고 온 포쾌들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동안, 당령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들어왔다. 뒤늦게 소란을 알아차린 연우혁이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당 소저. 포쾌들이 규율을 중시해서 말입니다.”

“보기 좋군.”

당령은 알아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안에서 심법을 운기하며 제갈규의 비무를 고민하던 연우혁은 당령을 보자 문득 궁금해졌다.

“혹시 당 소저. 비무 때문에 오신 겁니까?”

“!!”

평소 허둥대지 않던 당령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는지 의자 귀퉁이를 부숴버렸다. 연우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의자 비싼 의자인데.’

“어... 떻게 알았지?”

“한경의 포두로 일하면 이런저런 소문들이 들어옵니다. 포쾌들이 어떤 부분에서는 개방의 거지들 못지 않지요.”

“그런 거였나. 몰랐는데 놀라워.”

졸지에 당령 안의 포쾌들 평가가 조금 올라갔다. 연우혁은 상대가 비무 때문에 왔다고 듣자 혹시나 싶어서 질문을 던졌다.

“혹시 비무 상대가 제갈 형이라 고민되시는 겁니까?”

당령은 이번에는 아까만큼 놀라지 않았다. 이번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 포두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겠네. 그래. 상대가 제갈규라서 지금 고민 중이야.”

‘설마?’

연우혁은 당령도 제갈규에게 호감이 있나 싶었다.

영안으로 그런 감정은 본 적 없었지만 사람 마음이란 건 어디에 어떻게 숨어있을 지 모르는 법.

“혹시 제갈 형을 좋...”

“어떻게 하면 제갈규를 확실하게 이길 수 있을까?”

다행히 당령은 연우혁의 망언을 못 들은 모양이었다. 연우혁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제갈 형을 말입니까?”

“그래. 알다시피 비무에서는 독과 암기가 제한되잖아.”

연습 비무에서 사천당문은 아무래도 좀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치명적인 암기도, 지나치게 치명적인 독도 쓸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적당한 암기나 독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데, 문제는 그 정도 암기나 독은 제갈규도 안다는 점이었다.

같이 협행을 하면서 무공을 봤는데 제갈세가의 무인이 모를 리 없었다.

“네 꾀라면 분명 그 놈을 이길 방법을 알 것 같아서.”

“아니... 당 소저. 친분이 있는 무인의 약점을 함부로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말하고 나서 연우혁은 아차 싶었다. 영안으로 본 당령의 몸에서 분노가 피어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당령은 놀랍게도 인내했다. 손등 위로 힘줄이 튀어 오르는 정도로 분노를 가라앉힌 당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겠지. 당연히 알고서 한 질문이야. 농담에 가까웠지.”

‘절대 농담이 아니었는데.’

진심으로 내놓으라고 했다가 뒤늦게 깨닫고 농담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영안을 가진 연우혁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연우혁은 살짝 감동했다.

‘사건을 해결해 준 보람이 있군.’

강 노인을 찾아주기 전이었다면 ‘니가 제갈세가한테 뒤지든 말든 알 게 뭐냐 뱉어라’했을 텐데...

“음.”

“?”

“으음.”

“??”

“뭐, 몰래 말해줘도 괜찮고. 당문의 이름을 걸고 비밀은 지켜줄 테니까.”

“...안 됩니다.”

“그러니까 몰래...”

* * *

‘액이 낀 날인가?’

어찌어찌 당령도 돌려보내고, 연우혁은 생각에 잠겼다. 이쯤 되니 비무가 진심으로 두려워질 정도였다.

‘가더라도 절대 제갈규 옆에 있지는 말아야겠군...’

“연 포두 있는가!”

‘젠장.’

제비처럼 안가에 날아드는 당등을 본 연우혁은 경공을 미리 펼치지 않은 걸 후회했다.

“소문은 들었다. 공을 세웠다고? 대단하구나. 금의위 놈들이 얼마나 까다롭고 지랄맞은데 말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분타주는 네가 끌려간 줄 알고 관아를 습격하려고 했지.”

“?!”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살짝 감격스럽기도 했지만 관아 습격은 뒷감당이 너무 힘든 일이지 않은가.

“용케 그런 생각을...”

“그렇지? 내가 말렸다.”

“감사합니다. 역시 독혼수 대협밖에 없으십니다.”

“정 분타주가 좀 성질이 급하니까 이해해라. 그보다 네 꾀주머니를 빌리고 싶은데...”

“혹시 비무 때문에 오셨습니까?”

당등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이, 이 녀석! 대체 그건 어떻게!?”

“사실 당 소저가 오셔서 물었습니다.”

“아... 난 또.”

당등은 김이 샜다는 듯이 젊은 포두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이 보여준 재주들이 하도 신통하다보니, 당연한 걸 맞춰도 괜히 더 비범하게 생각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하여간 잘 됐다. 들어봐라.”

당등은 멋대로 털썩 앉더니 제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경에서 활동하는 표국 중에 정강표국과 창천표국이란 두 표국이 있는데, 이 두 표국이 보통 앙숙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또 뭔 시비가 붙어서 서로 비무까지 가게 됐는데...

“이 둘이 하도 붙어대는 바람에 불평이 많다. 표국 놈들이 표물 옮기는 것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 싸움만 벌이니 당연한 일이지. 그래서 내가 중재를 맡게 됐는데.”

“??”

연우혁은 비무가 사실 두 표국이 결판을 내려고 벌이는 거였다는 사실도 놀라웠는데, 그 중재를 당등이 맡게 됐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어떤 인연으로 중재를 맡게 되신 겁니까?”

“아. 두 국주가 무당의 속가제자다. 청허진인께서 내게 부탁하셨지.”

“!”

무당파의 이름에 연우혁은 눈을 크게 떴다. 두 국주가 같은 문파 출신이란 건 알았지만 무당의 속가제자였다니.

‘무당의 무공을 배웠는데 저렇게 저열하게 싸워도 되나?’

“무당 무공 헛배운 놈들이지.”

“...사람의 욕심이 어찌 그리 쉽게 다뤄지겠습니까?”

“그건 네가 무당의 도사들을 못 봐서 그런 거 아닌가 싶은데. 그 도사들이 제일 잘 하는 게 그거다. 하여간, 네 그 기막힌 꾀주머니에서 꾀 하나 꺼내 보거라. 맨입으로 부탁하지 않으마.”

“엇. 혹시 영약 갖고 오셨습니까?”

연우혁의 질문에 당등은 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영약이 필요했나?”

“꼭 필요한 건 아니고, 아무래도 혼자 무공을 독학하다보니 한계를 느껴서...”

당등은 설마 눈앞의 포두가 일류 직전의 경지까지 혼자서 독학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영약... 으음. 당문의 영약은 외부인한테 쉬이 줄 수가 없군.”

“그건 오대세가라면 다 그런 거 아닙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다. 독기 때문이다.”

‘아.’

연우혁은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당문의 무인들이 익히는 심법은 독공이라고 해서 아예 다른 방식으로 특화된 무공이었다.

그런 무공에 어울리는 영약은 당연히 독일 터.

“영약이 아니라면 암기를 갖고 오셨습니까?”

“잠깐, 포두가 암기 써도 되나? 마두 소리 들을 것 같은데.”

“......”

연우혁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당등은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청허진인을 만나게 해주마.”

“?”

당등은 의미심장하게 말했지만, 연우혁은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파일방도 오대세가도 아닌 만큼 저게 뭔 소린지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청허진인을 만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른단 말이냐!?”

“모릅니다만...”

“아. 그렇겠군.”

당등은 그제야 눈앞의 포두가 오대세가 출신이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네가 상단전이 열린 채로 태어나 목숨이 위험하단 이야기를 듣고, 주변에 여러 통 서신을 보냈다. 아무래도 술법에 능한 쪽이 이런 걸 잘 알지 않겠나 싶어서 말이다.”

“...대협!”

연우혁이 감사를 표하려고 하자 당등은 질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청허진인은 무당파 내에서도 이런 술법에 능한 분이시다. 워낙 신출귀몰한 사람이라 장문인도 만나기 힘든데, 운 좋게 이번 일을 해결해주면 만나보겠다고 하시더군. 사실 너한테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저한테? 어째서 말입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

“아.”

이번에는 연우혁이 머쓱해졌다. 하긴 그렇게 소문이 퍼지도록 해결을 했는데 관심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대협. 이건 어디까지나 두 표국을 중재해야 만나주신다는 거 아닙니까. 제가 무슨 재주로 둘을 설득합니까?”

“들어나 봐라. 그만 징징대고. 원래 둘은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둘이 처음으로 강호에 출도해서 협객 노릇을 할 때 꽤 커다란 산채를 하나 토벌하고 금덩어리들을 주웠다지 뭐냐.”

“옆에 혹시 철로 만든 궤(櫃)도 있었답니까?”

“...?!!!”

당등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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