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56)화 (56/107)

맹판관요괴저택 (8)

연우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살막의 살수들이 사라졌길래 ‘설마 잠입했나?’하고 생각했었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못했었다.

약속한 소란을 만들지 못한 만큼 아무리 살수들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들어가지 못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판관이 죽었다니?

‘아차.’

연우혁은 바로 해야 할 반응부터 내보였다.

“...으흑흑!”

“!?”

갑자기 포두가 애통한 목소리로 울음을 터뜨리자 사 포쾌는 당황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포두님? 맹 판관입니다. 맹 판관이 포두님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아시잖습니까.”

“조용히 해라! 판관 어르신이 비록 입은 험하고 말은 거칠게 하셨지만, 그건 한경을 떠받치는 거목으로서 책임감 때문에 그러셨던 거다. 판관 어르신께서 나를 믿고 포두 일을 맡겨주지 않으셨다면 내가 어떻게 일들을 해결할 수 있었겠느냐?”

사실 연우혁에게 포두 일을 맡긴 건 맹 판관의 뜻이 아니라 주변의 눈치를 봐서가 더 가까웠고, 그 뒤로는 계속 연우혁을 쫓아내려고 눈엣가시처럼 여겼지만, 사실 지금 진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연우혁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부하인지를 주변에 보여줘야 할 때였다.

“포, 포두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 모습에 사 포쾌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생각해보니 이 젊은 포두는 사 포쾌가 시비를 걸었을 때에도 그걸 마음에 두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했었다.

어느 누가 당문의 미친 무인 앞에서 자신을 모욕한 사람을 지킬 수 있겠는가?

오직 진정한 충의지심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가능했다.

“포두님의 생각도 모르고 멍청하게... 이런 입은 쓸모가 없습니다! 에잇! 에잇!”

가짜로 눈물을 짜내던 연우혁은 사 포쾌가 스스로의 입을 때리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나야 연기를 해야 한다지만 너는 왜 그러냐?’

“포두님, 포두님! 판관 놈이 뒤졌... 헉.”

“야, 이 눈치 없는 놈아! 포두님께서 지금!”

사 포쾌는 다른 포쾌들에게 벌컥 화를 냈다. 귀찮아진 연우혁은 대충 눈물을 닦고 말했다.

“됐다. 내가 슬픈 것과 별개로 공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판관 어르신께서 대체 왜 급사하셨단 말이냐? 그렇게 정정하셨던 분이?”

“매를 맞아서 생긴 장독(杖毒)이 덧나신 거 아닐까요? 아까 오작(仵作) 놈들이 신나서 갔는데, 슬쩍 물어봤더니 별 거 없답니다.”

오작은 장의사이자 검시관 역할을 하는 이들이었다.

포쾌들이 체포부터 시작해서 잡일과 수사, 가끔 노역까지 하는 것처럼 원래 말단 관직이란 건 기본적으로 여러 일들을 같이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오작은 포쾌보다 더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었다. 둘 다 무시 받는다지만 아무래도 백성 잡고 잔돈푼 뜯어내는 놈이 시체 만져서 냄새 나는 놈보다는 나은 것이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면 오작의 입김이 좀 세졌다. 어느 유족이든 간에 죽은 사람을 정성껏 염해서 장례를 치러주고 싶어 했으니까.

특히 이번처럼 판관 같은 한경에서 권세 있었던 사람의 죽음이라면 오작들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걸진 미소가 걸려 있기 마련이었다. 정성껏 염해주고 장례에 필요한 물품들을 마련하는데 그게 다 돈이지 않은가.

“아무것도 없다고?”

“그냥 쇠약해져서 돌아가신 것 같다는데요.”

‘살수 놈들 대단하긴 하군.’

연우혁은 솔직히 놀랐다.

판관이 죽었으니 한경에서 가장 노련한 오작들이 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오작들이 아무런 위화감도 눈치 채지 못하다니.

“가자. 어르신을 뵈러 가야겠다.”

“예?”

포쾌들은 질색했다.

물론 그 짜증나는 판관 놈은 죽었다지만, 원래 사람이 죽은 곳은 불길하기 그지없는 자리였다.

온갖 사기(邪氣)가 그득할 텐데 뭐가 좋다고 거기에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특히 지금처럼 오작 놈들이 시체를 들쑤시고 염할 때에는 더더욱 악취와 기운이 심할 것이다.

“장례를 치를 때 가시죠?”

“이 놈들! 포두님 마음도 모르는 놈들이!”

사 포쾌는 벌컥 화를 냈다.

“너희들은 오지 마라. 나 혼자서라도 따라가겠다! 포두님. 가시죠!”

“아니... 안 간다는 게 아니고...”

“사 포쾌, 사람 참 그러지 말게. 우리가 뭐가 되나? 가시죠. 포두님. 따라가겠습니다!”

포쾌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연우혁의 뒤를 따라갔다.

‘의심 받을 가능성은 적지만 조심해야 한다.’

연우혁은 앞장서서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지금 저택에 방문하지 않아도 됐다. 다른 포두들은 아마 질색하며 핑계를 대고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사람이 죽은, 악취와 사기가 가득한 곳에 방문하고 싶지는 않아했다.

하지만 연우혁은 자신이 이렇게 충성스럽다는 걸 보여줄 필요성이 있었다.

혹시라도 판관의 죽음에 부정이 있다면 반드시 해결하겠다!

“아, 아니. 포두님!”

저택의 하인이 연우혁의 얼굴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모욕을 받고 쫓겨났는데 이렇게 오다니.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판관 어르신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 혹시라도 부정이 있었다면...”

“아닙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오지 않으셔도 됐었는데. 그냥 장형을 맞은 게 덧나신 거 같습니다.”

‘뭘 얼마나 세게 친 거야?’

연우혁은 보는 사람마다 장형 이야기를 하자 좀 궁금해졌다. 나중에 교위를 만나면 한 번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보통 곤장을 칠 때 그걸 휘두르는 놈한테 세기를 조절하게 했다. 판관 같은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조절을 해줬을 텐데도 저렇다니.

교위가 보통 세게 때린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연 할아버지!”

어제 만난 적원방의 무인, 철두산군 마자추가 연우혁을 알아보고 반겼다.

연우혁은 뭔 소린가 싶어서 되물었다.

“마 대협. 할아버지라는 게 무슨 소리십니까?”

“내 부하 놈 중 하나가 자네를 할아버지로 모시겠다던데? 하여간 여긴 왜 왔나?”

“판관 어르신께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라도 문제가 있었다면...”

마자추가 짐짓 사나운 얼굴을 하고 으르렁거렸다.

“설마 우리들 중 누군가를 의심하는 거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녹봉을 먹는 사람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화내는 게 머쓱해지는군. 하긴, 어제 사람을 풀어서 네 소문을 들어봤다! 재주가 대단하더구나. 그렇게 자기를 모욕한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달려오다니. 범부는 그렇게 하지 못하지. 마음껏 찾아봐라.”

마자추는 판관이 죽었음에도 여유로웠다.

물론 맹 판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했지만, 그만큼 여기 있는 무림인들에게 별 책임이 없다는 걸 확신하고 있어서기도 했다.

어제 저 포두가 옥벽을 찾아준 다음에 무림인들은 각자 머무는 전각에 들어가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정해진 대로 보초를 서고 안채에는 접근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판관과 딱히 원한 있는 사람도 없었고, 지금 들어간 오작 놈들도 별 문제 없다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냥 늙어서 뒤진 게 분명했다.

“엇. 연 포두님 맞으십니까?”

안채에서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송곳과 망치를 든 오작들이 걸어 나왔다.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뒤에 있던 포쾌들은 살짝 긴장했다.

오작들과 포쾌들의 사이는 그리 썩 좋지 못했던 것이다. 오작들은 높은 부수입을 올리고 한경의 양민들의 존경을 받는 포쾌들을 질시했고, 포쾌들은 냄새나고 불결한 오작들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만약 판관의 시신만 믿고 별 문제도 없는데 왔다고 시비를 건다면 포쾌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희 행수님께서 저번 무덤을 도굴한 놈을 잡아주셔서 감사하고 계십니다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

평소 까칠하던 오작들이었지만 연우혁에게는 태도가 부드러웠다. 연우혁은 저번에 밀린 사건들을 해결할 때 미루지 않고 바로 끝낸 스스로를 속으로 칭찬했다.

“혹시 수상쩍은 흔적이라도...”

“아이. 없습니다. 없어요. 그냥 장독이 덧나신 것 같습니다. 참 무상한 일입니다. 이렇게 커다란 저택을 두고, 첩도 여럿 있으신 분이 장 몇 대에 그냥 가시다니...”

“여기가 맹 판관 저택이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정문에서 터져 나왔다.

머무르고 있던 무림인들은 그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에 담긴 힘이 약한 무공으로는 나올 수 없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아니! 제갈 대협 아니십니까!”

하씨세가의 하등명이 황급히 예의를 갖추며 달려 나왔다.

제갈세가의 장로, 천기수사 제갈우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제갈우는 꼿꼿한 자세로 머리만 돌려 하등명을 쳐다보았다.

“너는 누구냐?”

“하씨세가의...”

“기서 하씨세가?”

“예.”

“그러면 너는 하등명이로겠구나.”

“맞, 맞습니다!”

하등명이 감탄하자 옆에 있던 다른 무인들도 감탄했다. ‘역시 천기수사다’라고 감탄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그 정도인가?’

지금 여기 있는 무림인들 중에 자기가 가장 먼저 나오면 우두머리거나 직계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등명은 젊은 놈이니 직계일 것이고, 그럼 하씨세가의 젊은 직계가 몇이나 된다고...

“천기수사. 내가 누군지도 맞춰보시오!”

“이마가 툭 튀어나왔고 외공이 유독 발달한 걸 보니 너는 적원방의 철두산군이다.”

“맞소, 맞소!”

평소 유명하던 무림의 명사를 보게 되자 좌중의 무림인들은 신이 나서 지껄여댔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제갈우를 그냥 내버려두기 부담스러웠는지 하등명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천기수사 님께서는 여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판관한테 초대를 받았다. 웬 낭인 놈들이 혈판장을 보내서 협박했다던데.”

무인들은 놀라지 않았다.

판관이 생전에 이미 말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들었습니다. 웬 겁 없는 낭인 놈들이 예전에 벌을 받은 것에 앙심을 품고 협박을 했다지 뭡니까.”

‘그런 식으로 떠들었었군.’

연우혁은 판관이 무슨 핑계로 불렀는지 알고서 속으로 어이없어했다.

자기가 고용해놓고 살인멸구하려 한 주제에 낯짝의 두께가 유독 두꺼운 사람이었다.

“천기수사 어른까지 부르다니. 우도할계(牛刀割鷄)도 정도껏 해야지.”

“그런데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천기수사 님. 판관께서 어제 병이 덧나서 돌아가셨습니다.”

“나도 들었다.”

제갈우의 대답에는 꼬장꼬장함이 담겨있었다. 그 목소리에 담긴 미묘한 거슬림을 느낀 마자추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어쩌시겠소? 우린 이제 슬슬 나갈까 생각중인데.”

“너희는 아무데도 못 간다.”

“뭐요? 문객 많아봤자 장례 준비에 방해나 되지...”

“너희 중 판관을 죽인 놈이 없다고 누가 장담하겠느냐?”

“!”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이 일제히 눈빛을 바꿨다. 제갈우가 무슨 목적으로 저러는지 깨달은 것이다.

“지금 저희를 의심하는 겁니까?”

“아해야. 진검보와 적원방이 네 세가 휘하라도 되더냐? 무슨 자신감으로 둘이 아무 잘못 없다고 보장하는 거냐?”

“그, 그건...”

하등명은 한 걸음 물러섰다. 제갈우의 말은 쉽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진검보나 적원방은 다른 문파지 하등명의 문파가 아니었으니까.

“하등명, 어제 빚 져놓고 그것도 말 못 하나? 당연히 아무 잘못이 없지! 우리가 무엇이 아쉬워 저런 놈을 죽인단 말이오?”

마자추가 으르렁댔지만 제갈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했다.

“무인이 누군가를 죽이는 데에는 아주 사소한 이유면 충분하지. 그렇게 입을 맞추니 더 의심스럽군.”

“말 조심하쇼. 천기수사. 제갈세가의 이름이 아무리 드높아도, 적원방의 동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으니!”

“지금 날 겁박하는 건가? 왜지?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서?”

마자추는 분통이 터져서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자추 같은 성격에는 제갈우를 상대하는 게 쉽지 않았다.

“천기수사 님. 여기 연 포두께서도 별 문제 없다고 해주셨습니다.”

“하등명, 그걸...”

하등명의 말에 마자추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제갈우 같이 꼬장꼬장한 놈이 고작 한경 포두 이름 듣는다고 ‘아, 그러냐?’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되레 비웃음이나 살 게 분명했다.

“연 포두? 혹시 네가 연우혁이냐?”

“...예. 맞습니다.”

“좋다. 네가 앉아서 자세히 말해봐라.”

“!?”

제갈우가 연우혁에게 하는 말을 들은 무림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성질 괴팍한 제갈세가의 장로가 설마 일개 포두의 말을 경청하려고 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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