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62)화 (62/107)

살막 실종 사건 (5)

“...어떻게?”

“제갈세가와 친분이 있어서요?”

“아, 아니. 넌 대체 포두가 왜 이렇게 무림세가와 친분이 깊은 거냐?”

연우혁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한 소리였다.

지나가던 무림인 놈들이 선량한 포두를 괴롭혔으면 괴롭혔지 연우혁이 먼저 다가가지는 않았으니까.

“무림인 놈들이 자꾸 제 멱살 잡으면서 일 해결하라고 하는데 어떡합니까?”

“나도 내 바짓가랑이 붙잡고 일 해결해달라고 하는 놈들이 많았지만 그 놈들과 다 친하진 않지... 혹시 천기수사도 친분 때문에 넘어간 거냐?”

“무슨 소리를. 제가 얼마나 공들여서 대답을 했는데...”

억울해하며 반론하던 연우혁은 순간 천기수사가 제갈규와의 친분으로 챙겨준 걸 보고 멈칫했다.

“음. 친분이 조금 있긴 했습니다만.”

“역시!”

적조가 명포두가 아닌 인맥포두를 보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연우혁은 분노했다.

“아니, 친분으로 어떻게 해결을 합니까?”

“그래. 알겠다. 하여간 지금 제갈세가의 젊은 놈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거지?”

“지금 그걸 그냥 넘어가시면...”

둘이서만 속닥거리자 정여혜는 짜증스럽게 외쳤다.

“둘이서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건데?”

“지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니, 제게 남는 게 하나도 없잖습니까.”

“할아버지한테 소개시켜줄게. 이번에 목숨 구해줬다고 해주면 되잖아.”

“나도 두 명 죽여주겠다. 어떠냐?”

“뭔...”

무슨 제갈규 만나는 걸 어시장 물고기 장사하듯 이야기하는 모습에 연우혁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손익을 따져보면 손해는 아니었다. 정여혜가 자기 이름을 걸고 소개해준다는데 제갈규 정도는 팔아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팔아넘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만나게만 해주는 건데...

“그보다 정 소저. 제갈 형은 연모하는 소저가 있습니다만.”

“원래 연모하는 사람은 시간 지나면 바뀌기 마련이지.”

패기 넘치는 정여혜의 말에 적조는 부정적인 기색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 번 연모한 정인을 그리 쉽게...”

“하긴 제갈 형은 쉽게 바뀔 거 같기도 합니다.”

“?!”

적조는 제갈규란 놈이 대체 뭐하는 놈인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 * *

제갈규는 못마땅한 얼굴로 말을 몰았다.

팽주성의 초대를 귀찮다고 거절했다가 장로한테 한 소리를 들은 것이다.

-하지만 장로님. 그 회에 참가하는 놈들이라고는 온통 머저리...

-머저리 같은 소리 하고 있구나. 머저리 같은 소리 하고 있어! 내가 보기엔 네가 머저리다. 혼자 해결 못해서 남 지혜는 빌리는 놈이 무슨 거들먹이냐?

-...다녀오겠습니다.

제갈규가 보기에 한경에서 팽주성과 어울리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다 시서화가 뭔지도 모르는 얼간이였다.

밖에 나와서 술 취해서 머저리 같은 시만 읊어대는데 그걸 참아주는 게 얼마나 고통이겠는가.

하긴 재주가 뛰어난 놈들은 다 급제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갈 형님! 여깁니다, 여기!”

“어... 자네도 여기 참가했었나?”

낯익은 포두를 발견한 제갈규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예. 팽 형님께서 초대해주셨습니다.”

“사실 나도 그랬네. 그보다 주변이 어수선한데 무슨 일이 있었나?”

“말도 마십시오.”

연우혁은 손사래를 치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혁리욱과의 관계를 위해서 혁리욱이 했던 일들을 빼고, 실수로 하인들이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맹수 나오는 곳까지 들어가서 완전히 아수라장이...

“팽 형님께서 없으셨다면 큰일났을 겁니다.”

“팽 형께서 없으셨다면 정말 위험했겠군. 하여간 백면서생들은 이럴 때 쓸모가 없단 말이야.”

제갈규는 연우혁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팽주성을 존중하는 만큼 이번에 팽주성이 활약했다는 사실에 기꺼워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 소저가 팽 형한테 반하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규중의 규수가 그러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일이 커질 텐데 말이야. 하하.”

‘농담도 잘 못하시는군.’

연우혁은 제갈규가 참 농담을 못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며 말했다.

“제갈 형님. 제가 부탁이 있습니다.”

“음? 자네 부탁이라면... 무슨 부탁이지? 혹시 은자가 필요한가?”

“아니. 그런 부탁을 왜 합니까?”

“보통 그런 부탁들을 자주 하던데.”

제갈규는 머쓱한 표정으로 꺼내려던 전낭을 집어넣었다. 연우혁은 갑자기 조금 미안해졌다.

“정 소저께서 크게 놀라셨는데, 다른 사람들이 지어준 시가 별 효과가 없는 모양입니다. 제갈 형님께서 한 번 지어주십시오.”

“...그, 연 아우.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시가 술법 같은 게 아닌데.”

제갈규는 당황했다.

맹수 보고 놀란 사람이 한시 듣는다고 마음이 평화로워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연우혁은 끈질기게 제갈규를 붙잡고 부탁했다.

“평소 제갈 형님의 이름을 듣고 존경해왔다고 하셨습니다. 시와 상관없이 얼마나 감동하겠습니까.”

“그, 그래? 하지만 시라는 게 놀랐을 때 억지로 들으면 괜히...”

제갈규는 머릿속으로 압운(押韻)을 떠올리며 걸어갔다. 연우혁이 기대하는 만큼 뭔가 보여주고 싶었지만, 원래 시라는 건 초조해하면 더 잘 안 나오기 마련.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적조는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어정쩡하게 다가가는 제갈규를 보니 영 못 미더웠던 것이다.

‘괜찮은 거 맞나, 이거?’

멀리서 떠듬떠듬 읊는 제갈규의 모습에 적조는 갑자기 정여혜가 마음을 바꿔 ‘이게 아니야!’라고 할까봐 걱정이 됐다.

그러나 시가 끝나자 정여혜는 깊이 감동한 표정으로 제갈규를 쳐다보았다. 마침 그 때 얼굴을 가린 면사가 떨어지더니 정여혜의 얼굴을 드러냈다.

‘아니. 너무 개수작이잖나!’

적조는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저런 식으로 미인계를 쓰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제갈규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멈춰섰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한 남자처럼 보였다.

“......”

“보기 좋지 않소, 적 포쾌? 규 아우와 참 잘 어울리는군!”

“그, 그러게 말입니다.”

유쾌하게 웃는 팽주성의 모습에, 적조는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 * *

아침이 되자 연우혁은 숙소에서 눈을 떴다. 밖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제법 괜찮았다.

관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 숙소는 포두나 포쾌들이 머무르며 숙식을 해결하는 곳이었지만 사실 포두가 머무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보통 포두는 자기 집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연우혁은 집은 없었지만 포두로서 구역에 배정받은 안가가 있었다. 안가에서 잠을 청해도 됐지만 굳이 이 숙소에서 자는 이유는 이부자리를 새로 옮기는 게 귀찮기도 했지만 여기 숙소의 위치가 편해서였다.

“연 포두님 나오셨습니까!”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없을 법한데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한경의 길거리를 오고가고 있었다. 빨리 도착해야 하는 하급 관리부터 시작해서 남들보다 더 신선한 재료를 사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번루의 하인들, 오늘 아침 장사를 준비하려고 자리를 잡고 있는 좌판 상인들...

그리고 연우혁이 언제나 신세를 지는 건 이 중에서도 아침을 파는 노점상들이었다.

연우혁의 얼굴을 알아본 상인이 싱글벙글하며 손짓했다.

“평소 드시던 걸로 내오겠습니다.”

“고맙소.”

얼마 지나지도 않아 한경초반이라고 불리는, 달걀을 넣은 볶음밥과 만두, 미선(米線, 닭고기 국물 국수)이 나왔다. 생각보다 푸짐한 식사에 연우혁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이건 너무 후하지 않나?”

“연 포두님께 이 정도도 못 해드리면 어디 한경 시전의 상인이라고 하겠습니까? 염려 말고 드십시오. 포두님 오시기 전에 적잖게 팔았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말하게.”

연우혁은 평소보다 철전을 더 남기며 감사를 표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식사도 식사였지만 아마 평소 골칫거리였던 게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연우혁을 죽이려 하던 판관은 죽었고, 한경의 유력자 중 하나인 정 거사와 안면을 틀 기회를 잡았다.

귀찮게 굴던 살수들도 원하는 목적을 이루고 떠났으니 한경에 남은 골칫거리가 전부 사라진 기분이었다.

이제는 틈틈이 사건을 해결하며 느긋하게 무공을 수련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다가 눈치껏 한경의 관리들에게 인사도 좀 하고...

“연 포두님 나오셨습니까.”

“...?!”

안가에 일찍 출근한 연우혁은 적조와 적조의 부하 둘을 보고 경악했다.

“아니, 왜 아직도 한경에 있습니까? 다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연우혁은 어이가 없었다.

정여혜의 부탁을 들어줬으니 당연히 살수들이 떠났을 줄 알았던 것이다.

“실은 거기엔 사정이 있다.”

“사정이 있으니 남았겠지요. 대체 무슨 사정이길래?”

적조는 뺨을 긁적거리며 민망해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려니 영 머쓱한 기분이었다.

“그... 이야기를 좀 더 나눠보니, 숙부란 놈들이 생각보다 견제를 하는 거 같더군.”

“숙부 말입니까? 그거야 어느 가문이든...”

연우혁은 정여혜가 말한 숙부들을 떠올렸다.

어느 가문에서든 가주의 애정을 받는 존재는 질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여혜의 부모는 그 명문가 안에서도 튀는 존재 아닌가.

당연히 정여혜도 질시와 견제를 받았겠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딱 거기까지였다. 만약 숙부들이 더 과격하게 행동했다면 정여혜의 말도 달라졌으리라.

연우혁이 보기에 거기 가문의 숙부들은 뒤에서 험담은 해도 그 이상 나설 배짱은 없는 이들이었다.

“걱정이 되어서 그냥 떠날 수가 없었다.”

“정말 위험했다면 다르게 말했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 소저가 두 분을 조금 속인 것 같습니다만.”

정여혜와 깊은 대화를 나눠보진 않았지만, 연우혁은 상대방이 야심이 있고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다.

살막의 고수 두 명을 부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약한 척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알지. 알아. 나도 그런 건 눈치챘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살수를 자기 보표처럼 쓸 수 있는데 누가 혹하지 않겠냐. 그런데... 핏줄이란 건 어쩔 수가 없더군.”

“...적 대협께서 진짜 아버지십니까?!”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거냐!”

당황한 적조의 얼굴이 붉어졌다.

“장로, 그러니까 내 스승의 핏줄이란 걸 말하는 거지! 이런 미친 포두 놈아!”

“아. 죄송합니다.”

적조는 씩씩대며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방금 쉬던 한숨이 그냥 날아간 기분이었다.

“...내 스승, 장로라고 하겠다. 장로는 내 손으로 죽였다. 둘이 충돌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 살막에는 여러 파벌이 있다.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지만, 나도 물러설 순 없었고...”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들은 적 있는 이야기였다.

적조는 고민하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술 없나?”

“......”

“공짜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맨정신으로는 하기 부끄러운 이야기라서 그렇다.”

“...저기 포쾌들이 숨겨놓은 술이 있습니다.”

“제가 갖고 오겠습니다.”

적조의 부하는 연우혁의 지시대로 걸어가 찬장을 뒤졌다. 놀랍게도 숨겨놓은 술이 있었다.

‘이걸 어떻게 찾은 거지?’

탁주를 호리병째로 들이킨 적조는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망설였다. 연우혁은 속으로 의심했다.

‘뭐 얼마나 비겁한 짓을 했길래 이러는 거지?’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거의 동귀어진 하기 직전까지 갔다. 나는 출수한 초식을 거두지 않았지.”

“어설프게 물러서면 더 크게 다치니까요.”

“그래. 살수의 무공은 그게 더 심하고. 나는 죽일 기세로 초식을 뻗었다. 그런데 그 때...”

적조는 망망대해를 쳐다보는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장로가 초식을 거두더군. 다른 놈들은 보지 못했지만 나는 똑똑히 보았다.”

“...!”

“장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죽었지만, 나는 장로가 남긴 유언을 들은 것 같았다. 살수의 유언은 평소 하던 말이 그 유언이지.”

적조는 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막의 대주로서 한창 활약할 때에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멍청하게 보이겠지. 하지만 무림에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장로의 손녀가 날 속인다고 어쩌겠나? 애초에 초식을 멈추지 못한 내 잘못이지.”

연우혁은 대답 대신 일어서더니 창고로 걸어가 무언가 뒤적거렸다.

“뭐하나?”

포두는 오 포쾌가 숨겨놓은 값비싼 백주를 한 병 들고 왔다. 그리고는 적조의 빈 잔에 따라줬다.

“저는 멍청하다고 생각 안 합니다. 적 대협. 그저 당황했을 뿐입니다. 어느 누가 비웃겠습니까?”

“...비웃지 않아줘서 고맙군.”

적조는 씩 웃더니 잔을 들이켰다. 아까보다 향과 맛이 깊은 건 꼭 술이 좋아져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자네 밑에서 포쾌로 일하는 게 자네한테는 조금 부담이 될 수 있겠지만,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 진심이야.”

“?”

연우혁은 멈칫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던 것이다.

“어, 계속 포쾌로 일하실 겁니까?”

“괜히 수상하게 하인으로 들어가서 접근하는 것보단 백 배 나으니까...? 음, 녹봉은 안 줘도 되네. 그리고 손녀 일이 끝나면 정말 돌아가겠네.”

“......”

망설이던 연우혁은 에라 모르겠다 싶었다. 이미 잘했다고 술까지 따라줬는데 매몰차게 꺼지라고 하기는 또 뭐했던 것이다.

“포쾌 많아서 나쁠 포두가 어딨겠습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자!”

적조와 적조의 부하, 그리고 연우혁은 술잔을 들이켰다. 살막의 살수가 사라지고 새 포쾌가 태어나는 주연(酒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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