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두 연우혁 (5)
두 낭인이 완전히 쓰러지고 나서야 연우혁은 깊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마두로 오해받은 게 어처구니가 없긴 했지만 지금 그걸 느끼지 못할 만큼 긴장한 상태였다.
‘내가 판관을 얕봤군...!’
지금 연우혁에게 살수를 보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망설이지 않고 살수를 보내다니. 컴컴한 밤이라 하더라도 한경 한복판인데 보통 배짱이 아니었다.
아무리 탐욕스럽고 연달은 실수를 저지른다 하더라도 한경의 관리로 오래 일한 만큼 그 집요함은 얕봐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운이 좋았다.’
서로 이류의 경지인 만큼 이 대 일로 싸웠다면 연우혁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도 꽤 노련한 낭인들이었으니.
속임수로 한 명을 꺾고, 다른 한 명을 연우혁이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영안으로 놈을 꿰뚫어본 덕분에 암기와 채찍에 정신이 팔리게 만들 수 있었다.
만약 놈이 연우혁을 얕보지 않고 성급히 파고들지 않았다면 싸움이 훨씬 길어졌을 것이다. 연우혁의 무공은 기다리거나 물러나면서 싸우는 것에는 유리했지만 자기가 직접 달려드는 것에는 불리했다.
싸움 방식이 좀 마두 같긴 했지만...
‘이기는 게 중요하지. 무슨.’
연우혁이 소모된 내공을 점검하고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앞에서 잘 정제된 살기가 느껴졌다.
아까 두 낭인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수의 살기였다.
“!”
연우혁은 영안을 열고 이를 악물었다. 새로 걸어오고 있는 살수는 연우혁보다 훨씬 위의 경지였던 것이다.
일류 말입을 넘은 절정 직전의 경지. 이 정도 무공 차이는 아무리 영안과 속임수가 있어도 메우기 힘들었다.
“...고인께서는 누구십니까?”
상대는 대답하지 않고 두 낭인을 둘러보더니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머리가 붉고 눈빛이 이글거리는 모습에서 살수가 극양(極陽)의 무공을 익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뭐야. 포두가 이 둘을 죽일 줄은 몰랐는데?”
무시하는 모습에서 연우혁은 대화로 해결하는 걸 포기했다. 상대는 무조건 연우혁을 죽일 생각이었다.
‘남은 내공은 칠 할 정도. 잔수작은... 오히려 위험하다.’
구궁수전(九宮袖箭)은 편리한 암기였지만 결국 기관의 힘 이상은 내지 못했다. 저런 고수 상대로 썼다가는 대번에 빈틈을 잡혀서 역으로 당할 수 있었다.
백사격각편도 마찬가지였다. 채찍은 병기 중에서 가장 저지력이 부족한 편에 속했다. 자기보다 한 단계 이상의 고수한테 잘못 썼다가는 그대로 격살당했다.
위국권법이 상승의 권법이지만 한 단계 이상의 고수를 이기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고...
‘경공이다. 전력을 다해 도망친다.’
연우혁은 백면신투를 믿어보기로 했다. 갑자기 백면신투가 남궁세가에서 뒤진 게 생각나긴 했지만 그건 경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서 아니겠는가.
“...!”
영안을 펼치던 연우혁은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아찔해졌다. 눈앞의 살수만큼의 고수는 아니었지만, 한 명이 더 있었던 것이다. 연우혁의 발을 한 번 묶기에는 충분했다. 고수 상대로 발을 한 번 묶이는 건 치명적이었다.
‘미친 판관 놈. 살수 네 명을 날 죽이려고 고용했다고!?’
믿기지가 않는 낭비였다. 살수는 연우혁의 생각을 모르는지 오만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긴 소문도 믿기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재주가 몇 개는 더 있었나본데. 이 둘이면 충분할 줄 알았더니...”
“죄송합니다. 대주님.”
뒤에 있는 자의 말에 연우혁은 상대가 꽤 규모 있는 조직이라는 걸 느꼈다. 강호에 대주가 따로 있을 만큼 규모가 큰 살수 조직이 많지 않은 것이다.
“젊은 포두 놈아. 네놈의 재주는 인정해주마. 하지만 나도 판관 놈하고 친해져야 하는 만큼, 둘 죽였다고 물러날 수가 없구나. 나 참. 괜히 아쉬운 놈 두 명만 죽였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살수가 가볍게 출수했다. 손가락 끝에서 핏빛 기운이 이글거렸다. 그러나 연우혁은 이미 그 움직임을 읽고 있었다. 쌍사보를 극성으로 펼치며 뒤로 움직이자 지법은 허공을 갈랐다.
“!”
붉은 머리의 살수는 놀란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물론 삼성(三成) 정도의 공력으로 지법을 펼쳤다지만 이렇게 쉽게 빠져나갈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물러나는 움직임만 놓고 보면 자신의 보법보다 더 복잡하고 묘한 상승의 무리(武理)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포두 놈이 이런 보법을 어떻게 이 정도까지 익혔지?’
무림에서 자기보다 높은 경지의 무인을 만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자기보다 낮은 경지의 무인이 더 어려운 무공을 익힌 모습을 보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보통 명문정파에서 애지중지하는 천재 후기지수한테나 볼 수 있는 무재를 저잣거리 포두에게서 보게 될 줄이야?
“그거 참... 기괴한 보법인데. 정파 놈 같진 않고. 어떤 마두 놈 보법이지? 처음 본다.”
“우연히 얻은 비급을 익혔을 뿐입니다.”
“...!”
스승도 사문도 없이 비급으로 익히다니.
말도 안 되는 재능에 살수의 눈동자가 커졌다.
“채찍이나 암기를 쓸 줄 아는 것 같던데. 써봐라.”
연우혁은 넘어가지 않았다. 눈앞의 살수는 재주를 자랑한다고 해서 봐줄 놈이 아니었다. 힘을 비축하고 내공을 회복해야 했다.
“대주님. 사람이...”
“알아, 알아.”
살수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채찍이나 암기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날 만난 걸 불운으로 여겨. 강호는 불운한 자에게는 자비가 없다.”
십성의 공력이 담긴 지법이 출수할 준비를 마쳤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유형화 된 기운이 손가락 끝에서 피어올랐다.
그 순간 살수는 연우혁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갑자기 증가하는 걸 느꼈다. 일반적인 무공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었다.
‘술법?!’
술법에 놀라워하는 순간 살수는 자신 앞까지 비도가 날아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놀랍게도 포두 놈이 빈틈을 정확하게 꿰뚫고 비도를 던진 것이다!
고수가 된다 하더라도 무공의 약점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무공은 완전하더라도 익히는 사람은 불완전했기에 초식과 초식, 호흡과 호흡, 운기와 운기 그 사이에 틈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수가 되어갈수록 그 틈은 바늘구멍처럼 좁아지고 자신보다 고수의 빈틈은 쉽게 간파하기 어려운 법.
‘운인가!? 아니, 아니다! 어느 놈이 운에 목숨을!’
이 모든 생각과 함께 살수는 몸을 움직였다. 비도는 믿기 힘들 정도로 빨랐지만, 하필이면 상대를 잘못 만났다.
살수의 보법 또한 피하는 것에는 무림에서 일절로 꼽히는 보법이었던 것이다.
살수의 허리가 부러질 것처럼 꺾이고 발이 이상하게 뒤틀렸다. 그러나 효과는 확실했다. 순간적으로 비도의 궤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비도가 허공에서 방향을 바꿨다.
처음부터 휘게 던진 게 아니었다. 분명히 살수가 움직이는 걸 보고 바뀐 것이었다. 이 어느 암기술에서도 본 적 없는 모습에 살수는 고서에서 본 술법을 떠올렸다.
‘허공섭물(虛空攝物)?!’
손을 대지 않고도 물체를 움직이는 도사들의 술법.
그러나 저잣거리 포두가 익힐 만큼 흔한 술법은 아니었다. 애초에 살수 또한 허공섭물을 본 게 처음이었다.
이런 곳에서 만난 포두 놈이 천재적인 무공의 자질을 갖고 있고, 또 무림에 극히 희귀한 술법까지 쓸 줄이야 누가 상상했겠는가?
푹!
비도가 살수의 가슴팍에 박혔다. 살수는 덤덤하게 물었다.
“왜 달려오지 않지? 날 죽이고 앞으로 도망치려고 한 것 아니었나?”
“...보의(寶衣)를 뚫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얕았군.”
연우혁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내공이 고갈되고 진탕된 탓에 입 안에서 피 맛이 났다.
남두성군에, 현청벽사신공까지 사용해서 탈혼비도를 펼치고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의에 막힌 탓에 공격이 얕았다는 게 이미 느껴졌다.
보의를 입고 있단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단단한 줄이야.
“맞아. 한 치만 더 깊었다면 네 승리였을 거다.”
살수는 점혈로 가슴팍의 피를 막으며 비도를 뽑았다. 무림의 보물 중 하나인 적보의(赤寶衣)에 구멍이 뚫렸음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치솟진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포두에게 경외심이 들었다.
“네 이름을 기억해주마. 연우혁. 나는 살막(殺幕)의 대주, 혈지혈살(血指血殺) 적조다. 네게는 원한이 없다. 원래라면 아까 낭인 두 놈 뒤졌을 때 끝났어야 할 일이지. 하지만 고분고분한 판관 놈이 필요한 만큼...”
“판관이 왜 필요한 겁니까?”
“사람을 하나 찾아야 하는데, 꼭두각시로 부릴 만한 관리 놈이 흔치 않지.”
뒤에 있는 부하가 그만 떠들라고 눈빛으로 간청했지만 적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돼지 같은 관리 놈 때문에 이런 상대를 죽이는 것도 꺼림칙한데 이 정도는 말해줄 수 있었다.
“그 사람이 혹시 장로의 손녀입니까?”
“...?!”
적조도, 적조의 부하도 놀라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포두는 기력이 떨어진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적조를 보며 말했다.
“맞는 모양입니다.”
“어, 어떻게...? 잠깐, 설마 어디 있는지도 아느냐?!”
“예.”
“어디, 어디 있지!? 말해라!”
연우혁은 쓰러지고 싶은 와중에도 영안으로 두 살수를 확인한 다음 당당하게 말했다.
“한경의 포두는 살수의 협박에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소!”
“......”
“......”
* * *
적조의 부하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대주에게 물었다.
“대주님. 대체 왜 저 포두 놈을 죽이지 않으신 겁니까?”
아까 포두가 갑자기 ‘한경의 포두는 살수의 협박에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소!’라고 외쳤을 때만 해도 부하는 포두가 그냥 미친 줄 알았다.
그러나 적조는 부하보다 훨씬 영리했다. 포두가 저렇게 외치자마자 매우 공손하게 자세를 갖추고 다시 읍을 했다.
-살수라니, 이 적 모는 평생 의롭게 살아오진 않았지만 살수라고 불릴 만큼 악하진 않습니다. 분명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 포두님.
-그렇소?
-예. 보십시오. 저나 제 부하가 포두님께 손끝 하나 댄 게 있습니까?
-이 낭인들은?
-처음 보는 무뢰배들입니다. 치워라! 감히 포두님을 습격한 놈들이다!
-일단 쉬고 싶군.
-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지금 설마 내가 도망칠까 의심하는 건가?
-아닙니다! 어찌 그런 오해를... 그저 누군가 포두님을 해하려 할까 걱정되었을 뿐입니다. 혹시 불쾌하셨다면 저희는 여기 가만히 서있겠습니다.
-음. 아니다. 믿도록 하지.
그렇게 연우혁은 당당하게 두 살수의 호위를 받아가며 포두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오늘 일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금침에 들어가서 잠에 빠져들었다.
그걸 또 적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밖에서 서서 기다리다니. 적조의 부하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포두를 왜 죽여야 하지?”
“예? 판관 놈을 협박하기로 하셨잖습니까? 포두가 살아있으면 판관 놈이 협박에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판관 놈을 왜 협박해야 하지?”
“그래야 사람을 찾지 않겠습니까? 장로님의 따님께서는 분명 관리 놈과 도망치셨고...”
“그런데 저 포두가 안다잖아?”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장로의 손녀를 찾고 있다는 것도 아는데, 그 위치를 안다는 건 왜 못 믿지?”
적조의 말에 부하는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그건 그랬다.
“아니, 그런데... 살수의 말에는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잖습니까.”
“그래서 살수가 아니라 손님으로 찾아왔잖아.”
“!”
부하는 그제야 적조가 왜 저러는지 깨달았다.
그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그런 뜻이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기가 뒤지기 직전인 상황에서 오히려 허세를 부리다니.
“미친 놈 아닙니까!?”
“재주 있는 자는 원래 광오한 법이야. 그리고 그럴 자격이 있지. 위치만 안다면.”
적조는 기대가 된다는 듯이 말했다. 포두가 자는 사이 주변 사람들에게 몇 번 물어봤는데, 정말로 재주가 신통했다. 소문이 헛소문이 아닌 모양이었다.
적조로서도 판관 놈보다는 저런 포두 놈과 어울리는 게 훨씬 덜 찜찜했다. 적조는 가슴팍에 난 상처를 어루만졌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꽤나 깊은 상처였다.
“포두 놈이 남긴 겁니까?”
“그래.”
“대체 어떻게...”
“쾌(快)의 묘리에 모든 걸 쏟아 부은 비도술이더군. 무학의 천재라면 가능하지.”
“그 보법이 말입니까?”
적조의 부하는 뜨악해했다. 같은 마두라 하더라도 마공을 수준 있게 익힌 마두가 있고 저잣거리에서 온갖 삼류 무공을 잡다하게 익힌 마두가 있다면, 포두는 전형적인 후자였다. 채찍에 암기에 그런 보법이라니.
그러나 적조는 씩 웃었다.
“네놈이 직접 상대하지 못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다. 뒤로 피하는 걸 보니 보통 상승의 무공이 아니었지. 네가 없었다면 놓쳤을 수도 있다.”
“무슨... 아닙니다! 대주님께서 그러실 리가...”
방 안에서 연우혁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날이 밝고 포두가 일어난 것이다.
“연 포두님. 기침하셨습니까?”
“그렇소.”
연우혁은 세안하더니 곧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적조의 부하는 당황해서 외쳤다.
“포두... 님, 어디 가십니까?”
“포두가 일하러 가지 어디 가겠소?”
적조는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손님으로 부탁하러 왔는데 허드렛일이라도 부탁합니다.”
“안 그래도 시킬 생각이었소.”
‘저 미친 포두 새끼가...?!’
적조의 부하는 전율했다. 살막의 무인들이 이 모습을 보면 단체로 주화입마에 빠져들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