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58)화 (58/107)

살막 실종 사건 (1)

“어, 어르신. 이건... 이건 도둑질 아닙니까?”

간신히 정신을 차린 연우혁이 뒤늦게 외쳤다.

그러자 제갈우는 무림에서 세번째로 한심한 잡놈을 바라보는 경멸의 시선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규 녀석이 네 칭찬을 많이 해서 높게 평가했는데, 아직 확실히 어리숙하구나!”

‘아니. 제갈규였나?’

연우혁은 자기 칭찬을 누가 했는지 깨닫고 놀랐다.

팽주성한테 입 가볍다고 욕한 게 갑자기 조금 미안해졌다.

“제갈 형께서 제 칭찬을 하셨습니까?”

“그래. 산채에서 보여준 재주는 제법 괜찮더군.”

“운이 좋았습니다.”

“운으로 냉수사를 속일 순 없지. 하지만 말했듯이, 아직 어리숙하다! 무림에서는 잠깐의 빈틈이 목숨을 앗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마라.”

“어르신께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연우혁은 공손히 말했다.

상대가 너무 자신만만해서 오히려 좀 헷갈리기 시작했다.

‘혹시 판관하고 무슨 약속이라도 했나?’

설마 판관하고 생전에 ‘하하! 천기수사 님, 제가 죽으면 제 안채를 샅샅이 뒤져서 다 가져가주십시오 껄껄’같은 약속이라도 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 당당함이 설명되지가 않았다.

제갈우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알아둬야 하겠지. 언젠가 무림에서 군사(軍師)로 명성을 날리게 될 테니. 이것도 인연이니 설명해주겠다.”

“?”

연우혁은 ‘전 포두인데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갈우의 성질머리가 워낙 더러워보여서 감히 반문하지 못했다.

“무림에서 군사로 지혜를 빌려줄 때 가장 유의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아느냐?”

“...단순히 진상을 밝히는 게 아니라, 뒷일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림은 단순히 진상을 밝힌다고 모든 일이 끝나지 않았다. 만약 살인사건에서 누가 누굴 죽였다고 면전에서 대놓고 말하면, 그 당사자는 검을 들고 칼부림을 벌일 수도 있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것까지 생각해서 일을 해결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제갈우는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그건 가장 유의해야 하는 게 아니지.”

“잘 모르겠습니다.”

“군사로서 가장 유의해야 하는 건 바로 일의 보상을 챙기는 거다!”

“......”

연우혁이 경악해하는 사이에도 제갈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무림인 놈들은 태반이 무식한 무부들이라 지혜의 가치를 모르지. 필요할 때는 굽신거리다가도, 일이 끝나면 어떻게든 삯을 깎으려고 염병이다.”

천기수사의 목소리에는 진득한 원한이 묻어나왔다.

무림의 지낭으로서 오랫동안 활약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원한이었다.

“절대 먼저 답을 알려주지 마라. 알겠느냐! 반드시 보상을 먼저 손에 넣은 다음 답을 알려줘야 한다. 만약 상대가 약속을 어긴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보복해야 하고! 무림인 놈들은 조금만 빈틈을 주면 고작 머리 좀 굴린 것에 이렇게 비싸게 값을 내야 하냐고 지껄일 테니까!”

제갈우는 카랑카랑하게 외쳤다. 거기에 압도된 연우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았으면 수색을 도와라. 네 재주를 보겠다.”

“어, 어르신. 죄송합니다만 방금 말하신 것과 이게 무슨 연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뭐라고? 네가 정말 냉수사를 속인 포두가 맞느냐?”

제갈우는 이런 것도 설명해줘야 한다는 게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연우혁도 어이가 없었다.

‘일은 선금을 받아라’와 판관 안채 터는 게 뭔 상관이란 말인가?

“봐라! 내가 여기는 왜 왔느냐?”

“판관 어르신께서 서신을 보내서...”

“맞다. 판관이 부탁했지. 이게 하나다. 그런데 왔는데 판관이 죽었구나! 판관의 죽음에 관한 억울함을 누가 해결했느냐?”

“천기수사 어르신께서...”

“너와 내가 해결했지. 이게 둘이다. 마지막으로 판관 놈은 서신으로 거짓부렁을 지껄였다. 그러니 이게 셋이다.”

“뭐가 하나고 둘이고 셋인 겁니까?”

“삯값 말이다, 삯값! 이 미련한 놈 같으니! 나를 불렀으니 한 번 빚을 졌고, 내 재주를 썼으니 두 번 빚을 졌다. 마지막으로 내 체면을 깎았으니 세 번 빚이다!”

“...?”

고민하던 연우혁은 뒤늦게 깨닫고 외쳤다.

“설마 지금 판관 어르신이 드려야 할 보상을 챙기시는 거였습니까!?”

“드디어 머리라는 걸 쓸 줄 알게 됐구나! 그래. 알면 됐다! 빨리 챙겨라!”

제갈우는 미간의 주름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게 본 무림의 후배가 헛소리만 해대서 영 답답했는데, 드디어 이해를 한 모양이었다.

초청해서 왔고, 원통한 죽음을 풀어줬고, 체면을 깎아준 것도 참아줬으니 이제 마땅한 값을 받아갈 때였다.

“그... 친족들하고 이야기를 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보상을 받고 싶으면 남은 친족들한테 이야기를 꺼내는 게 먼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제갈우는 탄식했다. 이런 수준 낮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였다.

“내가 방금 뭐라고 말했는지 잊어버린 거냐?”

“잘, 잘 모르겠습니다.”

“무림인 놈들은 필요할 때는 굽신거리다가도, 일이 끝나면 어떻게든 삯을 깎으려고 염병이라고 했다! 판관의 친족 놈들이라고 다를 거 같으냐? 언제 그랬냐고 귀찮게 굴면서 일단 비싸 보이는 걸 빼돌리려고 하겠지. 한두번 겪은 게 아니다. 그러니까 빨리 챙겨라!”

천기수사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반문했다가는 네놈에게 몫을 챙겨주지 않겠다’라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연우혁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재빨리 같이 뒤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판관 놈 재산 좀 턴다고 해서 나쁠 게 없었다.

그나마 뒷감당이 걱정이긴 한데, 어차피 제갈우가 주도해서 턴 거였으니 문제가 생겨도 제갈세가 책임으로 돌리면 그만이었다.

“어르신. 궁금한 게 있습니다. 왜 패물이 아니라 영약만 챙기시는 겁니까?”

“좋은 질문이다. 영약은 패물만큼 값지다. 하지만 패물만큼 사람들이 기억하진 않는다. 패물이 사라지면 판관의 친족들이 성가시게 굴겠지만, 영약이 사라지면 눈치도 채지 못할 거다. 하물며 무림인들도 아닌 만큼... 너도 앞으로 보상을 챙길 때 염두에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진짜 제갈세가 출신이 맞긴 한가?’

연우혁이 그런 흉흉한 생각을 하는 것도 모르고 천기수사는 하수오를 들고 감정했다. 오십년 정도는 된, 꽤 묵직한 놈이었다.

“받아라. 이건 네가 가져가라.”

“!”

영안으로 하수오의 가치를 파악한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강호를 떠도는 전설에서나 만년하수오 같은 게 나오지, 실제로는 오십년 정도만 된 하수오만 해도 매우 값어치가 뛰어난 영약이었다.

무림인이 아니더라도 잘 달여서 먹으면 근골이 튼튼해지고 양기가 증진하는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마 판관의 안채에 있는 것도 그런 목적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지금 일류의 경지를 노리고 있는 연우혁에게는 금보다도 값진 물건이었다.

“저한테 주셔도 됩니까?”

“일을 했으면 보상이 있어야지. 내게는 별 쓸모없는 물건이다.”

제갈우는 별로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어느 정도 경지가 높아지면 내공의 양을 무작정 늘리는 것보다는 이해와 깨달음이 더 중요해지기 마련.

“세가의 다른 무인들이 탐낼 수도 있잖습니까.”

“제갈세가 일을 왜 네가 신경 쓰냐? 챙기기나 해라. 그 놈들은 자기가 알아서 벌어먹겠지!”

연우혁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영약을 챙겼다.

안채에는 방금 챙긴 하수오만큼은 아니어도 괜찮은 영약들이 꽤 많았다. 판관이 장생과 보양에 관심이 많았다는 게 느껴졌다.

바싹 말린 뱀부터 시작해서 각종 삼은 물론이고 독버섯까지...

‘독버섯은 왜 먹으려고 한 거야?’

아무리 자양강장에 도움이 된다지만 독버섯까지 구비해놓다니.

연우혁은 어이없어하며 영안으로 주변을 훑었다. 사실, 영안은 이런 식으로 도둑질할 때 유용한 능력이었다.

아래에 숨긴 영약까지 빈틈없이 꺼내자 제갈우가 빤히 쳐다보았다.

‘아차. 너무 잘했나?’

연우혁은 속으로 움찔했다.

영안으로 찾았다지만 제갈우 입장에서는 이상한 오해를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찾는 솜씨가 제법이구나! 어디 가서 네 몫을 못 주워먹진 않을 거다.”

“...감사합니다.”

***

오작들이 정식으로 보고를 올리고, 저택의 사람들이 장례를 준비하고, 초대 받은 무림인들이 돌아갈 채비를 마치는 사이 연우혁은 안가에서 눈을 감고 고요히 집중했다.

오늘 일류의 벽을 뚫을 생각이었다.

‘부족한 내공은 저택에서 챙겨 온 영약으로 뚫는다.’

지금 판관의 장례를 준비하느라 한경은 한창 분주했다. 파직당했다지만 한 때 관직에 있었고 꽤 권세가 있었던 만큼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우혁 같은 포두들은 오히려 이럴 때 한가했다. 괜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 포쾌들이 순찰만 잘 돌면 되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미뤄뒀던 벽을 깰 적기리라.

으적!

입 속에 구겨 넣은 영약들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강한 기운으로 변했다. 연우혁은 쓴맛을 느끼며 정신을 집중했다. 조금의 내공이라도 놓칠 수 없었다.

기경팔맥을 따라 낯선 내공들이 온몸을 타고 돌았다. 연우혁은 영안을 열고 내공의 흐름을 정확히 관측했다. 실수하면 내공이 날아가는 건 물론이고 내상까지 입을 수 있었다.

회음혈부터 백회혈까지. 내공이 천천히 그 크기를 키워가며 움직였다. 심법으로 전신 세맥에 축기된 내공부터 새로 영약으로 흡수한 내공까지 모여서 단전으로 엉켜들었다.

연우혁은 자신이 익혔던 무공 구결들이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위국권법부터 시작해서 백사편법, 탈혼비도, 쌍사보법과 사심불구경공까지.

‘할 수 있을 거 같다!’

영안으로 자신이 익힌 무공을 완벽히 이해한 연우혁이었기에 오히려 결함을 더 잘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무공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쳐줄 내공과 외공이 부족하면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연우혁의 경우 특히 초식과 초식 사이에 그 단절이 심했다. 내공이 받쳐주면서 초식을 이어주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연우혁은 자신이 익힌 무공의 초식들을 막힘없이 풀어나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연우혁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위국권법을 펼쳤다. 허공에 어지러운 권영(拳影)이 잔상처럼 남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손발이 움직이는 쾌감은 무림인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성취감이었다. 연우혁은 무아지경에 빠져 권법을 이어나갔다.

“흠흠.”

“!”

연우혁은 고개를 돌렸다.

역용술을 펼친 적조와 부하가 멋쩍은 표정으로 앞에 서있었다.

“이봐. 무공의 깨달음을 얻었나?”

“예.”

“축하한다. 꽤 상승의 권법 같은데. 무슨 권법이지?”

“위국권법입니다.”

“아니, 그건 금의위의 권법 아닌가?”

연우혁이 되레 놀랐다. 상대가 이름에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감탄하는 건 또 처음이었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금의위와 상대해 본 적 있으니 알지. 금의위의 권법을 익힌 게 신기한데.”

“인연이 있었습니다.”

“정말 잘 보였나보군.”

적조는 금의위의 무인들이 외부인에게 무공을 쉽게 전수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하물며 포두 같은 말직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걸 감안하고도 전수받았다면 정말 대단한 재능이었다. 흔히 이 포두의 지혜 때문에 잊기 쉬웠지만, 사실 포두의 무공도 그리 밀리지 않았다.

명문정파 출신도, 무림인도 아닌 사람이 이 정도 경지를 이루는 건 극히 드문 일인 것이다.

‘이류 말입이나 이류에서 일류 사이 같은데, 설마 일류의 벽을 깼나? 그건... 정말 말이 안 되는데.’

단순히 재능을 넘어서 내공을 쌓을 시간이 필요했다. 영약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일개 포두가 그런 걸 구하기는 힘들었다.

“들어오십시오. 판관 어르신께서 돌아가셨는데...”

“아. 덕분에. 정말 신통하더군.”

“?”

연우혁은 적조의 말에 의아해했다.

“뭐가 말입니까?”

“무림인들의 시선을 끌었잖아? 덕분에 나도, 부하도 들어갈 수 있었는데.”

“제가 그랬습니까?”

“??”

이번에는 적조와 적조의 부하가 황당해 할 차례였다. 적조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옥벽? 옥벽이었나? 그걸 누가 훔쳐갔고 어떻게 훔쳐갔는지 설명하면서 시선을 끌었지 않나.”

“아니, 그게 들어갈 정도로 시선을 끌었습니까??”

“저택에 있던 무림인이란 무림인 놈들은 다 안뜰에 모여서 듣고 있던데?”

“그래도 보초 서는 자들은 있지 않았습니까?”

“보초 서는 놈들도 안뜰로 가서 네 말을 듣고 있던데.”

“......”

연우혁은 갑자기 저런 무림인들을 믿고 호위를 맡긴 판관이 아주 조금 불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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