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76화 (76/107)

무림출도 (7)

‘진충비도가 뭐하는 놈이야?’

청수귀마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별호이긴 했다.

산장의 마두 놈 중 하나가 아래에 있는 무림인들에 대해 떠들 때 나온 것 같은데...

별호가 기억에 잘 남지 않았다는 건 상대가 갓 명성을 얻은 후기지수란 뜻. 청수귀마가 신경 쓸 정도의 고수는 아님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여기 무림인들은 진충비도란 놈한테 가서 물어보려고 한단 말인가?

‘이상하군.’

들어보니 모용세가가 명령을 안 내린 것도 아니었다.

빈틈을 보이면 바로 치고 들어가라고 명령도 내려진 상태.

그런데 모용세가의 명령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모용세가의 고수를 불러서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처음 듣는 후기지수를 불러서 물어본다니.

산전수전 겪은 청수귀마였지만 이런 일은 또 처음이었다. 청수귀마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며 눈치를 봤다.

‘아직 놈들이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뭐냐. 대체?’

“진충비도 님. 이쪽입니다. 이쪽!”

어둠 속에서 횃불과 함께 일련의 무림인들이 나타났다. 청수귀마는 진충비도란 놈이 누군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놈이었다. 복색이나 얼굴만 봐도 명가 출신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같은 무림인이라 하더라도 명가 출신들은 창백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산장에서 하인들이 도망쳐서 내려왔다고?”

“예!”

“공자들에게도 보고를 올렸습니다만, 아직 새 명령이 내려오지 않아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원래 명령대로 위로 올라가야 할까요?”

모용세가에 소속되지 않은 무림인들은 연우혁의 조언을 기다리며 시선을 던졌다.

원래 내려온 명령은 포위를 굳힌 상태로 적들이 빈틈을 드러내면 넘어가지 말라는 명령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당한 수준의 빈틈이었다.

지금처럼 하인들이 도망치고 산장이 통째로 불타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좋은지 알 수가 없었다.

모용세가에서 빠르게 대응해서 명령을 내리면 모를까, 공자들도 이 예상 밖의 상황은 당황스러웠는지 명령이 느려지고 있지 않은가.

이 때 믿을 수 있는 건 진충비도밖에 없었다. 심지어 좌중에는 모용세가의 무인들도 있었는데, 이들도 공자를 부르지 않고 연우혁의 답을 기다렸다.

“하인들의 말에 이상한 점은 없었나?”

“예. 하인들은 각자 갇혀 있어서 아는 게 별로 없더군요. 마두 놈들이 도망칠까봐 가옥 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막은 모양입니다.”

“흠.”

연우혁은 하인들을 둘러보며 평범한 질문들을 하나씩 던졌다.

마두들은 누가 있었냐, 산장의 구조는 어떤 식이었냐, 어느 건물에 갇혀 있었냐, 무슨 일이 일어났냐...

청수귀마는 그 모습에 속으로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무림인 놈들이 불러대길래 뭔가 비범한 재주가 있나 싶었는데 하는 짓이 범속하기 그지없었다.

“잘,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하인들처럼 청수귀마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연우혁은 골똘히 고민하더니 옆에 있던 무인에게 말했다.

“안 되겠군. 공자님들에게 이걸 전해주게. 내 능력으로는 힘들겠어.”

“예!”

작은 붓으로 급히 휘갈긴 서신을 무인에게 맡기는 모습에 청수귀마는 대충 다 끝났다는 걸 느꼈다.

아마 저 젊은 무림인은 자기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서 모용세가의 공자들에게 보고한 게 분명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혼자 책임을 뒤집어 쓸 것 아닌가.

여기 모인 머저리들 사이에서야 명성을 떨쳤겠지만 그런 허섭스레기 재주는 진짜 마두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 법.

“다시 한 번 기억해보게. 정말 기억이 안 나나?”

공자들이 오기 전까지 뭐라도 하는 시늉을 내고 싶었는지 연우혁은 하인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던졌다. 그러나 당연히 쓸만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연우혁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곤란해했다.

“이거 곤란한데, 이거 곤란한데...”

“나, 나으리. 조금만 쉬게 해주십시오. 저희는 이틀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한데다가 이 추운 밤에 산길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이런. 조금만 기다려라. 곧 공자들께서 오실 것이다.”

“천막 안에서 기다리면 안 되겠습니까?”

하인들의 행색이 워낙 딱했기에 무림인들도 동정하는 기색을 보였다. 청수귀마는 비틀거리는 시늉을 했다.

“진충비도 님. 하인들을 천막 안에서 기다리게 하면 안 됩니까?”

“안 되네. 공자들께서 오지 않았는데 멋대로 움직이게 할 수는 없지.”

‘애송이 놈 같으니!’

청수귀마는 속으로 비웃음을 터뜨렸다.

나름 위엄을 부린다고 한 것 같았지만 자충수였다. 누가 봐도 의미 없이 하인들을 괴롭히는 꼴 아닌가.

이런 식으로 굴어봤자 공자들이 왔을 때 더 수습하기 힘들어질 뿐이었다.

모용세가의 공자들이라 하더라도 여기 있는 세가 외부 무림인들의 눈을 전부 무시할 수는 없을 것 아닌가. 정파무림의 가면을 쓴 이상 저 놈들은 양민을 괴롭힐 수 없었다.

“으음. 진충비도께서 그렇게 말한다면야.”

“무슨 뜻이 있겠지.”

“?”

청수귀마는 의외의 반응에 멈칫했다. 무언가 위화감이 든 것이다.

‘뭐지?’

그 위화감을 고민하기도 전에 공자들이 도착했다. 부하들을 데리고 온 공자들은 하인들의 형편없는 꼴을 보더니 진충비도를 타박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죄 없는 양민들을 이렇게 밖에 세워놓으면 어떡하나!”

“죄, 죄송합니다.”

“여기 하인들에게 죽을 갖다 주게. 산장의 일이 속임수라 하더라도 포위를 굳건히 지킨 뒤 확인하면 어느 누가 도망칠 수 있겠는가.”

‘됐다!’

청수귀마는 마지막 난관을 넘자 매우 흡족해했다.

가장 원하던 반응이었다. 밤늦게 산장이 활활 타도록 내버려둔 뒤 올라가면 누가 청수귀마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정파 놈들은 체면 때문에라도 청수귀마를 잡았다고 선언할 것이다.

“여기 죽이오. 드시오.”

“고, 고맙습니다.”

진충비도라고 불린 젊은 무인이 어두운 얼굴로 죽을 가져다주자 청수귀마는 비웃음을 참으며 죽사발을 받았다. 죽을 한 모금 목구멍으로 집어넣는데, 갑자기 살기가 느껴졌다.

모용세가의 공자들이 뿜어내는 살기였다.

아주 미약한 살기였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생사를 몇 번이고 오고 간 청수귀마는 자신의 직감을 믿고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퉷!”

한 모금 들이킨 죽과 귀식단을 토해낸 청수귀마는 전력을 다해 눈앞의 젊은 무림인에게 장법을 갈겼다.

그러나 진충비도란 놈은 제법 만만치 않았다. 바로 주먹을 뻗어 권격을 날리며 장법을 막아내더니 재빨리 뒷걸음질쳤다.

“놈이 어떻게?!”

공자들은 청수귀마의 반응에 경악했다. 완전히 속아 넘어간 줄 알았는데, 덫에 빠지기 직전 놈이 발악을 시작한 것이다.

“살기를 그렇게 흩뿌렸는데 어르신이 속을 줄 알았더냐!”

청수귀마는 노호를 토해내며 외쳤다. 모용세가의 공자들은 낯빛을 붉혔다. 연우혁이 다 파놓은 함정을 자신들이 망쳤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연우혁은 냉정했다. 물론 독이 든 죽을 먹여서 쉽게 잡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이 정도 포위망이면 잡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다 속아놓고서 무슨 헛소리냐? 이 주변에 절진이 펼쳐지는 동안에도 가만히 있던 놈이 허세를 부리는구나. 공자들께서는 네놈을 다 잡았기에 살기를 꺼내신 거다.”

모용세가의 공자들은 각자 연우혁이 자신의 편을 들었다고 생각하며 깊게 감명받았다.

다른 놈들까지 운 좋게 망신을 피한 건 아쉬웠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닥쳐라, 곧 뒤질 놈이!”

“큭!”

청수귀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우혁이 비틀거렸다. 청수귀마는 살기로 눈빛을 번뜩였다. 장법에 담긴 음유한 내공이 상대의 기혈을 뒤흔든 것이다.

“죽...”

덤벼드는 순간 연우혁이 재빨리 보법을 펼치더니 전력을 다해 일권을 갈겼다. 생각보다 훨씬 더 상승의 권법에, 재빨리 끝내려고 했던 청수귀마는 충격을 억누르며 물러났다.

‘분명 부딪쳤는데!?’

청수귀마의 장법이 무림에서 악명이 높은 건 그 장법에 담긴 음유한 내공 때문이었다. 극히 정순한 내공이 아니라면 권장을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파고드는 음유한 장법의 내공을 견디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의 젊은 놈은 분명 장법과 정면으로 부딪쳤는데도 별다른 기색 없이 멀쩡했다.

‘보갑(寶鉀)!’

청수귀마는 이를 갈며 장법의 방향을 바꿨다. 주먹이 보갑으로 보호받고 있다면 장법의 힘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수많은 허초를 날려 현혹시킨 뒤 놈의 몸에 장법을 쑤셔 박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놈은 단 하나의 허초에도 속지 않고 기괴한 보법으로 거리를 벌렸다. 그 뒤로 빠지는 보법도 보법이지만 허초에 눈길도 주지 않는 것이 경악스러웠다.

‘놈이 내 장법을 알기라도 한단 말인가?!’

청수귀마 입장에서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귀식단에 독이 든 죽까지 먹었다지만, 자기보다 경지 낮은 무인 하나 쉽게 잡지 못하다니.

이건 상대방이 청수귀마가 펼치는 장법의 묘리를 모두 다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어떻게 내 무공을 알고 있는 것이지?”

“?”

연우혁은 상대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아. 착각하고 있나.’

하긴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줄 알았는데 갑자기 속은 상황이 됐으니 혼란스럽기도 할 것이다.

연우혁이 청수귀마의 무공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네놈의 무공만 아는 줄 아느냐? 네놈의 수법은 이미 다 꿰고 있다. 산장에 불을 질렀을 때부터 하인 속에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

청수귀마도 충격을 받았지만 진형을 구축한 무림인들도 새삼 놀랐다.

저 마두가 어떤 비열한 꾀를 부리더라도 마치 진충비도의 손바닥 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지?!”

“잘 생각해봐라.”

“...냉수사(冷手蛇), 냉수사 놈인가! 그 놈, 설마 내 비밀을 모용세가에...!”

“!”

연우혁은 갑자기 낯익은 이름이 나오자 놀랐지만 기색을 숨기고 동의했다.

“그렇다. 고 대협께서 네놈을 죽이라고 하시더군! 여기 백사격각편(白蛇隔角鞭)을 봐라!”

청수귀마의 눈빛이 흉폭하게 일렁였다.

아무리 원수 사이가 됐다지만 사형(師兄)으로서 자신의 무공과 약점을 정파무림인에게 낱낱이 고해바치다니!

마두 주제에 정사지간을 표방할 때부터 싹수가 뻔한 자였다.

“여기서 나가면 그 자부터 요절을 내고 말겠다.”

“그 말은 나가고 나서 해라!”

싸늘한 말과 함께 모용세가 공자들의 합격진이 시작됐다. 청수귀마는 가슴팍 아래까지 치고 들어오는 서늘한 검세에 아차 싶었다.

저 어린놈의 언변에 취해 칼이 목 아래까지 들어오는데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쾅!

청수귀마의 시푸른 장력이 검과 충돌했다. 일검공자는 한 수 아래의 무인이었지만 진법의 위력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상승의 진법을 십 년 넘게 수련할 수 있는 세가는 무림에 많지 않았다. 모용세가의 직계들이 펼치는 진법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밀하고 사나웠다.

청수귀마는 숨이 점점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빈틈을 만들어야 한다!’

청수귀마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셋째 화검공자를 향해 미친듯이 장력을 날렸다. 내력을 탕진하더라도 어떻게든 진법에 구멍을 낼 요량이었다.

그 순간 비도가 날아들었다. 살기 넘치는 공격에 청수귀마는 깜짝 놀라 몸을 틀었다.

진법이 펼쳐질 때에는 외부의 공격도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됐는데, 방금 날아온 비도는 진법을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청수귀마는 연우혁이 모용세가 무림인인가 싶어서 혼란스러웠다.

‘빈틈!’

냉검공자의 검이 청수귀마의 등을 깊숙이 그었다. 청수귀마는 이를 악물며 모용현에게 장력을 내질렀다. 세가의 도련님들은 쉬이 경험할 수 없는 양패구상의 초식이었다.

그 때 또 다시 비도가 하나 날아들었다. 청수귀마는 팔을 관통하는 비도의 기세에 이를 갈았다.

“개자식이!”

냉수사가 줄줄 불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처참하게 농락당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청수귀마는 울분을 토해내듯 정면의 일검공자를 후려쳤다. 모용소는 검을 곧추세우고 장력의 파도를 흔들림 없이 헤쳐 나갔다.

마지막으로 비도가 날아왔다. 어깨를 노리고 날아오는 비도에 청수귀마는 피하지 않고 받아내려고 했지만, 그 순간 비도의 방향이 비틀렸다.

“!”

장력으로 비도를 막아내는 순간 세 공자의 검이 청수귀마에게 그대로 작렬했다. 청수귀마는 눈을 부릅떴다.

“여기... 여기까지인가!”

“발악하지 말고 죽어라, 마두.”

“그럴 순 없지!”

청수귀마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전음을 날렸다.

-고송 놈의 비밀을 알려주마. 놈의 목이라면 모용세가가 탐낼 가치가 있겠지...!

“......”

죽기 전에 다른 자들이 들으면 안 되는 비밀을 전음으로 보내는 것까지는 이해가 갔다.

그러나 앞의 모용세가 공자들은 내버려두고, 자신한테 모용세가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꼬드기는 전음을 보내는 청수귀마의 모습에 연우혁은 당황했다.

‘죽기 직전이라 정신이 혼미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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