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72)화 (72/107)

무림출도 (3)

“뭐... 뭔...?”

“말,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지목당한 하인은 펄쩍 뛰며 외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지목을 당한 만큼 더욱 충격적이었다.

“여기 모인 무림인들은 다 협과 의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요! 매수될 사람이 있을 거 같소?!”

‘오.’

연우혁은 살짝 감탄했다.

같은 노비라도 대감집 노비는 다르다더니, 모용세가의 하인은 머리 굴리는 실력도 제법이었다.

그냥 펄펄 뛰며 부정하기보다는 주변에 있던 다른 무림인들을 바로 끌어들였다.

“진충비도. 마땅한 증좌(證左, 증거) 없이 하인이 했다고 주장하면 믿기 어렵소.”

“맞소. 어느 대명천지에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오?”

연우혁의 명성에 불신을 가지거나 포두라는 신분을 의심하는 몇몇 무림인들이 바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다른 무림인들이 고생하는 동안 혼자 유유자적했던 연우혁이었다. 이럴 때 질시가 날아올 수밖에 없었다.

“증거야 별로 어렵지 않지요.”

시비나 도발에도 연우혁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한경의 관리들에 비하면 무림인들의 시비는 귀여운 애교처럼 느껴졌다.

“하인이 머무는 천막을 뒤져보면...”

‘하!’

하인은 속으로 비웃었다.

깜짝 놀랐지만 곧 연우혁이 망신을 당할 거라고 확신한 것이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딱 거기까지구나! 마두 놈들이 이야기하는 걸 듣기라도 한 모양인데, 외부인 주제에 모용세가의 하인인 날 몰고 갈 수는 없을 거다.’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그야 이런 일을 하면서 자기 천막에 뇌물을 두는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연우혁은 하인의 감정을 읽으며 말을 능숙하게 수정했다.

기억이 맞다면 이 반간계 사건에서 하인이 받은 재물을 숨겨놓은 곳은 두 군데 중 하나였다.

하나는 이제 천막이었고, 가끔은 천막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변경될 때가 있었다.

천막을 말했을 때 하인이 안도한 걸 보니 다른 곳이 분명했다. 실제로 해결할 때는 한 군데 찾아서 안 나오면 체면이 깎이고 명성이 떨어지니 이런 잔꾀가 필수적이었다.

“저 하인의 팔꿈치와 무릎을 보십시오. 흙을 털어냈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색이 짙습니다.”

“넘... 어진 겁니다!”

연우혁은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떻게 의심했는지 일대일로 대꾸하다보면 연우혁만 피곤해졌다. 애초에 대답할 말도 마땅치 않았고.

중요한 건 기세였다. 사람들이 ‘아, 저 포두의 말이 맞나보다!’라고 생각만 하면 일사천리였다.

“모용세가의 공자들은 하나 같이 기재에, 무림에 명성이 높은 준걸들입니다. 만약, 정말 만약이지만, 이 분들 중 한 분이 흑륵존자와 손을 잡았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럼 자기 처소에 서신을 두겠습니까? 바로 태우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래서 누군가 일검공자께 누명을 씌운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문객 중 한 명이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좋은 참여에 연우혁은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만약 다른 공자 분이 누명을 씌웠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럼 이렇게 허술하게 서신을 두겠습니까? 누가 봐도 반간계를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인데? 저는 그래서 공자들 중에는 범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한 모용세가의 공자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들었다.

진충비도의 말이 그들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해결안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허술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고, 처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 여전히 많았습니다만 저 하인의 무릎과 팔꿈치가 눈에 띄었습니다. 넘어졌을 수도 있지만 하인의 안색을 보니 이 소란 와중에도 혼자 득의(得意)한 기색이 있더군요.”

무림인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연우혁의 말에 집중했다.

수십 명이 넘게 몰려와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공자들을 제외한 뒤 수상한 사람을 찾아내다니.

누군가 중얼거렸다.

“과연 제갈세가...!”

“전 제갈세가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저 하인이 매수되었다고 생각한 겁니다. 아까 증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만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하인이 이런 상황에서 가봤자 얼마나 멀리 가겠습니까. 여기서 동쪽으로 여덟 장하고도 네 척 떨어진 저 나무 보이십니까? 저 밑에 파묻었을 겁니다.”

“저, 저건 어떻게?”

“오면서 둘러봤는데 혼자 흙색이 다르더군요.”

“...!!!”

“잡아라!”

모용소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하인이 비명을 질렀다.

“공, 공자님!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그러고도 살길 바라느냐? 끌고 가라!”

일갈을 마친 모용소는 연우혁에게 포권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진충비도의 도움에 감사드리오. 덕분에 억울함을 벗을 수 있었소.”

다른 두 형제도 똑같이 포권했다.

큰 형의 명성을 끝장낼 수 있었다는 속마음과 별개로, 지금 이 많은 무림인들 앞에서 연우혁에게 속좁게 굴었다가는 대번에 명성에 흠이 갔다.

“하찮은 재주일 뿐입니다. 정파무림의 동도들 사이에 피가 흐르지 않았으니 기쁠 뿐!”

사방에서 쏟아지는 찬사를 받으며 연우혁은 좌중을 빠져나왔다. 마치 누군가를 찾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연우혁의 모습에, 진검보에서 나온 장인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뭘 찾으시는 겁니까?”

“하인 말고 매수당한 사람을 확인하고 있었소. 몇 명 더 있군.”

“...!!”

장인형은 연우혁을 경외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 젊은 무림인은 제갈세가와 비교해도, 아니 제갈세가보다 더 뛰어난 책사일지도 몰랐다.

* * *

흑륵존자는 부하가 들어오자 잔뜩 기대하며 재촉했다. 뿌린 씨앗에서 싹이 틀 때만큼 즐거운 일도 없었다.

과연 저 아래의 진영은 어떻게 되었을까?

“말해라. 어떻게 됐느냐?”

“그, 그것이...”

“뭐냐? 무슨 일이냐?”

“하인 놈이 붙잡혔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흑륵존자는 살기를 폭발시켰다. 갑자기 칼날처럼 쏟아지는 날카로운 기세에, 경지가 낮은 부하는 견디지 못하고 컥컥댔다.

“정... 정말입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이건 말도 안 돼! 왜 반간계가 통하지 않았지?”

방 안을 서성이며 흑륵존자는 중얼거렸다.

밖의 포위도 포위였지만 이 말을 들었을 때 청수귀마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난폭하기 그지없는 자라 아군한테 일장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분명 모용세가 공자놈들의 사이라면 통할 텐데...

“그, 이건 제가 소문을 들은 건데, 진충비도란 놈이 진영에 있답니다.”

“진충비도?”

“최근에 적면혈뇌를 죽인 놈이랍니다.”

“아, 적면혈뇌를 죽였다는 그 포두 놈?!”

흑륵존자는 그 말에 진충비도가 누군지 기억이 났다.

최근 포두 주제에 무림 고수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아서 코웃음을 쳤었는데...

“다른 놈들이 같이 있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랬겠지.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무공이 제법이란 소리다. 적면혈뇌 같은 고수 앞에서는 합공을 펼친다 하더라도 목숨부지도 쉽지 않으니! 그보다 놈의 꾀가 더 궁금하다. 꾀로 소문났다는 건 들었지만 실로 제법이구나.”

“하인 놈이 실수를 한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들킬 리가 없습니다.”

부하는 아첨하듯이 말했다. 청수귀마만큼은 아니어도 흑륵존자도 만만찮게 괴팍하고 성질 더러운 사람이었다. 기분이 나빠지면 저 선장(禪杖)을 휘둘러 부하를 때려죽일 수도 있었다.

“그래... 그럴 거다.”

흑륵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새파랗게 어린 놈이, 그것도 어느 세가 출신도 아닌 놈이 흑륵존자의 간계를 간파하고 짓밟아 뭉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분명 하인 놈이 실수를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청수귀마 놈은 나한테 책임을 물을 텐데...”

“흑륵존자 님!”

“?”

“제가 다른 놈들과 접선했습니다. 저희 돈을 받아먹은 놈들 말입니다. 협박을 하니 겁에 질려서 알겠다고 하더군요.”

“잘했다!”

흑륵존자의 칭찬에 부하는 기뻐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돌아가면 죽을 것 같아 어떻게든 매수한 놈들을 찾아가봤는데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놈들에게 수상한 기색은 없었더냐? 함정일 수도 있다.”

“없었습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디서 만날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함정을 파놨다 하더라도 여러 군데를 돌며 시선을 분산시키면 무용지물이 됐다. 흑륵존자는 흡족해하며 선장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시간이 없다. 놈들을 불러와라!”

“예!”

부하가 나간 뒤 흑륵존자는 살기를 가다듬으며 선장을 붙잡았다.

안 그래도 강시가 부족했는데, 이번에 매수한 무림인 놈들이 오면 몇 구 보충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모든 놈들이 철저하게 말을 듣지는 않을 테니 가장 고분고분한 놈들만 살려두면 됐다.

‘...함정일 리는 없겠지.’

순간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다음 모책을 준비하나 생각이 든 흑륵존자였지만, 고개를 흔들며 그 생각을 떨쳤다.

치밀하고 교활한 책사답게 흑륵존자는 바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흑륵존자가 있을 곳은 절암봉, 이 산에서도 가장 외지고 인적 드문 곳 중 하나였다.

흑륵존자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건 부하도 알지 못했다. 부하는 매수된 무림인들을 데리고 산 주변을 빙빙 돌 것이고, 적당할 때를 봐서 흑륵존자가 아래로 내려올 것이다.

이러면 상대의 어떤 함정도 무의미했다.

어느 누구도 흑륵존자가 절암봉에 있다는 걸 알지는 못할 테니까.

* * *

“진충비도 님. 천기수사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라고?!”

연우혁은 의외의 손님에 깜짝 놀랐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꼿꼿한 자세로 천막에 들어오는 제갈세가의 장로를 보자, 연우혁은 서둘러 일어났다.

“아니. 천기수사 님께서도 초빙을 받으셨습니까?”

“받았었다. 거절했지만. 그래서 널 추천한 것 아니겠느냐?”

“!”

천기수사의 말에 연우혁은 그제야 모용세가 무인들이 자신을 왜 초빙했는지 깨달았다.

아무리 최근 명성을 쌓았다지만 모용세가가 부르기에는 너무 갑작스러운 것 아닌가 싶었는데, 제갈우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추천한 모양이었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천기수사 님께서는 왜 받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모용세가와 무슨 문제라도...”

“아니. 삯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아, 예.”

“목소리 낮춰라! 모용세가 놈들한테 왔다고 자랑하고 싶지는 않으니.”

심지어 제갈우는 모용세가 무인들에게 말하지 않고 조용히 진영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연우혁은 놀라워하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내가 왜 왔는지 맞춰봐라!”

“저를 추천하셨으니, 제가 일을 제대로 하는지 걱정이 되신 것 아닙니까?”

“틀렸다. 네가 일을 제대로 할지 걱정이 됐다면 애초에 왜 추천을 했겠느냐? 머저리냐?”

“......”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했다. 연우혁은 상대가 왜 찾아왔나 고민했다.

모용세가를 도와주려고 온 것도 아니고, 연우혁이 잘 할까 걱정되어서 온 것도 아니면...

“...설마 제가 삯을 제대로 받지 못할까봐 오신 건 아니겠지요?”

연우혁은 천기수사가 희고 긴 수염 너머로 빙그레 웃는 걸 처음 보았다. 괴팍한 얼굴에 주름을 잔뜩 잡으며 웃은 천기수사가 입을 열었다.

“맞다!”

“...감, 감사합니다. 이러실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하!”

제갈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비웃었다.

“소문을 듣지 않았다면 내가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들어보니 모용세가의 첫째 공자 놈에게 걸린 누명을 풀어줬다고?”

“예.”

“그걸로 뭘 받았지?”

“...어, 저는 이미 은자를 받고 왔습...”

제갈우는 기습적으로 출수했다. 연우혁이 영안으로 보고 막으려고 했지만 제갈우는 순식간에 천변만화하는 초식으로 연우혁이 알면서도 당하게 만들었다.

딱!

“머저리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잘못한 게 없었지만 연우혁은 일단 사과를 했다. 상대가 자신을 불같이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였다면 첫째 공자한테 따로 접근했을 것이다. 누명을 깔끔하게 풀어주면 뭘 해줄 거냐고 말이다.”

“......”

“그 다음에는 둘째, 셋째 공자한테 또 접근했을 것이다. 첫째 공자의 누명을 풀어줄 생각인데, 둘의 체면을 망치지 않게 협조시켜주겠다고. 그러면 일거삼득이 된다! 원한도 쌓지 않고 모두의 체면을 존중하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궁 판관 소개시켜드리고 싶군.’

연우혁은 갑자기 자기 상관을 소개하고 싶어졌다.

제갈우는 쯧쯧쯧 혀를 계속 차더니 말했다.

“이제부터라도 자기 몫을 챙기도록 해라. 네가 받은 은자는 진법을 풀어준 값으로도 부족하니까!”

“예. 명심하겠습니다.”

갑자기 밖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승리의 함성이었다.

천기수사는 재빨리 불길함을 감지하고 물었다.

“뭐냐? 무슨 일이냐?”

“그, 실은 제가 말입니다.”

“...?”

연우혁은 천기수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마두 중에 흑륵존자란 놈이 있는데, 그 놈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모용세가 공자들한테 놈의 위치를 말해줬...”

“야, 이 염병할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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