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출도 (1)
연우혁은 자신이 아직도 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정도는 해야 한경의 정관 노릇을 할 수 있는 거구나!’
부하가 없는 사이 제안을 받고 교섭까지 끝낸 뒤 자기 몫도 알뜰살뜰 챙겨놓다니.
“그러니 날 생각할 건 없다. 기특한 녀석 같으니. 한경의 포두가 다 너 같다면 내가 마땅히 베개를 높게 하고 근심 없이 잘 텐데 말이다.”
“판관 어르신께서 마땅한 몫을 챙기셨다니 너무나도 안심이 됩니다. 저도 밤에 잠을 못 잘 뻔했습니다. 하하.”
속으로는 욕을 좀 했지만 연우혁은 겉으로는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연우혁이 관직을 다 내려놓고 무림인으로 살아갈 게 아니라면 이런 식의 상납은 반쯤 필수적이었다.
당장 한경의 포두가 다른 지역에 가서 일을 하고 오는데 상관을 무시하고 멋대로 움직일 수는 없지 않은가.
저건 연우혁이 비판을 받으면 자신의 이름으로 막아주는 대가라고 할 수 있었다.
‘아예 못 받는 것보다는 나눠서 받는 게 낫다.’
훼방으로 의뢰를 못 받는 것보다는 이렇게 보상을 나누더라도 받는 게 무조건 이득 아닌가. 연우혁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어르신.”
“이상한 점?”
궁 판관은 인상을 팍 일그러뜨리더니 연우혁의 궤짝 안의 은을 휘적거렸다. 마치 무언가 결점이라도 찾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신중하게 말했다.
“가짜 은은 아닌데?”
“...그걸 말한 게 아닙니다. 모용세가가 저를 부른 게 이상하단 겁니다.”
아무리 연우혁이 보여준 재주가 신통하다 하더라도 결국 일개 포두의 한계를 벗어날 순 없었다.
한경 사람들이야 직접 경험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연 포두께 지혜를 부탁드려보세!’라고 하지만 떨어진 지역의 모용세가가 그런 소문만 듣고 연우혁을 높게 평가하기는 힘들었다.
연우혁과 인연이 있는 몇몇 무림인들의 말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개인의 신분이나 명성이 이런 부탁에는 필수적인 것이다.
하물며 오대세가 중 하나인 모용세가라면 더더욱 일을 맡기는 데에 까다로울 터. 일개 포두를 이렇게 부르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궁 판관은 연우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연우혁은 부담을 느끼고 물었다.
“제가 이상한 질문이라도 한 겁니까?”
“아니다! 그저 네가 오랫동안 누워있었다는 게 사실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소문을 하나도 모르는 걸 보니. 진충비도가 뭔지 아느냐?”
“무공 초식입니까?”
연우혁은 ‘충성을 다한다’는 진충(盡忠)을 보고 금의위나 포쾌의 새 무공이 나왔나 싶었다.
“네 별호다.”
“...예?”
“네 별호라고 했다. 무림인들은 원래 붓으로 공덕을 세우는 것은 하찮게 여기고, 칼로 악인을 베는 건 귀하게 여기지. 네가 혈교의 무리를 죽였으니 무림인들이 널 인정하는 것도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
그제야 연우혁은 자신이 쓰러져 있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무림의 소문이 천리마보다 빠르다는 게 이런 뜻이었다니!
일개 포두로서 신통한 재주가 있는 정도라면 굳이 오대세가에서 초청하지 않겠지만, 별호를 갖고 있는 신진 고수가 포두로 지내는데 신통한 재주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굳이 따지자면 이번 혈교의 고수를 죽인 일로 연우혁은 무림의 신진 고수이자 기인이사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무림에 괴팍한 기벽을 가진 고수들이 한둘이 아닌데 포두로 지내는 게 흠이 될 리 없었다. 연우혁은 자신이 무림인으로서 인정받았기에 모용세가로부터 초대를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
다른 젊은 무림인이었다면 ‘내가 이름을 날렸구나!’하면서 패기 넘치게 함성을 질렀겠지만 연우혁은 곤혹스러워했다.
일단 무림인으로서의 명성이 당장 쓸모가 없을 뿐더러(판관 되는 일에 별호가 있다고 더 쉬워지진 않았다), 하필이면 그 명성이...
‘혈교 놈들 장로 죽인 원한이잖아!’
나름 동창 무인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신은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누워 있는 사이 무림에 ‘연우혁이 혈교 장로를 죽였다더라’라고 소문이 돌았다니.
연우혁이 혈교 무인이어도 동창보다는 연우혁 먼저 죽일 것 같았다. 전자보다 후자가 만만하지 않은가.
궁 판관은 연우혁이 이해한 것 같자 진지하게 충고했다.
“포두로서 무공을 닦아 명성을 날리는 것도 좋지만, 명성에 취해 관리로서 본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라. 세간의 명성만큼 헛된 것도 없는 법. 진정 남는 건...”
“백성을 아끼는 애민(愛民)의 공덕 아니겠습니까?”
연우혁의 가식적인 대답에 궁 판관은 미친 놈 보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은자를 말한 거다. 무슨 공덕비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느냐?”
“......”
* * *
‘긍정적인 면이 없지는 않다.’
연우혁은 혈교 살수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치고 상황의 좋은 면을 보기 위해 애썼다.
일단 별호가 붙고 신진 고수로 인정받는다는 건 확실히 이득이었다.
앞으로 한경에 찾아오는 무림인이 취해서 칼 휘두르고 객잔 의자로 무공을 펼쳐도 ‘내가 진충비도인데 너는 누군데 날 무시하느냐’하면 어느 정도 설득이 될 테니까.
무림에서 인정받는 별호라는 건 생각보다 묵직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모용세가의 은자도 별호가 붙지 않았다면 받지 못했을 것 아닌가.
그건 그런데...
‘하필이면 왜 비도야?’
연우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진충이란 별호에는 별 불만이 없었다.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다른 관리들 앞에서는 제법 호감을 살 수 있는 별호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뒤의 비도는 조금...
‘포두보다는 사파,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정사지간의 무림인 아닌가?’
별호에 암기 들어가는 무림인치고 평가 좋은 무림인이 드물었다. 아무래도 암기란 것이 비열한 사파 마두가 쓰기 좋은 물건인 것이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정파무림인은 대부분 당문 소속이었고(연우혁은 이 평가가 과연 공정하게 이뤄진 건지 약간의 의심이 있었다), 그 외는 정파로 인정받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으음. 그래도 진충이 앞에 있고, 포두란 직위가 있으니 어느 정도 정파로 인정을 해주겠지.’
연우혁이 아무 이유 없이 정파무림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게 아니었다.
당장 떠돌이 무림인이 낯선 곳에 도착해서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어느 문파의 문을 두드린다면, 그 무림인이 정파냐 사파냐 혹은 정사지간이냐로 대접이 달라졌다.
정파무림의 당당한 일원이라면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같이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지만, 정사지간의 무림인이라면 운 좋을 경우 쪽방이고 운 나쁠 경우는 쫓겨나는 것이다.
사파의 마두라면?
애초에 그런 마두는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다. 괜히 두드렸다가 칼 맞을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사파무림의 무인들은 사파 문파의 문을 두드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사파 문파는 같은 사파라고 해서 손님을 대접하거나 하진 않았다. 죽이고 뺏으면 모를까.
연우혁이 생각하기에도 무림에서 사파 무인으로 살아가는 건 매우 힘들고 고된 일이었다. 절대로 그쪽으로 인정받아서는 안 됐다.
“형장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
언덕의 모퉁이를 돌고 말을 잠깐 쉬게 할 겸 빗질을 해주는 사이, 세 명의 무림인들이 뒤에서 나타났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던지는 질문에 연우혁은 경계의 시선부터 던졌다.
‘혈교의 살수일지도 모른다.’
영안을 열고 훑어봐도 다행히 적대심은 없었지만, 연우혁은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가 연우혁의 영안보다 뛰어나게 살기를 숨기는 혈교의 살수일지도 몰랐으니까.
“아. 죄송합니다. 먼저 제 소개부터 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저는 진검보의 장인형이라고 합니다. 혹시 최근에 적면혈뇌를 일격에 죽인 진충비도 연 포두님이 아닌가 싶어 여쭤봤습니다.”
“......”
연우혁은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를 만큼 아찔해졌다.
“연 포두 맞소. 그리고 일격에 죽인 게 아니오. 여러 명과 합공을 해서...”
“역시! 이런 곳에 관복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길래 혹시나 했는데!”
연우혁의 해명은 듣지도 않고, 세 명의 무림인들은 알아서 기뻐했다.
“탈명검 단 대협께서도 포두님을 많이 칭찬하셨습니다. 그 때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명성을 떨치실 줄이야.”
“저는 진검보 소속의 연림량이라고 합니다, 연 대협!”
무림인들이 동경의 눈빛을 던지자 연우혁은 새삼 자신이 벌인 싸움이 대단한 싸움이었다는 걸 느꼈다.
무림에서 명성은 죽은 사람에게서 산 사람으로 넘어가는 법.
진검보의 무인들이 이렇게 존경을 표할 줄은...
“독혼수 대협을 스승으로 두고 사사했다고 들었습니다. 실로 기재(奇才)는 기재를 알아보는 법이군요!”
“?”
무심코 듣던 연우혁은 멈칫했다. 무언가 이상한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다.
“누굴 스승으로 뒀다고 하셨소?”
“독혼수 당등 대협이 암기술을 가르쳐주셨잖습니까?”
“...?!”
연우혁은 뭔 개소린가 싶었다.
따져 묻는 연우혁에게, 진검보 무인들은 자신이 들었던 소문을 그대로 전달해주었다.
-들었나? 한경의 연 포두란 자가 혈교의 장로를 일격에 죽였다는군! 비도 한 자루로 말이야!
-놀라운 일일세! 비도 한 자루로 혈교의 장로를 죽이다니. 그런 고강한 암기술은 근래 들어본 적이 없네.
-그런 무공이라면 분명 사문이 있을 터, 연 포두는 누구에게 무공을 사사한 것인가?
-저번에 듣기로는 독혼수 당 대협이 연 포두와 매우 친밀한 사이라고 들었네.
-아하! 당 대협께서 암기술을 사사하신 거로군. 당문의 무공은 아니더라도 분명 비범한 암기술일 걸세.
-그렇다면 당문과 아예 관계가 없지도 않군. 진충비도! 그래, 진충비도가 별호로 딱일세그래!
-훌륭한 별호다, 훌륭한 별호야! 충성스러운 포두이자 반쯤은 당문의 무인이니, 참으로 절묘하구만!
“......”
연우혁은 영안을 열지도 않았는데 두통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비도가 왜 붙었나 싶었는데 당문과의 친분 때문에 붙었다고??
‘이런 미친...’
무림에 떨어진 이후 이렇게 억울한 적은 처음이었다.
제갈세가, 하북팽가, 무당파 등 여러 좋은 문파를 내버려두고 하필이면 당문과 엮여 있다는 소문이 나다니.
진심으로 억울했다. 소문을 퍼뜨린 놈들을 모조리 잡아가두고 싶을 정도였다.
“저, 연 대협...?”
“당 대협께서 가르침을 주시긴 했소. 하지만 당문의 무공은 아니었지.”
연우혁은 최대한 침착을 되찾고 말했다. 무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압니다. 당가 직계의 무공을 외인이 어떻게 전수받겠습니까.”
“가르침만으로 그런 경지에 오르다니, 두 분 모두 훌륭하십니다!”
“...세 분은 어디로 가시오?”
연우혁은 주제를 바꿨다. 더 이야기를 해봤자 분노만 치솟을 것 같았다.
이미 퍼진 소문을 어쩌겠는가?
“저희도 영동으로 갑니다. 모용세가의 일을 한몫 거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
목적지가 같자 연우혁은 놀라워하며 물었다.
“모용세가에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길래...?”
“예? 모용세가는 지금 청괴산장을 토벌하고 있습니다.”
무인들은 연우혁이 너무 당연한 걸 묻자 의아해했다.
이미 연우혁도 모용세가로부터 초청을 받았다고 소문을 들었는데, 정작 당사자가 모용세가가 하는 일을 모르다니?
연우혁은 조금 머쓱해졌다.
재주를 부탁한다고 해서 당연히 사라진 사람을 찾거나 무공을 찾거나 혹은 범인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산장을 토벌하는 일이라니.
“급히 달려온 탓에 자세한 걸 듣지 못했소. 청괴산장은...”
“이 인근에서 악명이 자자했던 놈들이지요.”
보통 산장이라고 불리는 가문들은 외진 곳이라는 특색을 살려 가전무공 수련에 몰두했지만, 가끔 산의 특색을 이용해 다른 부업에 나서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산적질이었다.
청괴산장은 주변을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무자비하게 수탈하는 걸로 악명이 높았다.
특히 가전무공 중 장법이 일절이었는데 한 쌍의 육장(肉掌)이 휘둘러지면 나름 무공을 익힌 무림인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문제는 그렇게 쓰러뜨린 사람 중 모용세가의 사람도 있었다는 점이었다.
청괴산장의 마두들은 나와서 부복하는 대신 산장에 웅크렸고, 분노한 모용세가는 핏값을 받아내기 위해 토벌대를 보냈다.
“청괴산장의 지세가 험악하고 술법이 교묘해서 꽤 버티는 모양입니다. 저희 진검보뿐만 아니라 여러 문파가 요청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그럼 나는 왜 부른 거야?’
연우혁이 생각에 잠긴 사이 다른 무림인이 말했다.
“아마 대협께서 산장을 공략할 만한 좋은 꾀를 내주길 바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럴 리가. 난 군사도 아니오. 아마 좌중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해결할 사람을 부른 거겠지.”
* * *
“진충비도 연 포두께서는 저 산장을 공략할 만한 좋은 계책을 내주셨으면 하오.”
“......”
모용세가 무인의 말에 연우혁은 어이가 없었다.
“저는 군사(軍師)가 아닙니다. 그런 좋은 계책을 쉽게 낼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모든 군략을 맡길 생각은 없소. 우리 모용세가에도 군사들은 있으니. 다만 뭐든지 떠오르는 게 있으면 말해달라는 것이오. 저 앞을 막고 있는 진법의 틈을 찾을 계책이나...”
“저 진법 말입니까? 저건 해제할 수 있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