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68)화 (68/107)

청강은 흐른다 (6)

‘나중에 물어보면 동창 놈들이 칼 들고 협박했다고 해야겠다.’

연우혁이 주 공공을 원망하는 사이, 악곤홍은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지금 사태는 촌각을 다투고 있었다. 조금도 망설여서는 안 됐다.

‘동창 놈들한테 교의 수법으로 당할 줄이야.’

인질을 잡은 뒤 생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살수를 날리는 건 혈교에서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정파의 무림인들은 인질의 생사가 눈에 밟혀 제대로 된 전력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창에서 나온 놈들은 그런 짓을 하기도 전에 자기들이 먼저 인질을 죽이려고 했다. 독심(毒心)만 놓고 보면 가히 혈교와 버금갔다.

첫 번째 계획이 틀어졌다고 당황하는 건 하수나 하는 일. 악곤홍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크게 보법을 밟아 앞으로 뛰쳐나갔다.

혈원보(血怨步)라고 불리는 혈교의 절세 보법이었다.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가 펼치는 만큼, 그 기괴함과 난해함은 움직임을 쉽게 예측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놈이 주 공공을 노립니다!”

“?!”

포두 놈이 외치자 악곤홍도 놀라고 동창의 무인들도 놀랐다.

놀랐다 하더라도 몸은 그대로 움직이는 것이 고수. 악곤홍은 섬뜩하게 접근해 주 공공을 향해 철선을 뻗었다. 환의 묘리가 극대화된 병불혈인(兵不血刃)이란 초식이었다. 붉은 기운이 아른거리며 선실 안을 채웠다.

하지만 동창의 무인들도 만만치 않았다. 연우혁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망설이지 않고 진법을 움직여 주 공공 앞을 막아섰다.

꽝!

힘과 힘이 충돌하고, 진법을 지키고 있던 동창 환관 중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절명했다. 그러나 악곤홍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좋지 않다!’

동료 중 한 명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창 무인들의 표정은 미동이 없었다.

한 명이 죽어서 절정 무인의 내력을 크게 낭비하게 했으니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닌 것이다.

이 또한 혈교가 즐겨 쓰는 수법이었기에 악곤홍은 입맛이 썼다. 동창 놈들이 괴팍하고 지독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왜, 더 덤벼들지 그러느냐?”

주 공공이 비웃으며 바늘을 날렸다. 얼마든지 날릴 수 있다는 걸 자랑하듯이 아까와 똑같은 내력이 담겨 있었다.

동창의 무공은 천하에 적수가 없을 만큼 다양하고 깊다고 자부했다. 온갖 무공 비급을 자유롭게 구해 와서 연구할 수 있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금의위의 무인들은 사특하고 음기 넘치는 무공은 다루지 않고 금기시했지만 동창의 무인들은 그런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걸 증명하듯이 주 공공의 암기술은 음산하고 지독했다.

악곤홍은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진법에 다시 뛰어들어서 죽이고 싶었지만, 고자 놈들이 그걸 바라는 게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목숨을 뺏는 사이 시간이 끌리고 내공이 소모되면 그 뒤는 탈출 자체가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차라리 선실 벽을 부수고 등을 보인 채 빠져나가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다시 한 번 날아오는 바늘. 악곤홍은 혈원보를 펼치며 짐짓 진법에 뛰어드는 허초를 보여줬다. 아니나 다를까 동창 무인들은 진법의 자세를 다지며 격돌을 대비했다.

“주 공공! 놈이 선실 벽을 부수고 도망치려고 합니다!”

“...?!!”

그제야 악곤홍은 이상함을 깨달았다.

아까 덤벼들 때도 그랬듯이 저 포두 놈이 무언가 이상했던 것이다!

‘일류 정도인가? 심상치 않다!’

적면혈뇌란 별호는 투전판에서 딴 게 아니었다. 포두가, 그것도 저렇게 젊은 놈이 일류의 경지에 올랐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아까부터 보여주는 말도 안 되는 예상까지.

답은 하나였다.

‘놈이 우두머리다!’

주 공공이라고 불리는 놈은 호위쯤 되고 저 포두로 위장한 놈이 고관이 분명했다. 아주 기가 막힌 위장이었다.

실제로 악곤홍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잖는가?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저 포두로 위장한 고관 놈의 목숨도 여기까지였다. 악곤홍은 살기를 폭발시키며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포두 놈도 방향을 외치지 못했다. 바로 자신한테 덤벼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주먹과 철선의 그림자가 생겨나고 허공을 채웠다. 일류의 무인치고는 놀라울 만큼 정확한 초식과 투로였다.

악곤홍은 상대의 무재(武才)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저 나이에 고관인 만큼 가문이 있을 테니 내버려두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오를지 몰랐다.

‘여기서 죽여주마!’

철선을 다루는 악곤홍은 환(幻)과 변(變)의 묘리를 깊게 파고든 무공으로 교 내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퍼져나가는 붉은 아지랑이를 쫓아 눈동자가 조금만 따라가도 숨통이 끊어지고 절명하는 것이다.

유혈성천(流血成川)!

그러나 놀랍게도 포두 놈은 죽지 않았다. 수많은 허초 속에 숨어 있는 살초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더니 전력을 다해 권격을 날려서 막았다. 그리고는 빠르게 보법을 펼쳐 뒤로 거리를 벌렸다.

“금의위 놈이냐?”

“...그렇다!”

연우혁은 내친 김에 외쳤다.

어차피 위국권법도 같겠다 금의위로 생각되는 게 나았다. 방금 몇 합을 겨눴다고 벌써 손이 욱신거렸다. 혈옥갑이 있어서 그나마 이 정도지 아니었다면 피가 흘러내렸을 것이다.

‘이게 절정의 무인인가!’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은 본 적 있었지만, 그 무인과 직접 목숨을 걸고 싸워본 적은 없었기에 연우혁은 등골을 타고 오르는 전율을 느꼈다.

절정의 경지는 실로 놀라웠다. 무공이 마치 그 무인만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 같았다.

연우혁은 영안을 열고 싸웠기에 방금 본 혈원보(血怨步)나 철선의 초식들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저 초식들은 아무리 봐도 원래 저렇게 환(幻)의 묘리가 넘치는 초식들이 아니었다.

저 적면혈뇌란 고수가 자신에게 맞춰서 새로 무공을 재창립한 게 분명했다.

‘대단하다. 하지만...’

전율과 압박을 느끼면서도, 연우혁은 무림인으로서의 뿌듯함도 같이 느끼고 있었다.

상대는 분명 강했지만, 아예 권격을 나누지도 못할 만큼 차이가 나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남두성군의 힘을 빌리고 영안의 힘을 빌리고 혈옥갑의 힘을 빌렸지만, 연우혁의 무공이 없었다면 이렇게 짧게나마 동수를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공을 익히기 전과 비교하면 괄목상대할만한 차이였다.

‘특수한 외공을 익혔나? 아니. 다른 보물이라고 봐야겠군. 파사(破邪)의 보물도 있는 것 같으니...’

연우혁이 성취감을 느끼며 뒤로 물러나는 그 짧은 사이, 악곤홍도 금의위냐고 물으며 연우혁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손이 단단해서 처음에는 특수한 외공인가 싶었는데, 그보다는 보물일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이상할 만큼 허초에 속지 않는 걸 보니 마공을 파훼하는 보주 같은 것도 갖고 있을 것이다.

어이가 없었지만 금의위 쪽에 높은 놈이라면 설명이 됐다.

“!”

다시 달려들려는 그 짧은 사이 주 공공이 달려와서 악곤홍에게 일장을 날렸다. 음유하고 심후한 내력이 깊게 파고들자 악곤홍은 기혈을 달래며 몰아냈다.

“주 공공, 물러나십시오!”

연우혁은 기겁해서 외쳤다. 막더라도 저기 진법을 세운 동창 무인들이 막아야지, 높은 위치인 주 공공이 다치기라도 하면 연우혁까지 괘씸죄로 끌려갈 수 있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죽기라도 하면 연우혁도 같이 목이...

그러거나 말거나 주 공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법을 펼쳤다. 그걸 본 연우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구궁(九宮)! 놈의 보법은 구궁의 이치를 따르고 있습니다! 곤(坤)에서 태(兌)로 옵니다!”

주 공공은 듣자마자 바로 움직였다. 장법을 막아내며 반격할 준비를 하던 악곤홍이 이를 악물며 고함을 내질렀다.

“금의위 놈아.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어르신께서 혀를 자르겠다!”

치열한 암계가 가득한 혈교에서도 눈앞의 금의위 놈만큼 얄미운 놈은 없었다. 악곤홍은 언제나 냉철했던 두뇌가 흐려지고 분노로 뿌옇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離)에서 간(艮)으로! 경문(景門)!”

연우혁은 상대가 살기를 흩뿌리는데도 대꾸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절정의 무인을 상대할 때에는 초식 하나도 놓칠 수가 없었기에 영안도 그만큼 집중해서 사용해야 했다. 보기 드문 혹사에 상단전이 비명을 지르며 영기를 끌어냈다.

‘더 깊게...!’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으며 연우혁은 악곤홍의 초식을 보고 또 보았다. 본능적으로 위험함을 느꼈는지 악곤홍은 나무로 된 바닥을 발로 찍어서 연우혁에게 투박한 암기를 날렸다.

연우혁이 피하는 사이 악곤홍은 철선을 휘둘러 주 공공을 밀어냈다. 동창 무인들이 다시 진법을 펼쳐 악곤홍을 포위했다.

그러나 그 짧은 사이 악곤홍은 노리던 걸 해냈다. 순식간에 내력이 늘어나더니 악곤홍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선천지기를 격발시키는 혈교의 술법이었다.

“놈이 잠력을 폭발시킵니다!”

“안 그래도 죽이려고 했다. 이 주둥이 산 놈!”

“넌 비켜라!”

주 공공은 날카롭게 외치더니 동창 무인들과 합격진을 펼쳤다. 아까와 달리 짧은 사이 승부를 보려는 악곤홍은 물러나지 않고 철선을 휘둘렀다. 붉게 응축된 기운이 환관 둘을 절명하게 만들었다.

연우혁은 호흡을 가다듬고 악곤홍의 움직임을 응시했다.

쌓은 내공이 심후한 주 공공과 달리 연우혁은 악곤홍과 권법으로 손을 섞을 수 없었다. 혈옥갑으로 손은 멀쩡하더라도 내공이 몸 안 장기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탈혼비도밖에 없었다.

‘일격에 모든 걸 건다.’

연우혁은 기다렸다. 그러나 악곤홍의 기세는 절정의 고수답게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빈틈 또한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악곤홍보다 환관들이 먼저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깊은 위기감 속에 연우혁의 머리가 본능적으로 입을 움직였다.

“적면혈뇌, 널 찾아낸 건 나다. 이 어르신께서 찾아냈단 말이다. 고작해야 도망치려고 부하들을 강가에 남겨놓다니. 그런 얕은 속임수로 무슨 혈뇌란 별호를 거창하게 붙이느냐?”

악곤홍은 무시하고 철선을 휘둘렀다. 그러나 연우혁은 상대의 기세가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는 걸 영안으로 직감했다.

“어부로 위장했다가 실패했으면 떠나야 하는 법인데, 억지로 남아있는 모습에 멍청한 누군가가 수작을 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 같이 멍청한 놈을 상관으로 둔 혈교 무리들이 불쌍할 정도다! 단 동지도 참 안타깝구나. 좀 똑똑한 놈을 만났다면 이렇게 들키지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멍청한...”

혈교의 부하들이 있었다면 첫 번째 멍청하단 이야기가 나왔을 때 기겁을 했을 것이다.

악곤홍에게 있어서 멍청하단 말은 그만큼 금기에 가까운 말이었던 것이다. 전에 악곤홍의 뒤에서 몰래 조롱한 혈교 무인은 껍질이 벗겨진 채로 소금 창고에 던져졌었다.

자신을 농락한 놈이 그것도 세 번을 조롱하다니. 다른 상황이었다면 냉철하게 조롱을 무시했을 악곤홍이었지만, 이번 일을 실패한 탓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무림에서 가장 아픈 조롱은 반박할 수 없는 조롱이었다.

“죽여버리겠다!”

“!”

연우혁은 마침내 악곤홍의 빈틈을 보았다. 영안을 너무나도 강하게 오래 열고 있어서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기회를 잡은 이상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악곤홍의 빈틈이란 게 연우혁 자신을 죽일 듯이 달려오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탈혼비도를 던지는 순간 피할 틈도 그만큼 줄어든다!

그러나 연우혁의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전신의 내력을 쥐어짜듯이 던진 탈혼비도가 공간을 찢으며 날아갔다. 그 모습에 연우혁은 자신이 무림인이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목숨을 걸고 이런 짓을 벌이다니!

악곤홍은 철선 끝에 붉은 기운을 응축시켜서 휘둘렀다. 아무리 강한 내력이 담긴 비도라 하더라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일직선으로 날아오던 비도는 기묘하게 비틀렸다. 그 말도 안 되는 수법에 악곤홍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허공섭물!?’

생각치도 못한 신통력. 그걸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악곤홍의 가슴팍에 깊은 통증이 올라왔다. 치명상이었다.

악곤홍은 멈추지 않았다. 눈앞의 금의위 놈을 죽여버리기 위해 마지막 잠력을 짜내서 철선을 휘둘렀다.

놈이 기묘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도망치기 위해서 보법을 밟는 게 분명했다. 악곤홍은 먼저 움직이며 공간을 점했다.

그러나 놈은 기가 막히게 몸을 젖히며 어떻게든 거리를 벌렸다. 이 또한 악곤홍의 예상을 뛰어넘는 보법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못 죽일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악곤홍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악곤홍은 철선을 들어 마지막 초식을 펼쳤다. 혈원골수(血怨骨髓)였다.

연우혁은 상단전의 영기를 쥐어짜서 본능적으로 주먹을 뻗었다. 그 순간 혈옥갑이 붉게 달아오르며 악곤홍의 공격을 일부 흡수했다.

“...너!!”

상대가 혈교의 보물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악곤홍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 탓에 공격의 위력이 또 한 번 약해졌다.

“컥!”

포두가 뒤로 날아가는 사이 주 공공과 동창 무인들이 달려들어서 악곤홍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악곤홍은 핏발 선 눈을 감지도 못하고 절명했다.

‘살... 았나.’

연우혁은 그대로 혼절했다. 멀리서 환관과 주 공공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공... 전하, 죽지 않았습니다.”

“다행이구나. 살려라! 죽으면 너도 죽이겠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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