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66)화 (66/107)

청강은 흐른다 (4)

방금까지 눈앞의 포두는 꽤 영리하고, 어느 정도는 아첨할 줄도 아는 충직한 포두였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포두는 마치 사람이 아닌 귀신처럼 느껴졌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혈교도를 찾아낸 것도 믿기 힘든데, 어떻게 혈교도의 은밀한 내막까지 저렇게 낱낱이 고할 수 있단 말인가?

“설명해보거라!”

“예?”

“어떻게 알아냈는지 설명해보라고 했다. 나는 솔직히 너를 믿기 힘들구나. 지금 무슨 생각까지 하고 있는 줄 아느냐? 네가 혈교도에게 홀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하고 있다.”

“동지 어른을 의심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금의위가 나타났다고 들었을 때 다른 관리들은 놀랐지만 동지 어른은 불안해했습니다.”

“그걸로 단정 지을 순 없을 것 같은데?”

“금의위가 가짜라는 걸 알게 되자 다른 관리들은 안심했지만 동지 어른은 혼자 살기를 뿜으셨습니다. 저는 동지 어른께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지부 어르신께서 주연을 끝내고 배를 강가에 댈까 고민하시는데, 동지 어르신의 생각을 구하고 싶습니다’라고. 그러자 동지 어른께서는 매우 초조해하시며 반대했습니다. 이는 동지 어른이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계획은? 계획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지?”

주 공공은 자신도 모르게 포두를 재촉했다.

“계획 또한 지금 상황을 잘 생각하면 짐작하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저는 동지 어른이 데리고 온 하인들의 짐을 확인했습니다. 그 짐에는 동지 어른과 품계가 다른 관리들의 관복이 들어 있었는데 그걸 보니 동지 어른께서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혈교도가 추가로 배에 올라오기 위해서 가장 편한 방법은 이 청강을 오가는 어부로 위장하는 것입니다. 아까도 보았듯이 지금 이 시기는 어부들이 오가도 이상하지 않지요.”

“!”

가면을 쓴 동창의 무인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방금 연우혁이 한 말을 되새겼다.

이 짧은 사이에 짜낸 임기응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지혜였다.

동창의 어느 환관도 저런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리라.

“네 재주를 의심한 걸 사과하겠다.”

날카롭게 높아졌던 주 공공의 목소리가 다시 미성으로 변했다.

“아닙니다. 당연히 의심하실 수 있습니다.”

“재주 있는 충신을 의심하는 것만큼 멍청한 사람도 없겠지. 사과할 테니 받아줬으면 좋겠구나.”

“이러실 것까지는...”

연우혁이 겸양을 표하려고 했지만 주 공공은 듣지 않고 품에서 둥그런 은패를 꺼내 반으로 쪼갠 뒤 던졌다. 동창의 은패였다.

“네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이걸 꺼낸다면 한 번은 믿어주도록 하마.”

“!”

생각보다 더 후한 보상에 연우혁은 멈칫했다.

저 은패는 생각보다 더 대단한 보상이었다. 동창을 상대로 어떤 말이든 한 번은 통하게 해준다니.

막말로 ‘지부 어른이 역적입니다’ 같은 말을 해도 되는 것 아닌가.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됐다. 그보다 어부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그걸로 될 것 같으냐?”

“혈교의 무리는 사납고 끈질기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연우혁은 뻔뻔하게 예측하는 척을 했다.

동지의 하인이 관복을 준비했을 때부터 이미 어떤 식으로 적들이 올 지 알아차렸지만, 언제나 예상은 신중하게 해야 하는 법.

“어부로 위장한 혈교의 무인들이 제 때 오지 못한다면 동지 어른이나 하인이 나설 겁니다. 계획이 틀어질 때를 대비해 다른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혈교의 무인들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연우혁이 알기로 혈교의 무리는 두 무리로 나눠진 상태였다.

하나는 어부로, 하나는 천천히 내려오는 누각선을 따라 강가에서 움직이는 떠돌이로.

어부가 막힐 경우 동지나 하인이 나서서 두 번째 무리를 불러오게 되어 있었다.

주 공공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안 되겠다는 듯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자들까지 붙잡는 건 무리겠구나. 동지 어른과 하인을 지금 당장 붙잡아야겠다.”

마음 같아서는 이 근처에 있는 혈교도들도 일망타진하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숫자가 많았다. 동지나 하인을 만만하다고 내버려뒀다가는 안에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동지와 하인을 잡으면 혈교도들은 도망가겠지만...

“혈교도들은 내버려두셔도 괜찮습니까?”

“아쉽구나.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동지가 예상 밖의 소란이라도 일으킨다면...”

“제게 맡겨주신다면 동지 어른이 쓸데없는 짓을 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손발을 묶어놓겠습니다.”

연우혁은 자신감 있게 말했다. 어차피 다 알고 있는 상황이라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이렇게 날로 먹을 수 있을 때 동창 환관에게 눈도장을 찍어두는 것도 좋은 장사였다.

“정말로 묶겠다는 건 아니겠지?”

“......”

“농 좀 해봤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하하! 너무 감탄했습니다!”

아첨은 무시하고 주 공공은 고민했다.

혈교도들과 동지 본인이 눈치 못 채게 계속 손발을 묶는다니.

일개 포두를 믿고 맡기기에는 큰일이었지만, 오늘 이 포두가 보여준 모습은 이보다 더 큰일도 믿고 맡기게 싶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좋아! 포두 널 믿겠다. 나는 혈교도들을 일망타진할 테니, 너는 동지를 막거라.”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 되겠다 싶으면 나와라. 누각선에 있는 관리 두셋 뒤져도 사직에는 별 문제 없으니까.”

“하하. 농이 훌륭하십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었는데?”

“......”

***

동지(同知), 단송기는 위로는 지부 어르신을 모시고 아래로는 군졸과 장인들을 능숙히 점검하며 대소사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만드는 한경의 고관이었다.

이런 위치의 관리들은 지극히 미움 받거나 지극히 사랑받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단송기는 후자에 속했다. 판관들이면 모를까 단송기의 심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단송기의 마음속에는 깊은 시기와 욕망이 언제나 들끓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는 것 없는 지부 놈이 떵떵거리는 동안 자신은 손에 얻는 것도 없이 처신만 한 것이다.

그런 끓어오르는 속마음을 혈교도들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찾아왔다.

-한경의 지부는 사실상 단 대인이십니다. 저런 자를 언제까지 내버려두실 겁니까? 단 대인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면 우리도 단 대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지부를 죽이는 건 너무 위험한...

-죽일 필요 없습니다. 아니, 아무도 죽을 필요 없습니다!

-뭐라고?

-한경의 뜻있는 관리들이 조정에 지부를 고발하는 장계를 보낸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어떤 미친놈이 자기 상관을...

-어렵지 않지요. 단 대인께서 도와만 주신다면요.

혈교도들의 제안은 놀라우면서도 대담했다. 고민하던 단송기는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언제 오는 거지?’

주연이 중반을 넘었다.

이제 슬슬 어부들이 부딪치거나 소란을 일으켜야 했다. 아직 일어난 소란이라고는 아까 웬 잡놈들이 금의위를 사칭한 것밖에 없었다.

진짜 금의위인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가!

거나하게 취한 금 통판은 연우혁을 보며 찡긋거렸다.

“우리 진짜 도사 포두!”

“하하. 과찬이십니다.”

“혹시 다른 신통력은 없나?”

꾸벅꾸벅 졸던 지부 어른은 그 말에 솔깃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오, 연 포두! 신통력을 보여줄 수 있나?”

“부끄럽지만 지부 어르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흡!”

연우혁은 눈을 감더니 번쩍 떴다.

한경의 술 취한 관리들은 술렁이며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아까 가짜 도사와 달리 이 포두에게는 신통력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것이다.

그리고 관리들이 보기에도 이 포두에게 신통력이 있었다. 그렇지 않기에는 보여준 일들이 너무 놀라웠다.

“헉! 앞일이 보였습니다!”

“뭔가! 뭔가!”

“지금... 지금... 누각선의 방향을 틀지 않으면 다른 배와 부딪칠 겁니다!”

“확인해봐라! 확인해봐!”

지부는 신이 나서 외쳤다. 별 생각 없이 웃으며 지켜보던 단송기는 멈칫했다.

설마 지금 올라오는 다른 배가...?

관리들도 궁금했는지 객실 밖으로 나가 뱃머리에 섰다. 놀랍게도 저 멀리 어부들이 배를 띄우려고 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에이, 저걸 미리 본 거겠지.”

“아니야! 계속 안에 있었잖나.”

“누가 알려준 것 아닌가?”

“알려줄 사람이 누가 있다고...”

관리들은 신기해하며 다시 돌아갔지만, 단송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무리 봐도 저 어부들이 혈교도 같았던 것이다.

관졸들이 어부들한테 배를 띄우지 말라고 외치자 어부들은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이... 이 포두 놈이...?!’

최근에 소문이 자자하다지만 설마 한경의 고관들이 많은 자리에서도 저렇게 날뛸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단송기는 초조해졌다.

“불을 붙여라.”

“예?”

“불을 붙이라고! 배에 불이 나면 강가로 올라갈 거다.”

하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됐지만 워낙 안이 정신없어서 불을 붙이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송기는 이를 갈며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지부 어른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우혁에게 술을 철철 따라주고 있었다.

“연 포두가 이 침몰할 배를 지켜줬군그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하하.”

“또! 또 신통력을 보여주게. 내 미래는 어떤가?”

“지부 어른께서는 백 년 넘게 장수하시고, 관직은 나날이 출세하셔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앉게 되실 상입니다!”

“푸핫핫핫! 이 사람. 날 놀리나!”

“놀리다니요! 저는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저런 미친 간신배 새끼 같으니!’

단송기는 포두 놈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보통 포두 같은 놈이 이런 자리에 오면 얼어붙어서 말도 못 해야 하는데 저 놈은 간덩어리가 세 개쯤 되는지 자리를 휘어잡고 있었다. 무슨 조고(趙高)의 환생 같은 놈이었다.

“아앗! 또 보입니다!”

“뭐가! 뭐가 보이나!”

“이층, 배의 이층에 불이 났습니다! 끄셔야 합니다!”

“가봐라! 가봐!”

지부 어른은 하인들을 재촉했다. 튀어간 하인들이 돌아오자 지부 어른은 허겁지겁 물었다.

“불이 났더냐?”

“예! 놀랍게도...”

“술을 더 갖고 와라! 하하하!”

‘보통 조금 더 놀라야 하지 않나?’

연우혁은 불이 날 뻔했는데도 술을 더 갖고 오라는 지부의 배짱에 감탄하며 단송기를 힐끗 쳐다보았다.

표정은 인자하기 그지없었지만 속은 지금 연우혁을 반쯤 때려죽이고 있었다.

‘오늘 무조건 동창에 잡아 넘기지 않으면 다음날부터 새 살수 찾아오겠군.’

단송기는 하인에게 소곤거렸다. 혈교도에게 받은 약을 술에 넣어서 관리 몇을 토사곽란에 걸리게 할 생각이었다.

하인들이 조심히 준비해서 술병을 갖고 왔다. 하도 쌓인 술병이 많아서 약이 든 술이 올라오기까지 반 시진은 더 걸려야했다.

‘드디어...!’

“어엇!”

“왜, 왜 그러나 연 포두!”

“저기 술이 상했습니다! 드시면 크게 앓을 겁니다!”

“말도 안 되네. 연 포두.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상한 술을 올리겠는가?”

“하지만 정말입니다!”

지부 어른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술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술의 향과 색이 이상했다.

분노한 관리들이 벌떡 일어났다.

“이놈들을 당장!”

“관두게, 관둬! 좋은 자리 분위기를 망치지 말게. 여기 연 포두가 또 이 배를 지켜줬군그래!”

도사도 치워줬겠다, 관리들은 연우혁이 지부의 총애를 받아도 화를 내는 대신 오늘은 축하해줬다.

물론 단송기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대체 저 포두 놈은 뭘 잘못 처먹었길래 오늘 사사건건 일을 방해한단 말인가?

***

결국 누각선이 하류까지 가는 동안 혈교의 무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 멍청한 놈들! 이래서 무식한 무림인 놈들하고는 상종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단송기는 잔뜩 취한 채 분노를 터뜨리며 갑판 위를 걸어갔다. 옆의 하인들은 분노가 자신한테 날아올까봐 자세를 낮추고 눈치만 지켜봤다.

“그깟 배 하나 기어오르지도 못하는 놈들을 믿었으니 내가 머저리고 내가 병신이다! 이...”

“단송기.”

“?”

듣기만 해도 서늘한 목소리에 단송기는 고개를 들었다.

원래라면 ‘감히 어디서 함부로 이름을 부르느냐?’하며 분기탱천했겠지만, 고양이 앞의 쥐처럼 몸이 본능적으로 오그라들었다.

“동창에서 나왔다. 혈교와 손을 잡은 죄를 묻겠다.”

“......”

꿀꺽!

단송기는 비명도, 도망도 치지 못하고 눈만 끔뻑였다. 동창의 무인들이 순식간에 나타나더니 앞과 뒤를 막았다.

올라오란 혈교의 무인들은 없고 동창의 무인들이 어느새 배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단송기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 무슨. 오해입니다.”

단송기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변명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가면을 쓴 동창 무인 옆을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아까 그 난리를 피우던 젊은 포두가 멀쩡한 얼굴로 옆에 서있었다.

“...너, 너, 너!!!”

“?”

“네놈이 처음부터! 감히! 죽여 버리겠다!”

“!”

단송기는 지금 상황도 잊고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었다.

푹!

주 공공은 바늘 하나를 던져 상대를 점혈했다. 그리고는 재밌다는 듯이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포두만 있으면 자백시키려고 공을 들이지 않아도 되겠구나?”

“...오해십니다.”

연우혁은 대체 왜 범인들이 금의위나 동창 대신 자신부터 죽이려고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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