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77화 (77/107)

무림출도 (8)

-청수경(靑手經), 놈은 청수경을 갖고 있다! 청수경 말이다!

청수귀마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절명했다. 숨통이 끊어졌음에도 입가에는 한 줄기 득의의 미소가 남아있었다. 자신이 남긴 말이 고송의 숨통을 끊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무림인도 청수경이란 비급의 이름을 들으면 가만히 있지 못하리라!

“...??”

그러나 연우혁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청수경이 뭐야?’

***

“동도들, 고맙소!”

모용세가의 공자들은 자리에 모인 무림인들에게 외쳤다. 산장의 마두들과 싸우느라 다친 무림인들도 여럿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얼굴이 어둡지 않았다.

토벌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이다!

무림인의 목숨은 언제 강호에 스러질지 모르는 새벽이슬 같은 것이라지만, 남부럽지 않을 순간도 분명 존재했다. 바로 지금처럼 마두들과 싸워 승리를 쟁취했을 때였다.

오대세가 중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의 보상은 아끼지 않았다. 세가의 명성에 수전노란 악명이 달라붙으면 훗날 수십 배로 피해를 봤다. 반쯤 낭인 같은 놈이라 하더라도 세가를 위해 싸웠다면 제대로 된 보상을 베풀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은 이제 어느 곳을 가던 ‘영동의 청괴산장에서 마두들을 토벌했다’며 무용담을 풀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강호에 알리고 싶어하는, 청운의 꿈을 가진 무림인이라면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포상이었다.

물론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청수귀마와 흑륵존자를 해치운 모용세가의 공자들이었다. 그러나 토벌에 참가했던 무림인들이라면 어느 누구든 한 명을 더 꼽을 것이다.

“진충비도. 토벌은 끝났소. 하지만 난 여전히 조언이 필요하오. 내 동생들은 교활하기가 뱀과 같고 음험하기가 이리 새끼들 같지. 진충비도가...”

“저는 오직 한경의 백성들을 살필 뿐입니다. 공자님! 제가 풍수를 보아하니 공자님의 운세는 제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항상 겸손하시고 주의를 기울이시면 대운이...”

“진충비도. 처음에 내가 얕잡아본 건 사과하겠소. 나는 아직 미숙하오. 내 형은 뱀과 같고 내 동생은...”

“저는 오직 한경의 백성들이 걱정될 뿐입니다. 공자님. 제가 관상을 보아하니 공자님의 운세는...”

“진충비도...”

“제가 천문을 보아하니...”

세 공자의 뜨거운 구애를 거절하고 좌중을 빠져나온 연우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게 마두들을 상대할 때보다 빠져나오는 게 더 힘든 기분이었다.

청수귀마가 죽자, 천기수사는 잘했다고 칭찬한 뒤 짧게 한 마디만을 남겼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도망쳐라. 공자들 사이에 끼지 말고!

설명해주지 않아도 연우혁은 바로 이해했다.

아무리 천금을 주고 대접하려고 해도, 세 공자들 사이의 싸움에 끼는 건 절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모용세가의 고수들이 즐비한데 이들이 웬 외인이 끼어들어 연못의 물을 흙탕으로 만드는 걸 가만히 두고 보겠는가.

연우혁은 세 공자를 설득하기 위해 천문과 관상과 풍수까지 꺼내야 했다. 그나마 보람이 있다면 이게 은근히 잘 통했다는 점이었다.

‘나중에 누군가 설득할 일 생기면 정말 도사인 척 해도 될 것 같은데.’

“고생했다!”

말을 타고 비탈길을 지나는데 앞에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떨어졌다. 천기수사 제갈우였다.

연우혁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성격이 꼬장꼬장하긴 해도 이 노고수가 이번 일에 많은 도움을 줬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천기수사 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제가 어떻게 저 범의 아가리에서 무사히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말은 잘하는구나! 그럼 어떻게 보답할 셈이냐?”

“제가 먼저 부탁을 드리지도 않았고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왜 보답해야 합니까?”

건방진 연우혁의 대답에 천기수사는 오히려 좋아하며 웃었다.

“좋다, 좋아! 백견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이다. 아주 제대로 배웠구나.”

“사실 제가 보답을 받지 않은 것도 공자들에게 신뢰를 사기 위해서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라. 모용세가 공자들에게 신뢰를 사봤자 피곤해지기만 할 거다.”

천기수사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연우혁의 말을 완정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연우혁이 보답 대신 공자들의 신뢰를 사지 않았다면 흑륵존자의 일은 몇 배로 꼬였을지도 몰랐으니까.

“천기수사 님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한경의 청강을 잠깐 보고 내려갈 생각이다.”

“...!”

천기수사는 산고수청(山高水淸)을 즐길 사람이 아니었다. 연우혁은 천기수사가 자신을 염려해서 한경까지 동행해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뭘 말이냐?”

“청강을 봐주신다니 한경의 포두로서는 기쁠 뿐입니다.”

천기수사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제갈세가의 후기지수들은 눈치가 둔해서 불만이었는데, 눈치가 빠르면 빠른 대로 귀찮은 점이 있었다.

“눈치가 빠르면 모르는 척이나 할 것이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공을 세운 군사가 가장 조심할 때는 길을 오고 갈 때다. 세가의 이름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자들은 더욱 위험하지.”

무림의 명성은 장점만 있지 않았다. 그 명성을 지킬 무공이 없다면 무림의 명성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었다.

특히 무공보다는 지혜로 명성을 날린 군사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재물을 탐내는 녹림의 산적부터 시작해서 깊은 흉계를 꾸미는 사파의 무인들까지 수작을 부릴 수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걱정되는 게 있었습니다.”

“말해봐라.”

천기수사는 연우혁의 말에 흥미로워하는 시선을 던졌다.

이 뛰어난 후배가 인근에서 어떤 위험을 미리 걱정하고 있었을까?

“원래 남은 보상은 한경에서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모용세가가 약속을 잊진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

“그러진 않겠지요?”

천기수사는 자신이 너무 후배에게 겁을 줬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름 없는 중소문파면 모를까 모용세가가 약속을 하고 어기겠느냐? 그러진 않을 거다. 약속을 하지 않아서 문제지, 약속을 한 번 하고 난 뒤라면 걱정할 것 없다.”

“그런데 언제나 방심하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너는 서신만 보내도 공자들이 자기 일처럼 도와줄 텐데 무슨 겁이 그리도 많느냐!”

연우혁이 자꾸 헛소리를 해대자 천기수사는 호통을 쳤다.

머리도 좋은 놈이 자꾸 이상한 부분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연우혁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캐물었다.

“벽력신권 대협의 보상은 어떻습니까? 아무도 보는 눈이 없었잖습니까?”

“놈이 말을 어기면 내가 나서주겠다. 됐느냐? 이제 그만해라. 네가 제대로 익혔다는 걸 확실히 알겠다!”

천기수사는 진절머리를 치며 말을 끝냈다. 이 놈이 일부러 이러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한동안 침묵하던 연우혁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모용세가나, 혹은 보상에 관련된 일이더냐?”

“아닙니다.”

“그럼 물어봐라.”

“청수경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야 있지. 너는 없느냐?”

“예.”

“...아. 너는 포두였지. 자꾸 잊게 되는군.”

천기수사는 상대가 명문정파의 후기지수가 아니라 포두 출신 무림인이라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그렇다면 옛날부터 무림에 떠도는 소문들을 몰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청수경은 이백 년 전 무림을 뒤흔들었던 비급이다. 서장의 법왕이 익힌 독문무공이지.”

이백 년 전 서장에서 건너 온 밀교의 법왕은 고강하고 괴이한 무공으로 중원무림을 뒤흔들었다.

구파일방 중에서는 네 개의 문파가 자존심이 꺾였고, 오대세가 중에서는 두 개의 세가가 자존심이 꺾였다.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법왕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이름만 남은 법왕의 무공이 사실 천하제일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런 무공이 있었습니까? 지금은 어디 있습니까? 소림?”

“사라진지 오래다. 애초에 남아있었으면 익힌 놈이 있었겠지. 무림을 떠도는 소문이란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느냐.”

천기수사는 닳고 닳은 노고수답게 소문에 심드렁했다.

무림을 떠도는 비급이란 것들은 대부분이 호사가가 낸 헛소문이었고, 극히 일부는 사악한 책사들의 계략이라 무림을 피로 물들이곤 했다.

고수란 결국 뛰어난 오성과 육신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수련하는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천기수사가 보기에 비급을 얻어보겠다고 기웃거리는 놈들 중에 고수가 되는 놈은 없었다.

‘청수귀마 놈. 날 무슨 병신으로 아나?’

연우혁은 청수경이 뭔지 알자 어이가 없었다.

일단 냉수사가 청수경을 정말 얻었는지도 조금 회의적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비급을 얻었는데 왜 내공이 탁해서 범망경을 찾아 헤맨단 말인가.

냉수사가 절정의 고수라지만 그게 무림을 진동시킨 비급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따지면 마두들은 다 비급 하나씩 갖고 있을 것 아닌가.

그리고 설사 냉수사가 청수경을 갖고 있다고 치자.

연우혁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무림 동도들을 불러놓고 ‘여러분! 냉수사가 청수경을 갖고 있답니다! 저 마두 놈이 무림의 비급을 갖고 있게 내버려두실 겁니까!’라고 외치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짓을 했다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뒷감당은 어떡할 것이며, 무엇보다 냉수사 본인의 원한은 어떡한단 말인가.

청수귀마는 냉수사와 사이가 안 좋아서 어떻게든 죽이고 싶었는지 몰라도 방법이 너무 조악했다. 연우혁은 그냥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람이 죽기 전이라 다급했나보군.’

물론 청수귀마는 연우혁을 모용세가 사람이라고 착각해서 세가의 힘을 동원할 것이라 생각하고 던진 말이었다.

오대세가 정도 되면 저런 소문 같은 이야기라도 확인을 해볼 힘이 있는 것이다.

...연우혁이 모용세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꽤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

“갑자기 청수경은 왜 묻느냐?”

“산장 마두 놈 중에 하나가 안다고 떠들더군요.”

연우혁은 솔직하게 진실을 말했다. 그러나 천기수사는 킬킬대며 웃었다.

“왜, 천마신공을 안다는 놈은 없었느냐?”

“그런 놈은 없더군요.”

“마두 놈들 말 하나하나 다 들어줄 것 없... 이런.”

천기수사는 저 멀리 고갯길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마차와 수레가 있고, 호위하는 보표들이 있고, 무공을 익히지 못한 보부상들도 있고, 그 앞을 가로막고 이야기를 나누는 녹림의 산적들도 있고...

누가 봐도 녹림채가 통행세를 걷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녹림채가 최근 위치를 옮겼나보군. 귀찮은 놈들.”

“그래도 오늘 커다란 교훈을 얻지 않겠습니까?”

연우혁은 천기수사가 옆에 있어서 든든했다.

지금 보부상들에게 철전을 뜯어내는 녹림 산적들이었지만, 그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안다면 대경실색해서 엎드릴 터였다.

“옛다.”

그러나 천기수사는 자신의 별호를 드러내는 대신 철전을 던졌다. 딱 봐도 별 것 없어 보이는 둘의 모습에 녹림도들은 별다른 몸수색을 하지 않고 가라고 손짓했다.

“...??”

연우혁은 당황해서 천기수사를 쳐다보았다. 천기수사는 왜 그러느냐는 듯이 물었다.

“왜 보느냐?”

“어, 저는 저 녹림도들을 훈계하실 줄 알았습니다.”

“많이 배운 줄 알았는데 아직 멀었구나! 여기서 녹림도들을 훈계하면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어... 바친 돈들을 돌려받고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보부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저 상인들까지 돈을 돌려받겠지. 나한테는 한 푼 보답 없이 말이다.”

“그건 제갈세가의 이름이라면 당연히...”

녹림한테 구해주고 돈 받으면 그건 제갈세가가 아니라 장강십팔세가로 이름을 바꿔야했다.

“그 소문이 퍼지면 앞으로 길을 가는 놈들마다 내 복색과 얼굴을 기억하고 날 찾으려고 하겠지. 내가 옆에 있다면 내 명성을 팔려고 말이다. 이게 반복되면 녹림 놈들은 내게 원한을 품을 것이고. 이 모든 걸 철전 하나로 피할 수 있는데 그러지 않을 셈이냐?”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이렇게 진지하게 하시는 거지?’

연우혁은 속으로 어이없어했다.

그냥 철전 하나 아끼자고 남들 좋은 일 해주기 싫다는 걸 이렇게 길게 설명할 일인가?

“잠깐!”

산 위에서 산적 하나가 달려오더니, 먹으로 종이에 그린 인상착의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다른 산적들에게 뭐라고 명령했다.

“여기 진충비도란 놈 있...”

천기수사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출수했다. 산적 세 명이 그대로 점혈당해서 고꾸라졌다. 천기수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천기수사 제갈우다! 정파의 무인으로서 너희 녹림의 무리들이 선량한 행객들을 핍박하는 걸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구나!”

“천, 천기수사!!”

“제갈세가!”

상인들은 깜짝 놀라서 감격한 눈빛으로 천기수사를 쳐다보았다. 방금까지 천기수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천기수사는 출수한 이상 명성을 최대한 드러내는 걸 머뭇거리지 않았다. 바로 연우혁을 가리켰다.

“여긴 진충비도 연우혁이다! 정파의 무인이자 녹을 받는 관료로서, 이 후배는 너희 녹림의 무리들이 선량한 행객들을 핍박하는 모습에 격노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연우혁은 무림인으로서의 삶이 참으로 쉽지 않다고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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