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53)화 (53/107)

포두 연우혁 (6)

부하의 충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조는 역용술을 펼쳤다. 붉은 머리칼의 색이 변하고 얼굴의 골격이 줄어들었다. 번쩍이는 눈빛과 힘 있는 목소리도 변했다. 어느 누구도 무공의 고수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겉모습이었다.

“그럼 따라오시오.”

“예.”

연우혁은 살막의 두 고수를 거느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구역의 안가로 향했다.

물론 머릿속은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오가고 있었다.

‘다행히 아는 사건이다. 그러나...’

어젯밤은 여러 불운이 겹치던 와중에 하나의 행운이 목숨을 구한 꼴이었다.

하필이면 연우혁을 죽일 정도의 고수가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일단 목을 베려고 들 줄이야. 원래대로였다면 살막에서 고용한 낭인 둘이 죽었을 때 끝났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연우혁에게 천운이 따라줬다. 살막의 고수 둘이 찾는 장로의 손녀가, 다행히 연우혁이 아는 사건의 당사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거, 알려줘도 되는 게 맞나?’

연우혁의 기억이 맞다면 이 사건은 웬 저택에서 십수명이 넘게 죽은 사건이었다.

단서를 찾고 상황을 추측해가다보면 예전에 살막 장로의 딸이 관리와 사랑에 빠져 도망쳤는데, 살막 장로가 무슨 심정의 변경이 있었는지 부하를 보내 자기 손녀를 찾기 시작했다는 사정이 나왔다.

살수들은 강제로 데리고 가려고 하고 저택의 사람들은 막으려고 했으니 피바람이 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근처 안가에 숨은 살수를 찾아서 붙잡는 걸로 이 사건은 끝났었다.

‘하긴 그보다는 다른 것부터 먼저 생각해야 한다.’

살막의 고수들이 찾던 사람을 찾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또 이들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사실 앞의 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이보시오. 적 대협. 사람을 찾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

“하늘에 맹세코 조용히 사라져 포두님의 일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적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저 대답에 번민하고 고민했겠지만 연우혁은 달랐다. 영안으로 본 연우혁은 저 대답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저렇게 신의를 지키지 않을 무림인이었다면 어제 다르게 행동했을 터.

앞선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이제는 이들을 어떻게 이용할지 고민해야 했다.

“포두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이오?”

“어제 사용하신 술법은 무당의 술법이었습니까?”

노련한 살막의 고수인 만큼 적조는 연우혁이 사용한 허공섭물을 보고 무당의 향취를 느낀 모양이었다.

어차피 부정해봤자 별 의미 없었기에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무당의 진인께 사사받았소.”

영기를 통제하고 온몸의 기운을 외부의 삿된 침입 없이 굳건하게 갖추는 심법인 현청벽사신공은 내공을 빠르게 쌓는 심법은 아니었지만 그 효능은 신비하기 그지없었다.

그 효능 중 하나가 바로 심법에 따라 내공을 운기함으로서 자연스럽게 술법인 허공섭물을 펼치는 것이었다.

청허진인은 현청벽사신공이 도사의 기운을 엄하게 통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변의 기운까지 통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더욱 정순한 내공을 쌓는다면 이기어검과 같은 경지를 펼칠 수 있다고 말이다.

물론 연우혁은 그런 터무니없는 경지까지는 바라보지도 않았다. 어느 세월에 그런 걸 하겠는가. 중요한 건 당장 자신의 무공에 어떻게 녹여내는가였다.

어제처럼 암기술에 한 번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허공섭물이 그리 강한 힘은 아니더라도 암기술과 결합한다면 처음 보는 상대는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절초였다.

“과연. 포두님께서 무당의 속가제자 출신일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다. 얼마나 배우셨습니까?”

“속가제자 출신이 아니오. 며칠 배우지도 않았고.”

연우혁의 솔직한 말에 적조가 피식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런 걸로 하지요.”

“......”

솔직하게 말해줬는데도 오해를 받자 연우혁은 그냥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한경에는 생각보다 많은 일이 일어난다오. 그리고 포두는 포쾌들을 부려서 그 일들을 맡아서 해결해야 하지. 둘이 잠깐 포쾌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적조는 흔쾌히 허락했다.

허드렛일도 할 생각이었는데 포쾌 일이라면 훨씬 나은 편이었다.

적조의 부하는 똥이라도 밟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포쾌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게 믿기 힘들 만큼 괴로운 모양이었다.

“잘 됐군. 오 포쾌!”

연우혁의 부름에 오 포쾌가 후다닥 달려왔다. 처음 보는 두 명의 모습에 오 포쾌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자들은 누구입니까?”

“새로 포쾌 일을 할 자들이다. 오늘 하루 같이 일하도록.”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참아라. 포두도 우릴 의심할 수밖에 없다.

부하의 항의에 적조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무림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서로 믿는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무공의 경지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믿는 건 더더욱 어려웠다.

상대방이 배신한다면 어떡한단 말인가?

그렇기에 믿을 수 있는 상대라는 걸 확실히 보여줘야 했다. 저 포두가 포쾌 일을 억지로 시키는 건 살수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믿을 수 없는 자라면 이런 모욕에 바로 분노를 터뜨리며 사라질 테니까.

-저는 놈이 그냥 저희를 골려주려는 줄 알았습니다.

-그건 단순한 자들의 생각이다. 저런 지혜를 가진 자가 단순히 골려주려고 이러겠나?

적조의 부하는 불만스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포두가 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지만 적조의 말에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포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 포쾌가 은밀하게 말했다.

“뭐지?”

“새 포쾌들을 고용하는 건 신중하셔야 합니다.”

“신원 때문인가? 걱정하지 마라. 누군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그게 아닙니다! 신원이 무슨 상관입니까. 저 자들이 도적이든 살수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포쾌의 녹봉을 나눠주는 건 포두님 아닙니까! 일손이 적다고 포쾌를 늘리는 건 최악의 결정입니다. 숙부님 밑에서 배웠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오 포쾌는 무림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중요한 이야기가 맞긴 했다. 은자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얼마나 되겠는가.

때로 몇몇 서투른 포두가 일을 확실히 해결하겠다는 욕심 하에 포쾌를 많이 고용했다가 끔찍한 결말을 맞곤 했다. 바로 거덜나는 것이었다.

“...그렇군. 하지만 오 포쾌. 저 둘은 사실 녹봉을 받지 않는다.”

“예!?”

“그냥 포쾌로서 일할 수만 있어도 영광이라는군.”

“미친놈들인가...?!”

오 포쾌는 경악했다.

아무리 포쾌가 부수입이 두둑한 관직이라지만 녹봉을 받지 않고 일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제가 놈들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아주 잘 설명해주겠습니다.”

“그래. 오 포쾌만 믿네. 지금 해결해야 할 일들이 뭐가 있지?”

양 포쾌가 재빨리 보고했다.

“석회를 섞어서 팔던 소금장수 금가 놈을 기억하십니까? 오늘 아침에 잡으러 갔는데, 이미 도망치고 사라졌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쉽지.”

적조는 무심코 대답했다.

누군가를 쫓는 건 강호에서 포쾌만 하는 일이 아니었다. 살수 또한 직업적으로 누군가를 쫓는 일이 잦았다.

“어제까지 있었다면 아마 통금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그리고 한경에서 가장 먼저 열리는 문은 남문이지. 남문 근처의 구사(廏舍, 마구간)에 가보자고.”

“...!”

“이, 이봐. 눈치가 없나? 어디 신참이 입을 먼저 열어?”

다른 포쾌들이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자 오 포쾌가 다급히 둘에게 말했다.

“내가 따끔히 훈계할 테니 자네들이 이해해주게!”

“으음. 오 형이 그렇게 말한다면...”

한경에서 잔뼈가 굵은 오 포두를 숙부로 둔 오 포쾌는 다른 포쾌들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워낙 발이 넓은 사람 아니던가.

적조는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이거 미안합니다. 포쾌로 일해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의견은 맞지 않습니까?”

“으음. 확실히...”

포쾌들은 적조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이치를 따져봤을 때 틀린 구석 하나 없었던 것이다.

“아니. 서쪽으로 가라. 오 포쾌. 여기 두 새 포쾌를 데리고 운하로 가도록. 거기 가면 평소 소금장수와 친하게 지내던 어부들이 있을 텐데, 그 어부들을 붙잡고 소금장수를 어디에 숨겼냐고 물어봐라. 그리 버티진 못할 거다.”

“예!”

“???”

오 포쾌는 바로 달려 나갔다. 적조와 그 부하는 남아서 더 묻고 싶었지만 오 포쾌가 나간 탓에 그러지 못했다.

‘대체 어째서 서쪽으로 가란 거지?’

“왜 서쪽으로 가란 걸까요?”

“글쎄. 전혀 모르겠다.”

“혹시 놈이 우릴 골려주려고...”

“그건 아니라고 말했잖아?”

“하지만 그것 말고는 짐작가는 게 없습니다. 아니, 어부들이 소금장수를 숨기고 있을지 어떻게 압니까?”

“소문을 들었을지도...”

“어제 밤에 도망친 놈이잖습니까. 그리고 저 포두는 어제 저희와 드잡이질을 했는데 소문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적조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번에는 부하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대체 왜 서쪽으로 가라고 한 걸까?

“이보시오. 오 포쾌님. 혹시 오 포쾌님께서는 왜 서쪽으로 가라고 하신지 아시오?”

“물론이지.”

“!”

적조와 부하는 놀랐다.

“포두님께서는 앉아서 천 리 밖을 보시기 때문이다. 빨리 따라와라. 이 둔한 녀석들아. 연 포두님께서 포쾌로 일하실 때 한 번도 너희처럼 미적거린 적이 없었다.”

“......”

“......”

무슨 마교도나 혈교도마냥 광신해서 떠드는 포쾌의 모습에 적조와 부하는 혀를 내둘렀다.

“뭘 어떻게 해결했길래 저러나?”

“제 생각에는 억지로 범인을 만드려는 걸지도 모릅니다. 이제 와서 잡기에는 늦었으니 아무나 붙잡고 책임을...”

“찾았다!!!”

오 포쾌는 벌벌 떨며 작은 뱃전에서 기어 나오는 소금장수의 멱살을 붙잡고 외쳤다.

그 믿을 수 없는 모습에 둘은 눈동자를 크게 부릅떴다.

* * *

포쾌들이 밀린 일을 하는 동안 연우혁은 내상을 다스리고 내공을 회복했다.

하해불택신공으로 내공을 쌓고 현청벽사신공으로 몸을 지키는 단단한 껍질을 만든다.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일류의 벽을 깨겠다!’

살수들을 내보낸 건 결정을 내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서도 있었지만 무공의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어제 그 복잡했던 싸움이 많은 깨달음을 주었던 것이다.

“포두님. 붙잡아왔습니다!”

“잘했다. 둘은 이리 오도록.”

연우혁은 둘을 안으로 들여보낸 다음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다시 존대하며 말했다.

“적 대협. 대협을 믿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면 사람을 찾아드리겠습니다.”

“좋은 결정이다. 하지만...”

“!?”

바로 수락할 줄 알았던 적조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아까 그 소금장수는 대체 왜 서쪽으로 잡으러 간 거지? 혹시 무슨 소문이라도 들었던 건가?”

“......”

연우혁은 지금 그게 중요하냐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적조는 매우 진지했다.

“이봐. 연 포두. 이것만 듣고 결정해도 늦지 않잖아.”

“따로 소문을 들은 게 아닙니다. 그 소금장수는 남문 근처에 사는 사람이라, 한경에서 빨리 도망쳐야 하는 사람들은 남문 근처로 모이는 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

적조와 부하는 놀랐다.

“그럼 서쪽은?”

“소금장수가 소금에 섞은 석회는 조개껍질을 갈아서 만든 것이니, 한경 서쪽 강을 타고 올라오는 어부들이 구해다줬을 겁니다. 소금장수가 붙잡히면 그들도 책임을 물을 테니 배에 숨겨줬을 테지요. 좀 잠잠해지고 추적이 실패하면 쉽게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적조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본능적으로 확신이 들었다.

지금 자신이 찾으려는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인재는 바로 여기 이 포두밖에 없다고!

“부탁을 말해라. 무엇이지?”

“저를 죽이려고 한 사람을 죽여주십시오!”

연우혁은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제 일이 여기까지 온 이상 판관은 확실하게 제거하고 가야했다.

내버려뒀다가는 쌓은 재산과 인맥으로 무슨 개짓거리를 할 지 몰랐다.

“그래. 그럴 것 같았다. 이봐!”

“예!”

적조의 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해라.”

“존명!”

부하가 나가자 적조는 연우혁에게 말했다.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놈은 누군가 자기를 죽일 거라고 상상도 못하고 있을 테니까. 저 녀석이 확인하고 돌아오는 대로 놈을 죽이러 가마. 조용하게 말이다.”

반 시진 정도 지나고 나서 부하가 다급히 돌아왔다. 적조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벌써 다 확인했어? 그렇게 허술하더냐?”

“놈, 놈이 저택에 무림인을 잔뜩 고용했습니다!”

“......”

아직 의뢰가 실패한 것도 모르는 판관 놈이 무림인을 고용할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적조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판관은 지금 의뢰를 성공한 살수도 끝장내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탐욕스러운 관리들 중에서도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배신하는 놈은 흔치 않았다.

“하, 하하...! 하하하! 이런 미친 놈 같으니. 겁이 없어도 얼마나...!”

“......”

웃던 적조는 연우혁이 별 말 없이 쳐다보자 조금 민망해졌는지 대답했다.

“...바로 죽이지는 못하겠군.”

‘그냥 아까 당문 무인들 부를 거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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