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판관요괴저택 (6)
아쉬워하던 연우혁은 입맛을 다시며 정신을 차렸다.
원래 무림에는 각자에게 잘 어울리는 역할이 있는 법이었다. 누군가를 찾거나 소문의 진위를 확인할 때에는 개방에게, 술법이나 도사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무당파에, 지랄염병을 떨 때에는 당문에게...
그리고 누군가를 죽일 때에는 살수한테 부탁하는 게 맞았다. 아무리 친분이 있다 하더라도 정파 무인들과 판관을 죽이는 걸 공모할 수는 없었으니까.
“저런 관리 놈이 흔치는 않은데 말이야.”
“맹 판관이 탐욕스럽고 집요한 자긴 하지만 멍청한 사람은 아닐 텐데, 살막의 살수 상대로 저런 짓을 해도 됩니까?”
무림의 의뢰인들이 살수들 상대로 사기를 치지 않는 것은 그 뒤에 돌아올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설령 운 좋게 눈앞의 살수는 잡아서 죽인다 하더라도 그 살수의 동료와 동료들이 언제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르는 것이다.
“음. 사실 판관은 우리가 살막 출신인 걸 모르고 있어.”
“...?”
“잘 생각해봐라. 포두 하나 죽이려고 살막에 의뢰를 넣진 않지.”
한경의 고관으로서 누군가를 죽이려는 의뢰를 넣는 건 생각보다 부담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무림에서도 악명이 있는 살수 조직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면 모를까, 자신을 협박하거나 보복할 수 있는 무림의 조직에게 관리가 쉽게 의뢰를 넣진 않았다.
“이번 일은 원래 주변에 적당한 낭인을 찾아서 해치우려던 일이었어. 판관 놈 생각에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적조는 적당한 낭인을 준비한 뒤 판관한테서 흘러나온 의뢰를 받게 했다. 의뢰가 끝난 뒤 판관에게 찾아가 살막의 이름으로 협박하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살막의 이름으로 서신을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부하의 말에 연우혁과 적조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역효과가 날 겁니다.”
“연 포두 말이 맞아. 지금도 저러는 놈인데 겁먹으면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하기 힘들지. 사실, 이럴 때 가장 좋은 해결책은 시간인데...”
지금이야 살수를 깔끔하게 죽이려고 무림인들을 불렀다지만, 일이년 정도 지나면 판관도 슬슬 경계심이 사라지고 식객으로 불러놓은 무림인들이 성가실 것이다.
“시간 주면 저한테 살수가 몇 명은 더 올 겁니다.”
불러놓은 무림인들도 있겠다, 판관 성격에 연우혁이 멀쩡하면 확실하게 처리하겠다고 살수 두셋 정도는 더 고용할 수도 있었다.
살수에게 일을 시킨 다음 저택에 불러서 무림인들로 잡아버리면 얼마나 속이 시원하겠는가.
“맞는 말이다. 자다가 칼을 맞을 수도 있고.”
“대주님.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건방진 관리 놈에게 살막의 두려움을 알려주겠습니다. 무림인들이 있다고 해봤자 놈의 살갗이 제 검을 막진 못할 겁니다.”
부하가 비장하게 말하자 연우혁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적 대협. 이 분 대체 왜 이러십니까?”
“내가 사과하지.”
“?!”
적조의 부하는 당황했다. 적조가 안쓰럽다는 듯이 부하를 보며 설명했다.
“이봐. 생각해봐. 대낮에 한경 한복판에서 관리가 칼을 맞고 죽으면 어떻게 되겠어?”
“절대 들키지 않게...”
“그래. 우리야 들키지 않게 도망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여기 연 포두는 판관과 원한이 있단 말이야. 괜한 의심을 받을 수 있다고. 무력으로 돌파해서 난자할 게 아니라 조용히, 들키지 않게 죽여야지.”
“죄, 죄송합니다.”
적조는 고민에 잠겼다.
마음 같아서야 저택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돌파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일이 너무 커졌다. 어느 정도의 고수를 불렀는지는 몰라도 판관 정도면 발이 넓을 테니 꽤 괜찮은 문파의 고수도 불렀을 가능성이 높았다.
설령 돌파한다 하더라도 살막의 무공인 걸 들키는 순간 살막에도 보복이 돌아오리라. 나중에 포두도 곤란해질 수 있고...
‘어렵다.’
흔히들 무림에서 살막의 살수라고 하면 황제의 목도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 갖고 올 수 있을 거라고 두려워했지만, 그건 살막에서 퍼뜨린 소문에 불과했다.
살수라고 해서 다른 고수를 뛰어넘는 특별한 재주가 있지는 않는 것이다. 살수는 그저 남들보다 좀 더 은밀한 암살에 특화된 무공을 익힌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뛰어난 살수는 무공보다는 다른 자질이 더 뛰어났다. 인내심이나 끈기, 집요함이나 독기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자질이었다. 뒷간에서 반 년 동안 버티면서 상대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 있어야 뛰어난 살수인 것이다.
그런 모든 것들이 막힌 상황이라면 살수도 힘을 쓰기 어려웠다. 무림인들이 잔뜩 대비하고 있는 저택에 들어가 조용한 방법으로 판관의 숨통을 끊어야 한다니.
적조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음. 미안하군. 연 포두. 방법이 당장 안 떠오르는걸. 하다못해 놈이 나오기라도 하면 모를까, 파직당해서 저택 안에 있지? 접근할 방법이 마땅치가 않아. 혹시 좋은 계책이 없을까?”
“......”
연우혁은 어이가 없었다.
사람 죽일 계책을 살수들이 짜내야지 그걸 자신한테 묻는다고 해서 뭐가 나온단 말인가?
적조의 부하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무리 포두가 명포두여도 그렇지 저택 안에 있는 판관을 죽일 계책을...
“포두님!”
밖에서 사 포쾌가 연우혁을 불렀다. 연우혁은 잠깐 대화를 멈추고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그게 말입니다.”
사 포쾌는 우물쭈물하는 표정이었다. 연우혁은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편히 말해라. 어떤 일이든 들어야 계책을 세우지 않겠느냐.”
“지금 문제가 생겼는데, 하필이면 그게 맹 판관 저택이랍니다.”
사 포쾌가 우물쭈물 한 것도 당연했다.
원래 맹 판관의 성질이 더러운 만큼, 판관의 저택에 방문하는 포쾌들은 호된 꼴을 당할 각오를 해야 했다. 일 때문에 찾아가도 그런데 저택에 문제 생겨서 찾아왔다고 하면 더 분노를 사리라.
게다가 연우혁의 경우는 더 위험했다. 최근 한경에서 칭송이 자자하지 않은가. 맹 판관이 그런 부하 포두를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었다.
저택에 방문했다가 하인들한테 두들겨 맞을지도...
“제가 다른 구역의 포두에게 연통을 보내겠습니다. 이건 연 포두님께서 가시면 위험합니다.”
“무슨 일이 터진 거지?”
“그, 거기 모인 무림인들끼리 서로 싸웠답니다. 뭔... 옥벽(玉璧)이 사라졌다고...”
“그렇군. 내가 가겠다.”
“예!? 위험합니다! 맹 판관 그 잡놈의 성질머리가 얼마나 더러운지 모르셔서 그러시는 겁니다!”
사 포쾌가 기겁하자 연우혁은 대충 둘러댔다.
지금 들은 사건이 무슨 사건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이건 절대로 넘길 수 없었다.
“녹을 받는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일 뿐.”
“...!”
“걱정해줘서 고맙다. 사 포쾌. 자네밖에 없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부하가 적조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런 계책이 어디 쉽게 나오겠습니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죽이는 수단까지 고집을 부리시면 안 됩니다. 무림인들도 많으니 놈들이 대충 뒤집어 쓸 겁니다...”
“계책이 떠올랐습니다.”
“!?”
부하는 기겁해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적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봐라. 이 포두의 지혜라면 뭔가 나올 줄 알았지.”
“아, 아니. 살수도 아닌데 어떻게...?!”
***
어지간해서는 자신 있게 계책이라고 말하지 않는 연우혁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은 조금 남달랐다.
잘만 풀리면 저택 안에서 소란스러운 난동이 벌어지는 것이다.
‘옥벽 사건이면 분명...’
기서 하씨세가, 진검보(眞劍堡), 적원방(赤猿幫).
이 세 세력에서 나온 무인들이 서로 맞붙은 사건이었다.
사실 무림인들이 무슨 합리적이고 냉철한 이유가 있어서 매일 다투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술 마시고 어깨 부딪쳐서 칼 휘두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 옥벽 사건도 그런 부류에 들어갔다.
하씨세가의 직계 무인 중 하나가 가문의 보물인 옥벽을 꺼내 자랑하다가 그만 옥벽이 사라진 것이다.
하필이면 그 때 옥벽을 돌려서 구경하던 이들은 진검보와 적원방의 무인들이었고, 하씨세가의 무인들은 당연히 옥벽을 찾기 위해 이들을 수색하고 싶어했다.
물론 진검보와 적원방의 무인들은 자신들의 체면과 자존심이 있는 만큼 그런 수색을 거절했다. 그들은 자기가 아닌 상대방을 수색하라고 강요했다.
말싸움은 점점 더 커지고, 서로 몸싸움으로 번지더니, 검을 뽑아들고 휘두르기까지...
‘조금만 내버려두면 바로 난동이 일어난다.’
무림인들의 성질이 워낙 난폭하고 거친 만큼 옥벽을 찾지 않고 조금만 내버려둬도 소란이 벌어질 거란 확신이 들었다.
“밖에서 기다리십시오. 분명 저택 안에서 무림인들끼리 크게 싸움이 벌어질 텐데, 그 때를 틈타서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
적조는 당혹스러워했다.
물론 이 포두의 계책을 듣겠다고 한 게 본인이긴 했지만, 이건 너무 뜬금없었던 것이다.
무림인들끼리 크게 싸움이 일어난다니.
이건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혹시 싸움을 붙이려는 건가? 모인 놈들이 바보가 아닐 텐데 말 몇 마디에 놀아날 수가 있나?’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적조의 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우혁은 당당하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살수는 포두를 믿고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지금 저택에 들어오시면...”
“연 포두다. 저택에 문제가 생겨서 왔다.”
“?!”
저택의 하인은 연우혁의 이름을 듣고 기절할 듯이 놀랐다.
“포, 포두님.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어째서지?”
“아시지 않습니까? 주인어른께서 불같이 노하실 겁니다. 그냥 빨리 돌아가십시오.”
주인어른의 더러운 성질을 알고 있는 하인은 연우혁 같은 명포두가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당장 저번에 할머니의 불상을 찾아준 게 누구던가. 판관은 거들떠도 안 보는 일을 해결해 준 건 바로 연 포두였다.
“돌아가셔야 합니다!”
“관의 일을 하는데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할까? 비켜라.”
“아, 안 되는데...”
연우혁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드넓은 저택이었지만 초대 받은 무림인들이 곳곳에 있어 소란스럽고 좁은 느낌이 났다.
“판관 어르신께서는 어디 계시지?”
“어르신께서는 장을 맞은 게 아직 낫지 않으셔서 쉬고 계십니다.”
“저런.”
물론 판관 같은 사람에게 곤장이 꽤나 아프긴 했겠지만, 연우혁은 그게 다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 수상쩍은 일을 맡기고 다닐 때에는 아픈 척을 하고 있어야 나중에 변명하기 좋은 것이다. 역시 보통 노련한 게 아니었다.
‘차라리 잘 됐나?’
괜히 판관의 얼굴을 보고 욕을 듣는 것보다는 무림인들을 빠르게 싸우게 만드는 게 나았다. 연우혁은 무림인들을 둘러보았다.
“이 일을 그냥 넘어가란 거요? 당신네 물건이 사라져도 그럴 수 있겠소?”
“우린 애초에 그런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게 왜 그렇게 행동했나?”
“감히!”
“언성 높이지 마라. 문객으로 초대받았으면 예의가 있어야지. 여기가 어디라고.”
묻지 않아도 어디가 어딘지 알 것 같았다. 화를 내는 쪽이 하씨세가의 무인들이었고, 일을 그냥 끝내려고 하는 쪽이 진검보와 적원방 무인들이었다.
원래 다른 저택에 초대받은 이상 어느 정도는 눈치를 보며 행동해야 했다.
특히 무림인이 문객으로 초대받는다는 건 무력을 빌려준다는 의미라, 그냥 공짜로 초대받지 않았다. 대가를 받는 만큼 더더욱 행동에 조심해야 했다.
진검보나 적원방의 무인들도 그걸 알았기에 판관의 심기를 너무 거스르지 않으려고 했고 그건 하씨세가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라진 게 너무 귀한 물건이라서 그렇지.
저런 게 사라진 이상 그냥 넘어갔다가는 하씨세가 무인들이 가문에 돌아가서 물리적으로 목이 잘릴 수 있었다.
“절대 넘어갈 수 없소. 당신들을 뒤져봐야겠소.”
“뭐?”
“제대로 들었잖소. 조용히 끝내고 싶다면 뒤져보게 해주시오.”
“그럼 우리 말고 적원방 놈들부터 뒤지시오. 나온다면 거기서 나올 테니.”
“헛소리 작작 하는 게 좋을 거다. 진검보 놈들부터 뒤져라. 거기서 나올 테니까!”
“잠깐. 저기 포두가 왔군.”
무인 하나가 연우혁을 알아보고 손짓했다. 한창 다투던 세 문파의 무인들이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마침 포두 놈이 왔으니 포두 놈한테 물어보면 되겠군.”
“포두 놈이 뭘 안다고?”
“이 분은...!”
하인이 소리치려고 하자 연우혁이 괜찮다는 듯이 손짓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고수분들을 뵙게 되니 황송할 뿐입니다.”
“포두! 지금 저 두 놈들 중 한 놈들이 보물을 훔쳤소. 빨리 뒤져보시오!”
“눈이 달려 있다면 저기 적원방부터 뒤지겠지. 적원방을 빨리 뒤져보시오.”
“우릴 먼저 뒤지면 네 손모가지를 잘라버릴 수도 있다. 포두.”
인사 한 마디에 세 문파의 무인들이 으르렁거렸다. 연우혁은 흐뭇해했다.
‘일각만 기다려도 서로 싸우겠군.’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생각을 정리하긴 무슨.”
적원방의 무인이 연우혁을 비웃었다. 딱 봐도 아무것도 모르는 포두 놈이 시간을 끄는 게 보였던 것이다.
“저 놈이 이 문제를 해결하면 내 할아비겠다.”
“살, 살려주십시오. 포두 님! 제가 귀신에 홀렸나봅니다!!”
털썩!
하씨세가에서 데리고 온 마부가 새파랗게 질려서 연우혁 앞에 넙죽 엎드렸다. 손에는 훔친 옥벽이 들려있었다.
세 문파의 무인들은 물론이고 연우혁까지 황당한 표정으로 마부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