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67)화 (67/107)

청강은 흐른다 (5)

‘나 말고 금의위나 동창을 먼저 공격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당장 잡으러 온 원한을 따지지 않더라도 그게 더 이득이었다.

금의위나 동창이 쓰러져야 퇴로가 열리지 일개 포두 하나 죽는다고 무슨 퇴로가 열리겠는가. 그리고 혹시라도 인질을 잡을 수 있다면 그게 더 가치가 높았다.

주 공공은 쓰러진 단송기를 옆으로 차서 치운 뒤 옆에 있던 동창의 무인에게 말했다.

“근처에 있던 혈교의 무리는 잡았나?”

“예!”

“잘 했구나. 연 포두. 다 네 덕이다.”

자세를 낮추고 있던 동창 무인들은 깜짝 놀라서 눈썹을 꿈틀거렸다.

주 공공은 솔직히 모시기 편한 상관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다른 환관에 비해 신상필벌이 정확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 장점을 제외하면 지나치게 똑똑한 상관이었던 것이다.

다른 상관이라면 들키지 않았을 실수도 숨겼다가는 대번에 들통나서 엄하게 문책당하고 무난하게 일을 처리했다가는 반박할 수 없는 훈계가 돌아오니 주 공공 밑의 동창 무인들은 언제나 긴장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 그 주 공공이 일개 포두를 칭찬하고 있었다. 동창 무인들은 주 공공이 누군가를 칭찬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뭐하는 놈이지?’

“아닙니다. 그게 어찌 제 공이겠습니까? 동창의 무인들이 혈교의 무리들을 제 때 추적하지 못했다면 이들은 도망쳐서 한경을 어지럽혔을 테니, 제가 감사드려야 합니다.”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동창 무인들의 딱딱했던 표정이 살짝 부드러워졌다. 제법 분수를 아는 포두였다.

“아첨은 좋지만 적당히 하거라. 눈이 먼 장님이어도 누구 덕인지는 알 수 있었을 테니. 붙잡은 혈교 놈들은 각 몇이었지?”

“말을 타고 움직이던 자는 스물하고도 둘이었고, 어부인 척 움직이던 자는 여덟이었습니다.”

“알겠다.”

“?”

주 공공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연우혁은 멈칫했다.

자신이 알던 것과 숫자가 달랐던 것이다.

‘설마...?’

“주 공공! 제가 질문 몇 개를 던져도 되겠습니까?”

“그러도록.”

주 공공은 흔쾌히 허락했지만 동창 무인들은 마음 속으로 이 건방진 포두에 대해 적개심을 품었다.

기껏해야 흙길을 따라 도망치는 촌놈이나 잡았을 포두 놈이 뭘 안다고 감히 동창의 일에 질문을 던진단 말인가?

“어부들을 잡았을 때 주변에 빠져나간 자들이 있었습니까?”

“없었소!”

첫 질문에 동창 무인들의 불쾌함은 더욱 심해졌다.

빠져나간 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이 어찌 몰랐겠는가?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부들을 잡았을 때 그들은 물 밖에 있었습니까, 물 위에 있었습니까? 아마 물 밖에 있었을 테지요?”

“...그렇소. 계획이 틀어져서 땅 위에서 그물을 고치는 척을 하고 있더군.”

“계획이 틀어졌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척 자리를 떠나도 됐을 텐데 왜 그러고 있었겠습니까?”

“모르겠군. 아무 생각이 없었겠지.”

“혈교의 무리들은 치밀한 자들입니다. 제 생각에는 혈교의 무리들 중 도망친 자가 있습니다. 아마 우두머리 역할을 한 자일 겁니다.”

“!”

동창의 무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그럴 수 없소! 분명 그 어부들은 도망칠 수 없었단 말이오!”

“조용히 하거라.”

주 공공은 부하들의 입을 막고 연우혁에게 말했다.

“잡을 수 있으니까 말을 꺼낸 거겠지? 움직이거라! 포두의 뒤를 따르도록!”

아무렇지도 않게 명령을 내리는 까탈스러운 상관의 모습에, 동창 무인들은 속으로 다시금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적면혈뇌 악곤홍은 눈을 감고 이번 실패에 대해 돌이켜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실패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래 귀계란 것은 실패할 때도 있고 성공할 때도 있다지만, 실패한 귀계에는 반드시 실수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번의 음모에는 어떤 실수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송기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승선 전까지 감시했고, 언제라도 배에 올라탈 수 있도록 어부로 위장한 혈교 무인들을 두 달 전부터 대기시켜놨었다.

그것도 모자라 일이 틀어질 때를 대비해 떠돌이처럼 보이는 이들을 모아놓고 배를 따라 내려가게 했는데...

갑자기 계획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어부로 위장한 혈교 무인들은 관졸들이 무슨 앵속이라도 했는지 갑자기 막아서서 접근도 하지 못했고, 강가에 잠깐이라도 멈춰서야 할 누각선은 바닥에 기름칠을 한 것마냥 강 위에서 유유히 흘러내려갔다.

기슭에서 달려가던 부하들은 소식이 없었지만 악곤홍은 이미 반쯤 기대를 버린 뒤였다. 이렇게 일이 틀어졌다면 아마 부하들도 습격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횡래지액(橫來之厄, 갑자기 닥쳐오는 불행)이라고 하지만 악곤홍은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세상의 불운이란 것은 얼핏 보면 그저 이유가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걸 볼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뉠 뿐이었다.

“왜 그리 심각하시오?”

“하하, 이 술에 어울리는 시를 한 수 생각하고 있었소이다.”

악곤홍은 옆에서 거나하게 취한 관리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놀랍게도 악곤홍은 누각선에 타고 있었다!

어부로 위장해서 누각선에 접근하는 계획이 틀어졌을 때, 악곤홍은 망설이지 않고 혼자 나룻배에서 뛰어내려 깊이 잠수해서 누각선에 붙었다.

혼자서라도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만약 귀계가 틀어질 경우 혼자서라도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다.

다른 무인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빠져나갈 계획부터 꾸미지는 않았다. 무림의 어느 사람이 사소하게 일이 틀어졌다고 빠져나갈 계획부터 꾸미겠는가?

실제로 어부로 위장한 부하들도 접근이 막혔을 때 욕설만 조금 내뱉었지 일이 실패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적면혈뇌 악곤홍은 달랐다.

악곤홍은 계획이 조금이라도 틀어진 순간 바로 망설이지 않고 혼자서라도 빠져나갈 수 있게 움직였다. 만약 적들의 함정 때문에 틀어진 거라면 일순간도 낭비할 수 없었다.

어부로 위장한 다른 부하들은 일부러 강가에 남겨 놨다. 함정일 경우 잡혀줄 미끼가 필요했으니.

멍청한 무림인들은 책사들을 야유하고 조롱하겠지만 악곤홍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보라!

결국 잡히지 않은 건 악곤홍이었다. 밖의 상황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별다른 소란이 일어나지 않는 걸 보니 전부 다 잡혔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제 이대로 누각선이 멈추면 유유히 하선하면 됐다.

관리로 위장한 악곤홍을 어느 누가 의심하겠는가?

“잠깐, 잠깐만 조용히 해주십시오!”

하급 관리들로 떠들썩한 일층에 지부 어르신의 시종이 들어왔다. 다들 붉어진 얼굴로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르신께서 혹시라도 취해서 강에 빠진 분들께는 새 관복과 관모를 지급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와하하! 인심도 좋으시군!”

“자, 어서 나오십시오! 지부 대인께서 손수 하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거 그냥 빠질 거 그랬나? 지금이라도 빠지면 안 되나?”

“아서게! 들키면 곤장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몰라!”

관리들이 떠드는 동안 악곤홍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술병을 잡은 다음 관복에 슬쩍 부어버렸다.

관모와 관복 같은 물건들은 물에 젖지 않게 따로 준비해서 갖고 있다가 배 위로 올라와서 갈아입었지만, 머리나 몸에 남은 강물이 비린내를 풍길 수도 있었다.

괜히 옆에 있던 관리 놈들이 도와주겠답시고 등을 떠밀면 귀찮아졌다. 악곤홍은 꼼꼼히 술을 부었다.

강에 빠진 관리를 찾던 시종이 나가자 웬 젊은 포두 하나와 처음 보는 무인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악곤홍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포두 놈은 몰라도 저 무인들의 정체를 직감했던 것이다.

‘동창!’

동창의 무인들은 나름 정체를 숨기려고 노력해도 그 기색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환관이 드문드문 섞여있고 동창 특유의 무공이 뿜어내는 기세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 들어온 동창 무인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동창 놈들이 함정을 파고 있었구나!’

악곤홍은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이로써 밖에서 일어난 일을 확신할 수 있었다. 동창의 내시 놈들이 부하들을 모조리 붙잡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믿기 어렵다! 대체 어디서 들켰단 말인가?’

동창이나 금의위의 악명이 높다지만 악곤홍은 그런 허명에 넘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결국 귀와 눈이 없으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 아닌가.

그러나 이번 일은 그런 기색도 없이 대뜸 들켜버렸다. 도저히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악곤홍은 속마음을 감추고 표정을 관리했다.

동창이 이렇게 들어온 건 아마 관리들에게 있었던 일을 말하고 경고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혹시라도 거동이 수상쩍은 사람이 있다면 또 잡아보고.

가만히만 있는다면 절대로 잡아낼 수 없...

젊은 포두가 동창의 우두머리에게 속삭이자 우두머리는 망설이지 않고 바늘을 던졌다.

쉭!

그 바늘에 실린 막중한 내력에 악곤홍은 경악했다. 저건 떠보려고 던지는 게 아니라 정말 죽이려고 던지는 암수였다.

땅!

악곤홍은 벌떡 일어나 철선(鐵扇)을 휘둘렀다. 단단한 금속 부채가 바늘을 쳐내고 궤도를 바꿨다.

그러나 상대는 동창의 무인.

바늘 뒤에 또 다른 바늘 하나가 비틀리며 날아 들어왔다. 첫 바늘을 막아내면 그 뒤에 숨은 바늘이 방향을 틀어 움직이지 못하는 무인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초식 악지악각(惡知惡覺)이었다.

악곤홍은 이를 악물며 다른 한 손으로 바늘을 막아냈다. 바늘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손을 관통했다. 악곤홍은 멈추지 않고 다른 손으로 점혈에 나섰다. 독이라도 있다면 피가 돌면서 온몸에 독을 퍼뜨릴 테니까.

“독은 없으니 호들갑 떨지 말거라. 혈교의 버러지야.”

“동창의 말을 믿느니 소림 땡중 말을 믿겠다. 이 바쁜 어르신의 발목을 붙잡다니. 그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악곤홍은 허세를 부리며 빠르게 상황을 확인했다.

절정의 경지에 오른 뒤 어지간한 일류 고수는 자신 있게 상대하는 악곤홍이었지만, 이번 적은 영 마뜩치 않았다.

물론 상대가 자신보다 뛰어나단 건 아니었다. 악곤홍은 방금 일합으로 느꼈다. 동창의 우두머리는 자신보다 반 수에서 한 수는 아래였다. 그렇지 않다면 아까 같은 완전한 기습을 악곤홍이 손바닥 하나로 막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절정 직전의 고수치고는 믿기 힘들 만큼 내공이 심후했다.

바늘을 쳐냈을 때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막강한 내력이 담겨 있었다. 그 탓에 손바닥 하나를 내줘야 했다.

‘탐관 놈들이 영약을 얼마나 긁어모았길래 일개 환관이 저런 내공을 갖고 있단 말이냐?’

저런 고수를 상대하는 것도 까다로울 텐데 하필이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동창 무인들까지 있었다. 진법을 치고 덤벼들면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

“어떻게 널 찾아냈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혈교의 버러지야?”

“......”

악곤홍은 상대의 말에 끌려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무심코 귀를 기울였다.

“강물에 빠진 관리를 찾는 게 바로 함정이었다. 겁 많은 버러지라면 자기가 알아서 숨기기 위해 관복에 술을 부을 거라고 예상한 것이지!”

“...!”

표정을 관리하려고 했지만 악곤홍의 입술이 씰룩였다. 보기 드물게 평정심이 깨진 탓이었다. 그만큼 굴욕적인 말이었다.

적면혈뇌가 일개 환관한테 농락당하다니!

상대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승리감을 담아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대답도 못하는 거 보니 어지간히도 분했나보구나! 그 꾀는...”

“저, 주 공공.”

“...알겠다. 알겠어. 그 꾀는 내가 떠올렸다!”

순간 포두 놈과 환관이 짧게 이야기를 나눴지만 악곤홍은 머리를 굴리느라 위화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면 너희 혈교 놈들이 꾸민 암계는 어떻게 찾아냈는지도 궁금하겠지? 빨리 궁금하다고 말해봐라. 그러면 말해주도록 하마!”

“...궁금하군.”

굴욕으로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악곤홍은 씹듯이 내뱉었다.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이걸 알지 못하고 돌아가면 계속 곱씹게 될 것 같았다.

그러자 주 공공은 다시 한 번 폭소를 터뜨리며 깔깔댔다.

“그거야 너희 버러지들이 다섯 살 먹은 꼬마도 알아차릴 만큼 허술하게 계획을 짜서 그렇지!”

농락당한 걸 깨달은 악곤홍이 분노하며 행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보다 동창의 무인들이 먼저 진법을 완성시켰다.

주 공공의 이야기에 넘어간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큭!’

거대한 창이 노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낀 악곤홍은 진법에 달려드는 대신 빠져나가는 걸로 목표를 바꿨다. 재빨리 근처에 관리 하나를 붙잡고 방패처럼 들이댔다.

“내시 놈들 재주가 뛰어나구나! 하지만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을 거다. 여기 관리 놈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지 않다면...”

주 공공은 즉시 바늘을 던졌다. 관리가 죽던 말던 신경쓰지 않는다는 기세였다.

“이런 미친 내시 놈이!”

“보름 전에 몰래 공납품을 빼돌린 탐관 놈이구나. 여기서 죽으면 차라리 영광이겠지!”

“......”

기겁하는 관리들의 모습에, 옆에 있던 연우혁은 자신도 가면을 쓰고 왔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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