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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71)화 (71/107)

무림출도 (2)

모용세가 가주의 둘째, 냉검공자 모용현은 눈앞의 포두가 하는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사람이 하는 말을 한순간에 뒤집다니.

‘혹시 천기수사 님이 잘못 보신 것 아닌가?’

연우혁은 몰랐지만 연우혁을 모용세가에 추천한 건 천기수사 제갈우였다.

청괴산장의 지세와 술법이 워낙 까다로웠기에, 무림에 지혜로 명성이 높은 제갈세가의 두뇌를 빌리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천기수사는 제안을 거절했고 대신 최근에 진충비도란 별호를 얻은 신진 고수를 추천했다.

천기수사가 추천한 만큼 어쩔 수 없이 초빙했지만, 모용현은 이 연우혁이라는 포두가 영 탐탁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사천당문과 인연이 깊은 무인이기 때문이었다.

정파무림에서도 ‘당문의 무인이 난폭하게 구는 꼴은 사파와 다름없다’란 말이 종종 나왔고 모용현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쯤 사천당문 출신에 일부러 포두로 지내는 괴인이라니. 성격이 얼마나 괴팍하고 천박할지 짐작이 갔다.

“진법을 해제할 수 있다고 했소?”

“예.”

“지금 여긴 전장이나 마찬가지요. 아무리 세가에서 초빙한 손님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허언을 해서는 아니 되오. 다시 한 번 묻겠소. 정말 해제할 수 있소?”

모용현은 연우혁의 말을 의심하고 압박하려고 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애초에 모용현보다 더 미친놈들을 많이 상대해 본 연우혁이었고, 무공의 경지도 그렇게 차이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정말 해제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 진법은 흑사청요진 아닙니까?”

“!”

진법의 이름을 바로 맞히는 연우혁의 모습에, 모용현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모용세가에서 데리고 있는 군사들은 산장을 막고 있는 진법이 어떤 진법인지 맞히는 것만 해도 보름이 걸렸던 것이다.

‘과연 천기수사 님. 이 포두는 괴팍할지 몰라도 실력은 틀림이 없군!’

한결 공손해진 태도로 모용현은 말했다.

“맞소. 진충비도의 실력이 허명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겠소. 진법을 해제하기 위해 조언을 듣고 싶소.”

“저 진법을 뚫지 못하고 헤매는 데에는 계속해서 안의 방위가 움직이고 변화해서일 겁니다.”

영안으로 진법을 뚫어져라 관찰하며, 연우혁은 입을 열었다. 모용현은 조금 더 감탄했다.

“그렇소. 세가의 군사들도 그렇게 말했소.”

“진법은 미시(未時)에 강해지고 축시(丑時)에 약해질 테지요.”

“맞소!”

모용현의 목소리에 흥분과 기대감이 맴돌았다. 세가의 군사와 문객들이 머리를 맞대고 짜낸 재주를 이 포두는 단숨에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축시 때에도 진법을 뚫을 수는 없었소. 왜냐하면...”

“산장의 무림인들이 상문(傷門)과 두문(杜門)에서 목숨을 걸고 막아서면 진법을 뚫기 쉽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모용현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무림인들 모두가 연우혁을 놀라움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진충비도가 신통력이 있다더니 사실이로구나!’

‘한경에 앉아 백 리 밖의 일이 굴러가는 이치를 본다더니...’

‘당문과 인연이 깊어 괴팍한 자일 줄 알았는데.’

사실 방금 연우혁이 한 말은 옆 천막의 계서(計書)에 적혀 있던 말을 영안으로 보고 한 말이었다. 본가에 보고하기 위해 적은 내용이라 꽤 자세했다.

‘어떻게 된 게 속임수 쓰는 것에만 더 능숙해지는 기분이군!’

평소 하던 대로 사람들이 완전히 집중하자 연우혁은 슬슬 영안으로 본 답을 말해줘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진법을 미시 때 공략하십시오.”

“...?!”

뜬금없는 말에 무림인들은 당황했다.

“미시에 가장 강해지는 진법인데?”

“꽤 오랫동안 산장에 갇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들이 지나치게 생기 넘치지 않습니까. 분명 다른 암로(暗路)가 있을 겁니다.”

“!”

진법은 사실 수비하는 쪽에서 작정만 하면 거의 약점이랄 게 없었다.

모든 진법은 약점이 있다지만 애초에 그 약점 또한 펼친 사람이 더 잘 알 것 아닌가. 약점만 집중적으로 막아서면 보완도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진법에 약점이 없더라도 그 진법을 펼치는 사람들에게는 약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지나가지 못하는 진법을 계속해서 펼친다면 산장 안의 무인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게 됐다.

아사(餓死)는 피하고 싶었는지 진법 밑 땅 속에는 샛길이 나있었다. 가장 진법이 강할 때는 적들이 공격하지 않으니 그 틈을 타 몇 명이 땅 아래로 빠져나가는 게 분명했다.

“그 때 공격하면 적들이 서둘러 나오거나 움직이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겁니다.”

“암, 암로는 어느 방향 쪽으로 나있겠습니까?”

듣던 세가의 무림인 중 한 명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멍청한 질문에 모용현은 수치심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까지 물어보다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

“죄, 죄송합니다.”

포두가 상을 차려줬으면 암로의 위치 정도는 모용세가에서 찾아야지, 그것까지 알려달라고 떼를 쓰다니.

모용세가의 무림인은 낯빛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연우혁은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제가 천문을 보았는데 저쪽 같습니다.”

“......”

머쓱하고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누군가 속으로 생각했다.

‘당문이 아니라 제갈세가의 핏줄 아닌가?’

그러고 보니 천기수사가 적극적으로 추천했는데 설마...?

* * *

“샛길이 들켰다고?”

청수귀마는 얼굴을 돌처럼 딱딱하게 굳혔다.

청괴산장은 이미 가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밖에서 흘러 온 마두들이 많았다. 산적질을 하기 위해 마두들을 끌어모은 만큼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런 만큼 난폭한 청괴산장의 마두들을 이끄는 건 만만치 않았다. 같은 가문의 일원이라면 억지스러운 규율도 어느 정도 참고 견딜 수 있었지만 마두들은 그런 걸 참지 못했다.

그런데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샛길이 들켜서 봉쇄당하다니. 당장 굶어죽진 않겠지만 향락에 빠져 살던 마두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불만을 토해낼 것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만일의 경우 청수귀마 본인이 빠져나갈 길도 사라졌단 뜻이었다.

“이 땡추 놈. 진법도 그렇고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지 않았나?”

“당황스럽군! 이렇게 알아차릴 줄이야.”

머리를 길게 기른 파계승, 흑륵존자는 놀라워하며 염주를 굴렸다. 청수귀마는 한 대 갈기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지금 마두들을 끌어가야 하는 만큼 내분을 일으켜서는 안 됐다.

“샛길을 들키면서 흑사청요진도 같이 파훼당했다. 내일 해가 뜨는 대로 고갯길 앞까지 모용세가 놈들이 들어오겠지. 여기 턱밑까지 들어온단 거다. 여기 마두 놈들이 그걸 보면 절반은 도망칠 거다.”

“아직 절망할 때는 아니지. 지금 산장에는 귀신과 강시가 여럿 아닌가. 고갯길만 틀어막아도 쉽게 들어오지 못할 거야.”

흑륵존자는 청수귀마의 손을 힐끗 쳐다보며 달랬다. 평범해 보이는 손이었지만 저기서 음한한 장법이 한 번 펼쳐지면 그대로 절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로는 안 돼. 마두 놈들이 도망치지 않게 확실한 게 필요하다. 무슨 괜찮은 술법이라도 있나? 마두 놈들의 기세를 확 올릴 만한 그런 술법 말이다.”

“그런 게 그리 쉽게...”

말하던 흑륵존자는 말끝을 흐렸다. 청수귀마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계략을 짜내야 했다.

“...있긴 하지!”

“그게 뭐지?”

“내가 예전에 매수해놓은 일꾼 놈이 하나 있지.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뻗대겠지만, 매수당한 사실을 밝힌다고 협박한다면 어쩔 수 없을 거야.”

“일꾼 놈 하나로 뭘 어쩌려고?”

청수귀마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고수를 하나 보내서 암습해도 쉽지 않을 텐데 무공도 익히지 못한 일꾼 하나로 뭘 한단 말인가.

천막에 불을 질러봤자 금세 끝날 것이다.

“하하. 자네와 달리 나는 모용세가에 대해 꿰고 있지. 모용세가의 어린놈들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네. 가주가 강자존을 선언했기에 후계자가 되려고 경쟁하는 것이지.”

“그래서?”

“이런. 이런. 이들이 서로 얼마나 반목할지 예상이 가지 않는가? 일꾼 하나가 가짜 편지를 천막 안에 던져 넣는다면? 그리고 그걸 고발하는 투서를 다른 천막에 던져 넣는다면?”

“...!”

그제야 청수귀마는 불만을 떨치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일꾼 하나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모용세가의 핏줄들끼리 내분을 일으키는 건 제법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모용세가의 공자 중 하나가 다른 형제들을 견제하기 위해 청괴산장의 마두한테 몰래 밀서를 보낸다면?

모용세가의 진세가 강하고 철저해보였지만 그건 결국 모용세가의 무림인들이 이끌기 때문. 모용세가만 내분이 나면 나머지 무림인들은 의욕을 잃고 흩어질 터였다.

“자네는 역시 지혜롭군!”

“어련하겠나.”

흑륵존자는 여유를 되찾고 대답했다.

무림에서 지혜가 있다는 것은 때로는 무공의 경지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청수귀마가 난폭하더라도 흑륵존자를 쉽게 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밑의 무림인들은 당연히 반간계를 의심할 테지만 그건 의미가 없었다.

이런 반간계에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바로 문제였다.

계책 중 하책이 몰라도 피할 수 있는 수법이고, 중책이 알면 피할 수 있는 수법이라면, 상책은 알아도 피할 수 없는 수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흑륵존자는 자신감 넘치는 시선으로 오만하게 저 산장 아래를 굽어보았다.

* * *

연우혁은 진영에 머물면서 몇 가지 사실을 추가로 깨달았다.

먼저 이 초빙이 생각보다 편한 자리라는 것이었다. 아무도 연우혁에게 무공으로 적들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무림에서 군사란 역할은 생각보다 편하구나!’

일개 무림인이라면 서로 대오를 갖추고 언제든 격전을 펼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지만, 군사로 존중받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저 앉아서 느긋하게 산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무림인들은 ‘무언가 계책을 고민하는구나’하고 이해해줬다.

연우혁은 갑자기 천기수사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지혜를 빌려달라고 부탁받는다면 절대 허술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행동 하나 하나가 신비로워보여야 하는 법! 상대가 불순한 마음을 품는 순간 놈들은 보상을 깎으려고 할 것이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천기수사 님.’

그리고 다음으로 깨달은 건 연우혁의 명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무림인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었다.

“당문과 인연이 있으신 분이 왜 포두로 계시는 겁니까?”

“...당문과의 인연은 그리 깊지 않소. 그리고 포두는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아하!”

반각 후.

“그런데 백성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협객으로 지내는 게 더 편하지 않으십니까?”

“......”

연우혁은 ‘고관대작 되어서 네놈을 수탈하려고 노력중이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무림인들은 왜 벼슬에 연연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게 포두인 만큼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사실 이것까지도 괜찮았다. 선량한 포두인 척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

“혹시 제갈세가와 인연이 있으십니까?”

“규 형이나 천기수사 님을 뵌 적은 있소만.”

“그런 인연 말고 다른 인연은 없습니까?”

“......”

가장 곤란한 건 자꾸 연우혁이 제갈세가의 핏줄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놈들이었다.

여기서 괜히 이상하게 대답했다가는 ‘진충비도가 자기 제갈세가 사생아라더라’같은 소문이 돌고, 제갈세가의 추살대가 쫓아오는 일이 생길 것 아닌가!

‘빨리 함락이나 되면 좋겠군.’

연우혁은 청괴산장을 쳐다보며 하품했다. 진법도 끝났겠다 이제 무림인들은 턱밑까지 몰려온 상태였다. 길이 좁다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았다.

함락되면 보상을 받고, 보상으로 영약을 사고...

‘어느 정도는 뇌물을 바쳐야 하나? 정말로 바치기 싫군.’

“진, 진충비도 님!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지금 두 공자 님께서 크게 싸우고 계십니다. 진충비도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 * *

“이런 가짜 서신으로 누명을 씌우다니. 감히?”

일검공자 모용소는 동생들을 쳐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협박에 물러서면 모용세가의 핏줄이 아니었다.

“서신의 내용은 우리가 대를 맡아서 공격하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었고, 그 서신이 발견된 곳도 형님의 처소였소.”

“네놈들 중 하나가 던져넣은 거겠지.”

“누명이라고 외치면서 형님께서는 잘도 누명을 던지시는구려!”

“검을 뽑아라.”

“얼마든지! 다만 세가에 보고를 올릴 때 누가 먼저 말했는지는 빼놓지 마시오.”

“다들 기다려주십시오!”

세가 외부의 무림인들이 연우혁을 데리고 도착했다.

모용소는 동생들을 보며 일갈했다.

“진충비도. 여기 내게 누명을 씌운 놈들이 있소. 진상을 밝혀주시오.”

“진충비도, 형님께서는 지금 오히려 성을 내시는구려! 그대가 진상을 밝혀줘야겠소.”

보다 못한 세가의 문객 중 한 명이 외쳤다.

“이게 반간계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공자들께서는 부디 진정하십시오!”

“반간계! 말은 좋군. 그보다 더 가능성 높은 건 이 자들이 내게 누명을 씌웠다는 거겠지. 반간계라는 증거라도 있소?”

“동감하오. 반간계보다는 다른 게 더 가능성이 높겠지. 형님이 내통했다거나...”

“반간계 맞습니다. 저기 하인이 청괴산장의 흑륵존자한테 매수되어서 처소에 서신을 던져 넣은 겁니다.”

연우혁의 심드렁한 말에 주변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듯이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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