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두 연우혁 (4)
“그런 거였습니까?”
“무림의 일이란 건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 달라지기 마련이지.”
당등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물론 얼마 전까지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청허진인의 가르침을 받다 온 연우혁에게는 헛소리로 들렸다.
“통판 어른을 소개해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이렇게 급하게 소개해주실 필요가 있습니까?”
연우혁도 물론 한경의 정관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통판이나 판관, 더 올라가서는 한경의 우두머리인 지부 어른하고도 안면을 익혀놔야 정관 자리를 노릴 수 있지 않겠는가.
기본적으로 포두는 비정규직에 가까웠고 특별한 공이 없으면 제대로 된 관직을 얻기 힘들었다.
그리고 특별한 공을 세우려면 윗선에 잘 보여야 했다. 아무리 공을 세워도 한경의 관리들이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으면 올라가질 않았다.
그런 만큼 친해지고 싶긴 했지만...
‘이거 괜히 역효과 나는 거 아닌가?’
금 통판의 성격도 모르는데다가 당등의 행동이 너무 급하고 거칠었다. 만약 금 통판이 조금만 영리하다면 이번에 연우혁이 나선 게 창천표국의 국주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한경 포쾌 놈들은 그냥 도둑놈들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런 포두가 있었구나! 복이다, 복이야! 실로 한경의 복이야! 우하하하!”
“......”
그러나 걱정도 무색하게 금 통판은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좋아했다. 어찌나 웃었는지 볼살이 푸르르 떨렸다.
“이리 와라. 이리 와! 연 포두,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다! 이리 재주 좋은 녀석이 여기 한경에 있었을 줄이야.”
“아버지! 절 받으십시오!”
당등은 연우혁이 찰나도 고민하지 않고 외치는 모습에 질색했다.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반응이었다.
“연 포두 덕분에 내 체면이 살았다. 내 체면이 살았어! 사실, 맹 판관 같은 놈들만 포두를 부려대는 꼴이 영 못마땅했거든.”
금 통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연우혁은 영안으로 통판의 말에서 느껴지는 질투심과 적개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한경의 관리들이 전부 친하진 않았다. 사실 어느 정도는 서로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판관 같은 경우는 형사를 다루는 만큼 품계는 낮아도 권세는 높았고, 통판 같은 경우는 품계는 높았지만 권세는 좀 낮았으니...
“난 그래서 한경의 포두들은 다 맹 판관의 부하인 줄 알았지.”
금 통판은 말하면서 슬쩍 떠보듯이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허술하고 멍청해보여도 통판 또한 한경에서 오래 머문 관리였다. 권력의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았다.
그러나 금 통판이 착각하고 있는 게 있었다. 금 통판이 권력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면 연우혁은 그냥 영안으로 처음부터 꿰뚫어보고 있었다.
‘자기 밑에 붙으라 이거지?’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연우혁은 금 통판이 원하는 대답을 정확하게 해줬다.
금 통판은 연우혁이 지금 맹 판관 밑에 설 거냐, 아니면 자기 밑에 설 거냐고 묻고 있었다. 여기서 대답이 늦었거나 맹 판관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했다면 대번에 의심을 사서 쫓겨났을 것이다.
과연 금 통판의 얼굴이 헤벌쭉 펴졌다. 반응이 빨리 나오는 걸 보니 그만큼 진심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셔라, 마셔! 오늘 재주 좋은 새 아들이 생겼는데 이 기쁨을 어떻게 축하하지 않을쏘냐!”
연우혁은 금 통판이 따라주는 술을 벌컥벌컥 마셔야 했다.
취기가 거나하게 오른 금 통판이 옆의 첩과 노는 사이, 연우혁은 당등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급하게 소개해주신 겁니까?”
“급하게 친해진 건 네놈이지. 뭐? 아버지? 이런 미친 놈.”
“당 대협께서도 원하신다면 그렇게 불러드릴 수 있습니다.”
“너는 정말 황궁에 던져놔도 목 하나 간수는 할 놈이다. 그래. 왜 이렇게 급히 통판을 소개시켜줬는지 궁금하겠지. 이유는 내가 친 놈이 네게 원한을 품고 있어서다.”
“...?”
연우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곽선 말입니까?”
아주 옛날에 금덩어리 하나 훔쳤다가 온몸의 구멍이랑 구멍에 전부 극독이 들어간 불쌍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 사람이라면 연우혁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수도 있었다.
“뭐? 아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 놈이 왜 나와?”
“그럼 누굽니까? 아. 알겠습니다. 개방의 거지입니까?”
“미친놈아, 내가 언제 개방의 거지를 팼느냐? 판관 놈이다, 맹 판관 놈!”
“아.”
연우혁은 살짝 머쓱해졌다. 당등이 친(그리고 쳤을 것 같은) 놈들이 워낙 많아서 헷갈린 것이다.
“아니, 잠깐만요. 판관 어른이 왜 저한테 원한을?”
“이유야 많지. 일단 금의위 교위 때문에 놈은 물러난 상태다. 그 교위와 가까이 지낸 게 누구지? 네 녀석이다. 이간질을 했다고 의심을 받을 법하지. 그리고 실제로 한 게 맞잖냐.”
“제가 아니라 교위가 한 짓입니다!”
정말이었다.
맹 판관이 자작극을 벌였다고 의심한 건 교위 본인이었으니까.
물론 연우혁이 옆에서 말리지 않긴 했지만...
“그래. 그래. 알겠다. 그런 걸로 하자고.”
‘진짜 패고 싶네.’
“그리고 지금 한경에서 네 소문은 생각보다 많이 퍼졌다. 당장 어제 객잔만 가도 보기 드문 명포두가 나왔다고 떠들더군.”
“그렇습니까? 이거 참... 그런데 그건 뭔 상관입니까?”
“맹 판관 놈 성격을 아직도 모르느냐? 딱 봐도 샘이 엄청난 놈이다. 자기는 탐관오리라고 욕을 먹는데, 자기 밑의 부하가 칭송받는 걸 탐탁해할까?”
“...!”
연우혁은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당등의 말이 맞았다.
‘속이 더럽게 좁아 보이긴 했다.’
당장 저번에만 봐도 맹 판관이 포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마지막으로 놈은 내게 원한을 품고 있다.”
“그렇죠.”
“하지만 내게는 원한을 풀 수 없지. 목숨이 걱정된다면야. 그러나 너라면?”
“...?”
연우혁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되물었다.
당등한테 품은 원한이 왜 연우혁한테 온단 말인가?
게다가 따지고 보면 연우혁이 당등한테서 목숨을 구해줬는데.
“당 대협한테 품은 원한이 저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친우 아니냐. 날 못 노리니 나하고 친분이 깊은 너라도 노리는 거지.”
“......”
그제야 모든 진상을 깨달은 연우혁은 입을 떡 벌렸다.
지금 그러니까 당등하고 친하다는 오해 때문에 맹 판관의 목표가 되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앞의 두 가지 이유보다 이게 더 결정적인 것 같았다.
“...아니, 당 대협!”
“그래서 이렇게 금 통판을 소개해 준 거다. 잘 해봐라. 네 재주라면 분명 그깟 놈 하나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다.”
“......”
연우혁은 당등이 무당의 무공은 절대 익히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저렇게 악업을 쌓고 다니는데 어떻게 익히겠는가!
***
‘최악은 아니긴 하다.’
연우혁은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며 숙소로 향했다.
금 통판의 호감을 사고 손을 잡은 건 결과적으로 보면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위를 노리는 상황에서 친해질 관리가 필요했으니까.
연우혁이 노리는 정관 자리는 판관인 만큼 경쟁 상대가 아니라는 점도 좋았다. 이례적으로 공을 세워서 특별히 관직을 받는 포두들은 보통 판관 자리를 받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보통 수준으로는 안 된다는 점인데.’
말이 특별한 공이지, 상관들이 깎아갈 것까지 생각하면 거의 역모 정도는 막아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아니, 질보다 양이다. 쌓아나가면 언젠가는 터지겠지.’
관리들과 친분을 쌓고 꾸준히 일을 해결해서 위에 올리는 장계가 언젠가 터지길 기다린다. 연우혁이 보기에 가장 가능성 높은 방법이었다.
‘그런데 맹 판관이 날 노린다는 게...’
개인적으로는 맹 판관이 연우혁을 다른 포두 보듯 하찮게 여겨서 벌레 대하듯 대해주는 게 편했다. 상대가 방심한 사이 이것저것 준비할 수 있었으니.
하지만 당등이 말하는 걸 보니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았다. 한경에 소문까지 돌았으면 그냥 대충 넘어갈 가능성은 낮았다.
“!”
어두컴컴한 앞에서 두 명의 사람이 걸어오자 연우혁은 눈을 크게 떴다.
드넓은 한경에서 야간의 통금을 어기고 몰래 다니는 사람이야 여럿이지만, 저 둘은...?
“잠깐. 멈춰라!”
***
철갑창(鐵甲槍) 목기, 혈파두(血爬頭) 송단은 둘 다 이류 경지의 무림인이었다.
이들은 때로는 낭인으로 은자를 받고 문파의 편에 서서 싸웠고, 때로는 살수로서 은자를 받고 의뢰인이 죽여 달라는 자를 죽여줬다. 사파 무림에서는 이류의 경지만 되어도 불러주는 곳들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이번에 그들이 맡은 일은 살수였다.
최근에 소문이 자자한 명포두 놈 하나를 죽여 달라는 것이었는데, 한경 토박이가 아닌 둘은 포두가 어떻게 소문이 자자한 명포두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아는 포두란 건 으레 잔돈푼을 갈취하고 관리들 앞에서는 굽신거리는 소인배들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멀리서 인상착의를 들은 포두가 걸어올 때만 해도 둘은 일의 실패를 의심하지 않았다.
무공을 익혔다지만 아마 삼류일 터. 정말 잘 쳐봐야 이류 초입 정도였다. 산전수전 겪은 무인 둘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잠깐. 멈춰라!”
운 좋게 포두는 자기가 먼저 외쳤다. 접근하기 좋은 핑계라고 생각한 둘은 시선을 교환한 뒤 외쳤다.
“어이쿠, 포두님! 한 번만 봐주시오!”
“못 본 걸로 해주시면... 헤헤!”
송단은 자세를 낮추며 접근했다. 그러자 포두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야, 이 멍청한 놈들아! 뒤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눈치라고는 없는 놈들!”
“?”
둘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어둠 속에서 섬뜩한 소리가 났다. 암기가 발사되는 소리였다.
“컥!”
목기가 옆으로 나뒹굴었다. 낯빛이 파래진 걸 보니 제대로 맞은 게 분명했다. 송단은 웬 젊은 포두 놈한테 역으로 당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아서 눈을 부릅떴다.
‘대체 어떻게 눈치를!?’
“...놈!”
놀라면서도 몸은 익숙하게 움직였다. 붉은 파두(爬頭, 쇠스랑)가 튀어나오더니 살벌하게 날뛰었다. 검보다 긴 거리를 갖고 있는 기문병기는 처음 만나면 대응하기 쉽지 않았고 아하는 순간에 바로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파두를 휘두르는 순간 포두는 뒤로 쭉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송단은 기묘함을 넘어 기괴하기까지 한 그 움직임에 소름이 돋았다.
‘뭔...?!’
푹!
아까의 소리가 났다. 송단은 이를 악물고 가슴팍으로 암기를 받아냈다. 암기가 철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철판을 챙겨 넣은 보람이 있었다.
‘암기를 전문으로 익힌 놈이라면 접근해야 한다!’
송단은 혹시라도 모를 암기를 대비해 앞으로 돌진했다. 복잡하고 섬세한 맛은 없어도 우직하고 기세 좋은 보법이었다.
그 순간 포두 놈의 손에서 채찍이 튀어나왔다. 허공 위에 복잡한 선을 그리는 채찍에 송단의 움직임이 멈췄다.
푹!
넓적다리에서 격통이 올라왔다. 암기가 정확히 빈틈을 찌른 것이다. 송단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싸움 도중에 이런 느낌을 받기 쉽지 않았다.
자기보다 한 수 위의 고수가 자신을 꼭두각시 놀음하듯이 조종하고 있을 때.
바로 그럴 때 드는 느낌이었다.
‘말도 안 돼. 놈의 경지는 그 정도가 아니다!’
방금 채찍이 얽혔을 때 느꼈지만 상대도 일류는 아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왜 이런 느낌이 든단 말인가?
‘시간을 끌면 진다...!’
“크아악!”
송단은 고함을 지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포두 놈은 아까의 기묘한 보법으로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퉁!
아까처럼 옷 안에 넣은 철판에 암기가 부딪쳤다. 송단은 암기 하나 정도는 더 맞을 각오로 보법을 뻗었다. 보아하니 독은 없었다.
채찍이 날아들었다. 송단은 자기가 가진 강한 초식을 펼쳤다.
“흡!”
노발충관(怒髮衝冠)이 펼쳐지자 쇠스랑이 힘있게 터져 나오며 채찍을 휘감았다. 송단은 쇠스랑을 순간 놓아버렸다.
“죽어라!!”
송단은 암기에 채찍을 쓰는 걸 보니 가까이 붙으면 권법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붉은 기운이 번쩍 올라왔다. 가슴팍에서 올라오는 강한 충격에, 송단은 이 움직임 또한 유도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이런 곳에서... 포두로 변장한... 마두를... 만날 줄이야...”
“......”
“이름이... 뭐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송단은 그 또한 받아들였다. 숨은 마두 놈이 뭐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보통 놈은 아닐 터. 패자에게 이름을 말해주지 않아도 이상할 게 아니었다.
“곧... 한경에도... 피바람이... 불겠군... 이런 마두가 있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