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강은 흐른다 (7)
잠에서 깨어난 연우혁이 느낀 건 극심한 허기와 욱신거리는 가슴팍의 통증, 그리고 늘어난 내력이었다.
“!”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 의원의 약방처럼 보였다. 탕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옆에는 저번에 본 적 있는 인자한 인상의 중년 환관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
“아. 일어났나?”
환관은 일어나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맥이나 호흡은 괜찮았지만 포두가 깨어나지 않아서 걱정이 태산이었던 것이다.
“자네, 거의 보름 동안 누워 있었네.”
“보름이나 말입니까?!”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어쩐지 몸의 체중이 줄고 허기가 극심하다 싶었더니...
환관이 웃으며 미음(米飮)이 든 사발을 내밀었다.
“천천히 먹게. 위장이 굶주렸을 때 빨리 먹으면 크게 다치는 법이야.”
“감사합니다.”
연우혁은 욱신거리는 통증에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악곤홍이 남긴 상처가 아직도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단 일격에 이런 상처를 남기다니. 연우혁은 새삼스레 운이 좋았다는 걸 깨달았다.
온갖 악조건과 난제를 주렁주렁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처를 입히다니. 연우혁이 갖고 있던 능력 중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몸이 그대로 꿰뚫렸을 수도 있었다.
미음으로 허기를 달랜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내상을 확인했다.
영안을 혹사한데다가 마지막에는 상단전까지 열어서 내공을 끌어다 쓴 만큼 기혈이 흔들리고 핏물이 올라왔었던 것이다.
다행히 내상은 완전히 나은 상태였다. 내력까지 조금 늘어난 걸 보니 연우혁은 환관이 좋은 약재를 쓴 게 아닌가 추측했다.
“제 부상을 중관께서 치료해주셨습니까?”
“그렇다네.”
“감사합니다. 내상이 심했을 텐데 어찌...”
“주 공공께서 태청단을 주셨네. 나중에 뵙게 되면 따로 감사를 표하는 게 좋겠군.”
“과연. ...무당의 태청단 말입니까?!”
연우혁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무당 태청단은 무당파를 대표하는 영약 중 하나로서, 도가의 비의가 담겨 있어 연우혁처럼 영기를 다루다가 다친 사람에게는 더더욱 요긴한 영약이었다.
물론 태청단의 힘은 내상이나 부상 해결에만 있지 않았다. 당연히 그 명성만큼이나 막대한 내력을 안에 품고 있었을 텐데...
그걸 그냥 내상과 부상을 치료하는데에 쓰다니. 연우혁은 자신의 목숨인데도 아까워서 피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영약 하나면 내공이 몇 년 치란 말인가?
“그런 아까운 짓을...!”
“자네 목숨이지 않나?”
‘아차.’
앞에 환관이 있다는 걸 깨달은 연우혁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저 같은 하급 관리를 위해 그런 영약을 쓰셨다는 게 안타까웠을 뿐입니다.”
“허허. 주 공공께서 자네를 좋게 보신 이유를 알겠군.”
중년 환관은 연우혁을 보며 흐뭇해했다.
주 공공은 광오하고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만큼 우대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환관은 눈앞의 젊은 포두가 쓰러진 동안 혈교 놈들을 어떻게 쫓았는지 전말을 간략하게 들었고, 그것만으로 이 포두는 우대를 받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이런 충성심까지라니.
“천천히 일어나게. 다 낫긴 했지만 아직 몸이 굳어 있을 테니까.”
“주 공공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럴 것 같았네. 공공께서는 먼저 떠나셨네. 정무로 바쁘시거든. 떠나시기 전에 내 목숨을 걸고 자네를 살리란 명을 하고 가셨지.”
“죄송하게 됐습니다!”
연우혁은 일단 숙이고 봤다. 없는 자리에서야 저잣거리의 백성도 고자 놈이라고 욕하지만, 동창 소속 환관은 그렇게 욕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정말 독하게 마음을 먹으면 삼족이 같이 죽어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환관이 자기 때문에 혼자 남아서 진맥을 하고 있었다니 얼마나 속으로 불만이 많았겠는가.
“아닐세. 당연히 내릴 수 있는 명이시지. 내가 괜히 말한 것 같군그래.”
걱정과 달리 중년 환관은 별다른 불만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자신을 허 중관이라고 편히 부르라고 말했다.
연우혁은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혈교 잔당들을 소탕하고, 남은 놈들을 심문했네. 동지가 혈교와 결탁했다니 간이 철렁했겠지.”
“한경은 괜찮습니까?”
“오히려 운이 좋은 편이지! 미리 찾아내지 않았나?”
“그런 뜻이 아니오라...”
원래 일반적으로 죄는 전염되지 않지만 가끔 연좌제가 터질 때가 있었다. 혈교 같은 사교도 그 중 하나였다.
동지가 혈교와 결탁했으면 그 위의 지부나 그 아래의 관원들도 혐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할 만한 의심이었고, 심지어 그 의심하는 당사자가 동창이라면 더더욱 포기하지 않고 할 의심이었다.
한경의 관리들 중 몇몇은 조정으로 압송됐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하. 관리들 중 책임을 물은 사람이 있나 궁금한 건가?”
“예. 어르신들만큼 충신도 없는 만큼 나랏일이 걱정됩니다.”
“...그, 그렇구만.”
나름 동창에서 산전수전을 겪었던 허 중관이지만 순간 당황했다. 한경의 관리들을 충신이라고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지부가 해명에 성공했거든.”
“지부 어르신께서 말입니까? 혈교와 관련된 일인데 어떻게?”
연우혁은 살짝 감탄했다.
조금 만만하게 본 게 사실이었지만 역시 한경의 우두머리로서 오랫동안 정무를 봐온 사람만큼 능력이...
“재산의 삼분지일 정도를 뇌물로 바치면 조정의 어느 관료도 해명을 들어주기 마련이지.”
“......”
연우혁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자, 허 중관은 그걸 다른 뜻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한경의 관리들이 자네한테 원한을 가졌을까봐 걱정하는 모양인데, 정말로 그럴 걱정은 할 필요 없네. 다들 잘 넘어갔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자네한테 고마워하면 고마워했지, 원한을 품지는 않을 테니.”
“감, 감사합니다.”
“또 이번에 자네만큼 공을 세운 사람이 어딨겠는가?”
“아닙니다. 동창의 다른 무인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해낼 수 있었겠습니까. 제가 조금만 더 뛰어났더라면...”
“너무 그럴 건 없네. 어차피 죽었을 놈들인데.”
“아닙니... 예?”
연우혁은 듣다가 이상해서 되물었다.
어차피 죽었을 놈들이라니.
동창의 무인들이 혹시 연우혁처럼 상단전 열린 사람들만 모아놓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건 어디 가서 말하지 말게. 자네한테만 말해주는 거니까. 자네가 너무 자책하는 거 같아서.”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주 공공을 따라다니는 동창의 환관들은 원래 궁 내에서 중죄를 지은 환관들일세. 가만히 있었으면 목이 잘렸을 이들이지. 대신 주 공공을 따라다니며 속죄하는 걸세. 그러니 죽어도 자네가 가엾어 할 필요는 없어.”
“!”
연우혁은 어쩐지 동창 무인들이 살벌하게 잘 싸운다 싶었다.
자기 목숨을 신경 쓰지 않고 덤벼든다 싶더니, 죄를 씻고 원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중관께서도 그렇습니까?”
“맞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지.”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연우혁은 사건의 냄새를 맡았다.
이렇게 인자한 환관이 목이 잘렸을 정도로 중죄를 지었다는 건 사건의 냄새가 났다.
황궁 안은 복마전인 만큼 선량한 관리도 눈 깜짝할 사이에 누명을 써서 목이 날아가는 곳 아닌가.
어쩌면 허 중관도 그렇게 누명을 썼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누명을 풀 수만 있다면...!’
주 공공이 연우혁을 좋게 봐주긴 했지만 크게 기대할 순 없었다. 저 정도 위치의 고관에게 연우혁 정도의 부하는 그저 머리 좀 굴릴 줄 아는 놈일 터. 아마 조정으로 돌아가면 보름 후에 까먹을 것이다.
그에 비해 허 중관의 누명을 풀어준다면 그건 구명지은 아닌가. 동창에 든든한 우군이 생기는 셈이었다.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중관께서 혹시 누명을 쓰신 게 아닙니까?”
“음!”
“괜찮으시다면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이 연 모가 재주는 부족하지만 얄팍한 지혜는 있습니다.”
“음. 그게 말일세...”
생각보다 말하기 힘든 일인지, 허 중관은 꽤 고민했다. 그러다가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사실 누명은 아닐세. 그냥 이제 와서 젊었을 적 일을 다시 말하는 게 좀 멋쩍어서 그랬을 뿐. 자네가 오해할까봐 말해주는 걸세. 알겠나?”
“...?”
“난 사실 황궁에 내 뜻으로 들어오지 않았네. 부모가 나를 팔아넘겼지. 젊은 나이에 얼마나 혈기가 끓고 답답했겠는가?”
“이해가 갑니다.”
젊은 나이에 황궁에 갇혀서 평생을 보내야 한다니. 어느 누구든 답답해 할 것이다.
“그래서 끓는 혈기를 달래기 위해 무공에 몰두했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자 야행을 나섰지.”
“협객행을 하신 겁니까?”
“아니. 젊은 관리들을 습격해서 양물을 잘라댔네.”
“......”
“그러다 잡혔지. 음. 자랑스러운 이야기는 아닐세. 부끄럽군그래.”
연우혁은 무의식적으로 영안을 열고 확인부터 들어갔다. 다행히 없는 사이 잘린 건 없었다.
***
정신 나간 환관이 떠나고 나서, 연우혁은 의방을 나와 포쾌들이 모이는 안가로 향했다.
포쾌들은 연우혁이 나오는 걸 보자 깜짝 놀랐다.
“연 포두님!”
“벌써 나으신 겁니까? 지부 어르신께서 더 요양하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난 괜찮다.”
연우혁은 손사래를 쳤다.
사실 저 말을 듣자 후회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원래 연우혁 같은 아랫사람은 잘 나갈 때 더 겸손하고 헌신적으로 굴어야했다.
아프다고 느긋하게 누워서 무공 수련하면 괘씸죄로 찍힐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참. 지부 어르신께서 포두님이 자기 아들이라고 하시며 우셨습니다.”
“...알려줘서 고맙군.”
적 포쾌는 빙글거리며 웃었다.
저런 고관이 와서 감동의 눈물을 펑펑 흘리다가 떠나는 모습을 또 언제 보겠는가. 한경의 포쾌로 있으니 참 별의별 광경을 다 구경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두 분이셔도 되는 겁니까?”
“따지면 더 넘지.”
“!?”
적 포쾌가 말문이 막혀 놀라워하는 사이, 다른 포쾌들이 말했다.
“포두님. 궁 판관께서 일어나시는 대로 와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알겠다. 지금 바로 찾아가야겠군.”
***
형관에 도착한 연우혁은 하인을 따라 궁 판관이 머무는 방 앞에 섰다.
“들어와라.”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연우혁은 인사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방 안은 매우 휑뎅그렁했다.
의자도, 탁자도 나무를 잘라서 붙인 것마냥 거칠었다. 지필묵을 제외한 다른 물건들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 흔한 찻잔도 없었다.
“??”
궁 판관의 지독한 성격을 봤을 때 금 의자와 금 탁자 위에서 금 붓을 놀릴 줄 알았던 연우혁은 놀랐다.
탁자 앞에 서있던 궁 판관이 손짓했다. 연우혁은 의자를 끌어서 앉으려고 했다.
“잠깐!”
“예?”
궁 판관의 고함에 연우혁은 당황했다. 궁 판관은 매우 고뇌하는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이번 일은 공을 세웠으니 앉는 걸 허락해주겠다. 앉아라!”
“...어, 원래는 앉으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멍청한 놈 같으니. 의자가 닳지 않느냐!”
“......”
연우혁은 그제야 궁 판관이 왜 서있는지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어쩐지 그렇게 탐관오리인 것 치고는 관복이 그리 비싼 비단이 아니라서 의아했더니 미친 수전노였던 것이다!
연우혁은 안 그래도 불편한 의자에 더 불편하게 앉았다. 궁 판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이번 일은 훌륭했다. 동창을 도와 혈교의 간자를 찾아내다니. 지부 대인께서도 기뻐하고 계신다.”
“다 판관 어르신의 가르침 덕분이십니다!”
“말이라도 고맙구나! 하여간 한경 관리들의 명성을 네가 지켰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쿵!
궁 판관은 작은 궤짝을 들어서 탁자 위에 올렸다. 궤짝을 열자 안에는 번쩍이는 은이 꽉 차있었다.
“받아라! 네 몫이다.”
“감... 감... 감사합니다!”
연우혁은 한경에서 관리로 일하면서 이렇게 감동한 적이 없었다.
지부 어르신이 준 건지, 아니면 다른 관리들이 각출한 건지는 몰라도 이런 은자라니.
‘바로 영약부터 사야겠다.’
“내게 감사할 건 없다. 모용세가가 네게 준 거니까.”
“...예? 무슨 소리십니까 그게?”
“뭐냐, 못 듣고 온 거냐? 하긴. 포쾌들은 몰랐겠군.”
궁 판관은 연우혁이 쓰러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아무리 동창과 함께했다지만 혈교의 절정 고수인 적면혈뇌를 쓰러뜨린 건 대단한 공로였다.
그리고 이런 공로는 관아보다는 무림에서 훨씬 더 인정받기 쉬웠다.
무림의 소문은 천리마보다 빨랐다. 놀랍게도 이틀 전, 모용세가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궁 판관에게 부탁했다.
요즘 소문이 자자한 그 포두의 재주를 좀 빌려달라고!
그리고 궁 판관은 적절한 은자만 낸다면 백성의 고충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된 거다.”
“판, 판관 어르신. 이걸 절 다 주시면 어르신께서는...”
연우혁은 모용세가의 이름이나 무림의 소문보다 은자의 양부터 확인하려고 했다.
원래 이런 건 혼자 먹으면 탈이 날 수가 있는 것이다.
궁 판관은 연우혁의 말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뛰어난 지낭답게 하나만 들어도 열을 생각할 줄 알았다.
“난 이미 따로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