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판관요괴저택 (9)
마자추는 황당해서 외쳤다.
“천기수사. 적원방의 이름은 무시하고 지금 일개 포두의 말은 듣겠다는 거요?”
씩씩대던 마자추는 연우혁과 눈이 마주치자 머쓱했는지 사과했다.
“널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포두.”
“괜찮습니다. 대협. 이해합니다.”
제갈우는 노골적으로 귀찮은 기색을 드러내며 마자추를 쳐다보았다.
“내가 언제 적원방의 이름을 무시했다는 거냐?”
“방금 그랬잖소! 내 말은 무시해놓고 이 포두의 말은 듣다니...!”
“예전에 당문 근처에서 웬 관리 놈이 한 줌 핏물로 변해서 사라진 적이 있었다. 그 때 독왕이 당문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고 했었지만 나는 무시하고 당문 무인들을 조사했다. 내가 독왕을 무시한 거냐?”
“그건... 그건 아니오.”
“조사할 때 관리를 따르던 하인 놈들은 내 시중을 들면서 일을 도왔다. 이게 하인의 말은 듣고 독왕을 무시한 거냐?”
“......”
마자추는 본전도 챙기지 못하고 찌그러졌다. 제갈우는 무림에서 가장 한심한 잡놈을 바라보는 경멸의 시선으로 마자추를 쏘아보았다.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하등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천기수사 님. 연 포두가 천기수사 님의 일을 도울 능력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래. 능히 할 수 있다.”
“!”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 깐깐한 천기수사가 일개 포두를 인정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포두의 재주가 뛰어나고 한경에 소문이 자자하다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리고 연우혁도 놀랐다.
“??”
말 한 번 안 나눠본 무림의 명숙이 갑자기 찾아와서 높게 평가를 하니, 기쁘기보다는 당황스럽고 부담스러웠다.
연우혁 생각에 범인은...
‘팽 형이 분명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팽주성이 제갈세가 방문한 상태에서 신나게 떠든 게 분명했다. 그 사람 말고는 의심가는 사람이 없었다.
“말해봐라. 연우혁. 왜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
진검보 무인들을 이끄는 탈명검 단종혁이 입을 열었다.
“천기수사. 그 포두는 지금 막 왔소.”
“뭐? 별 문제 없다고 했다면서?”
제갈우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하등명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오작들이 별 문제가 없다고 해서...”
“설마 오작하고 포두를 구분하지 못하는 거냐? 눈에 문제가 있느냐?”
“...죄송합니다. 마음이 급해서 실언했습니다.”
제갈우는 무림에서 두번째로 한심한 잡놈을 바라보는 경멸의 시선으로 하등명을 쏘아보았다. 마자추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어린 소가주의 등을 두드려줬다.
“무슨 대단한 이야기가 나왔는가 했더니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나보구나. 그럼 들어보자. 판관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
연우혁은 긴장했다.
이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연우혁이 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선택은?
‘역시 자연사로 몰고 가는 거다.’
괜히 어설프게 자리에 있는 아무나 범인으로 몰았다가는 일이 어떻게 튈지 몰랐다. 천기수사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연우혁은 스스로의 이점을 믿었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연우혁이 훨씬 더 잘 알지 않는가!
‘한경에서 손꼽히는 오작들이 시신을 확인했다. 시신 자체에는 별 증거도 없다. 충분히 몰고 갈 수 있다!’
“저는 판관 어르신께서 곤장을 맞아 쇠약해지셨다고 생각합니다.”
좌중에 있던 무림인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사실상 연우혁이 그들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몇몇 무림인들은 연우혁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쯧!”
제갈우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연우혁은 당황하지 않았다. 제갈우 정도면 곱게 미친 무림인이었다. 무림에는 제갈우보다 더 미친놈들이 많았다.
“어르신께서는 제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성급하다고 생각한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 예전에 당문 근처에서 웬 관리 놈이 한 줌 핏물로 변해서 사라진 적이 있다고 했지. 그 놈은 갓 급제한 겁 없고 건방진 놈이라 당문의 대장간 중 몇 개가 국법에 어긋난다고, 치워버려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며 시비를 걸었었다.”
제갈우는 연우혁 대신 마자추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과연 누가 이 관리 놈을 죽였겠느냐?”
마자추는 당황해서 얼떨결에 대답했다.
“당, 당문?”
“봐라. 증거가 하나도 없지만 여기 철두산군도 수상한 걸 안다! 판관의 죽음도 비슷하다. 너무 공교롭지 않느냐? 그렇게 쌩쌩하던 자가 갑자기 급사를? 그것도 성질 괄괄한 무림인들이 득시글거리는 자리에서? 내게 보낸 서신에는 본인이 아프다는 말 한 마디도 없었다.”
무림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기수사의 말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등명은 입술을 깨물며 외쳤다.
“판관 어른은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어제도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단 말입니다.”
“맞소! 보아하니 아픈 놈이 색은 더럽게 밝혀대는데 화까지 터뜨리니 쓰러지는 것도 당연하지!”
“조용히 해라. 네 녀석들 의견 물은 게 아니니까.”
제갈우는 짜증스럽게 손을 내젓더니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애초에 이 포두 의견이 궁금한 거였지 다른 멍청한 놈들 의견이 궁금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림인들이 배신감 가득한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일 뿐입니다. 어르신. 판관 어르신께서는 사실 몸이 편찮으신지 꽤 됐습니다.”
“...?!”
무림인들은 깜짝 놀랐다. 천기수사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지병이 있었다고?”
“예. 혹시 판관 어르신께서 왜 곤장을 맞게 되신지 아십니까? 몸이 허해지셔서 요괴를 보게 되신 탓입니다.”
연우혁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몸이 허해진 사람을 금의위가 그렇게 무자비하게 때렸으니...”
“난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판관 어르신께서는 한경의 대소사를 맡아서 처리하시는데 어디 쉽게 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셨겠습니까. 몇몇 사람만 알고 있습니다. 한 번 개방에 물어보십시오.”
“흠!”
제갈우는 예상 밖의 이야기에 생각에 잠겼다. 좌중의 무림인들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완전히 귀병 걸린 거 아니요!”
“맞습니다. 천기수사 님! 연 포두가 상관의 명성을 존중해서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데, 이러셔야 속이 시원하십니까!”
“조용해라, 조용해!”
제갈우는 아까보다 더 짜증스럽게 무림인들을 닥치게 만들었다.
“좋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원래부터 몸이 좀 안 좋은 놈이라는 건 받아들이지. 하지만 수상한 건 그게 끝이 아니다. 판관 놈이 부릴 수 있는 관졸들이 있고 포쾌들이 있는데 이런 무림인들은 왜 불러 모았을까?”
“말했잖소. 어떤 놈이 협박을...”
“낭인 몇 놈 때문에 이만한 무인들을 모았다고?”
“겁이 많았나보지.”
“판관 놈이 겁이 많았으면 진작 낙향했겠지. 넌 조용히 좀 해라!”
마자추는 다시 찌그러졌다. 천기수사는 집요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 아니었겠느냐? 낭인이 아니라, 여기 있는 놈들과 관련된 무림인 중에 의심 가는 놈이 있어서...”
연우혁은 침착하게 호흡을 고르고 말했다.
“이건 어르신께서만 들어주시겠습니까?”
“죽었는데 무슨 상관이냐. 그냥 말해라.”
“제 생각에는 판관 어르신께서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혈판장을 보낸 낭인이잖습니까?”
하등명이 이해를 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낭인이 아니라 다른...”
털썩!
뒤에서 듣고 있던 저택의 총관이 사색이 되어 넘어졌다.
“그, 그걸 어떻게...!”
“뭐냐? 말해라!”
집중해서 듣고 있던 무림인들은 일제히 으르렁댔다. 그 살기 넘치는 기세에 짓눌린 총관은 벌벌 떨며 외쳤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주인 나리께서 시키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연 포두께 원한은 없었습니다! 그저 낭인 놈한테 은자만...”
“...아니, 이런 미친 잡놈을 봤나!”
마자추는 가장 먼저 깨닫고 경악했다.
지금 설마 판관이란 놈이 자기 부하를 죽이려고 낭인을 고용했단 말인가?
“저... 저는 낭인한테 은자를 갖다 줬을 뿐입니다. 제발!”
“닥쳐라. 우리는 그러면 왜 부른 것이냐!”
“낭인 놈들을 살인멸구해야 한다고...”
“...하! 고작 저잣거리 낭인 놈들을 말끔하게 죽이겠다고 우리가...!”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은 허탈함에 빠졌다.
웬 낭인 무리가 협박한다길래 의로운 일을 하는 셈치고 왔더니, 판관 놈이 일을 맡긴 낭인을 살인멸구하는 일이었다니.
“괜찮나, 연 포두?”
“...그저 비통할 뿐입니다. 크흑!”
“이해한다. 이해해! 저런 상관 놈 밑에서 그리 충성을 다했다니. 죽어도 싼 놈이다!”
마자추는 탄식하는 연우혁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어떻게 저렇게 상관 복이 없단 말인가?
주변이 난장판이 됐는데도 제갈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총관을 심문했다. 낭인을 고용하면서 든 은자까지 세세하게 캐물었다.
‘이 돈이면 고작해야 이류 한둘 고용했겠군.’
이런 저잣거리 낭인들은 배신당했다고 저택에 뛰어들진 않았다. 아무래도 이건 판관의 죽음과 아무 상관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 무림인들을 불러 모은 이유도 설명이 됐다.”
“천기수사. 슬슬 인정하십시오. 지금 여기 있는 동도들이 결백하다는 걸 말입니다.”
“보채지 마라. 확인할 만큼 확인하면 그렇게 할 거다.”
제갈우는 안채를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시신을 확인하러 가자.”
“어, 어르신. 시신은 함부로 건드리면...”
악취를 막기 위해 천으로 코와 입을 막은 오작들은 당황했다.
잘 정돈된 시신을 문외한이 건드렸다가 훼손하면 유족들에게 은자는 커녕 곤장이 돌아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비켜라. 내가 네놈들보다 만진 시신의 숫자가 곱절은 될 테니.”
제갈우는 더 이상 상대해주지 않겠다는 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뒤를 쫓았다.
“몸에 상처나 시반(屍斑, 죽은 뒤 피부에 생기는 멍울)을 보는 법은 아느냐?”
“예.”
연우혁은 해결했던 사건들에서 단서 봤던 법을 떠올리며 재빨리 대답했다.
“시반이 등이나 엉덩이에 나타나면 누워서 죽었고, 가슴팍이나 배에 나타나면 엎드려서 죽은 걸 알 수 있습니다.”
옆에 있던 오작들은 경탄의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저런 건 오작들 사이에서만 내려오는 일종의 비전이었다. 길거리나 돌아다니는 포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비방을 저렇게 술술 읊다니.
‘연 포두의 소문이 과연 거짓이 없구나!’
“이 시체는 가슴팍에 시반이 있다.”
“판관 어르신께서는 장형을 맞은 상처가 낫지 않아 엎드려서 주무셨을 겁니다.”
“입이나 코, 귀에 독이 들어갔는지 검사는 해봤느냐?”
“오작들이 은을 대어가며 확인했다고 합니다.”
말 한 마디도 물러나지 않는 연우혁의 모습에 오작들은 오히려 본인들이 불안해졌다.
상대방이 무림의 고수인데 언제 분을 터뜨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제갈우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마지막으로 뱃속은 확인해봤느냐?”
“!”
연우혁도, 오작들도 놀랐다.
오작들이 놀란 이유는 창자 속까지는 검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겉이 아니라 배를 갈라서 안을 확인하는 건데 유족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연우혁이 놀란 이유는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독살 가능성이 높지 않나, 지금?’
살수들이 어떻게 죽였는진 모르겠지만 독살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 뱃속에 든 내용물에 독이라도 나오면 일이 다 꼬였다.
오작들도 만약 독이라도 나올까봐 초조해했다. 그렇게 되면 그들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무래도 판관 어르신의 몸을 가르는 건 다른 분들이 허락해주실 것 같지 않습니다만.”
“이걸 쓰도록 해라.”
제갈우는 은 송곳을 꺼내 내밀었다. 배를 가르지 않고 구멍 하나만으로 독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푹!
연우혁은 신중하게 은 송곳을 찔러넣었다. 오작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결과는...
“깨끗합니다!”
제갈우는 깨끗한 은 송곳 끝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확실히 다 확인한 것 같았다.
“타살은 아닌 모양이군.”
‘살았다.’
연우혁은 현청벽사신공의 구결을 암기하던 걸 멈추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허공섭물을 응용해서 은 송곳에 뱃속의 내용물이 묻지 않도록 감쌌던 것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아슬아슬한 짓이었다.
“너희들은 나가있어라.”
“?”
연우혁은 제갈우가 갑자기 오작들을 내보내자 당황했다.
‘설마 들켰나?’
“너는 내가 왜 저 놈들을 내보냈는지 알겠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부족하군!”
제갈우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연우혁은 자기가 무슨 실수를 했나 되짚어보느라 깊이 골몰했다.
벌컥!
천기수사는 안채의 벽장을 열더니 그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중 영약 같아 보이는 것들을 휙휙 꺼내더니 연우혁에게 던졌다.
“빨리 챙겨라.”
“......”
연우혁은 오늘 겪은 일 중 가장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