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81화 (81/107)

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4)

“...그게 정말인가?”

한기는 넘어뜨린 탁자를 다시 세우며 물었다.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오늘 내내 평정심을 잃지 않은 무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짐작이 가는 곳은 있습니다.”

사실 확신에 가까웠지만 연우혁은 상대방이 받을 충격을 세심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말로 설명이 되는 재주는 신통력이었지만 그 이상을 넘어가버리면 이제 사술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들어보고 싶군. 조언을 부탁하네.”

“그 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조언이 틀린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조언이 틀려도 악검삼마는 던져주겠네. 그러나 조언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오독귀는 주지 않겠네.”

“과연.”

영안으로 상대의 제안이 진심이었는지 확인한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이 틀릴까봐 물어본 게 아니라 상대의 보상이 진심이었는지 확인한 질문이었다. 천기수사가 본다면 분명 감탄해서 칭찬했으리라.

‘저 마두들로 포두로서의 공에 화룡점정을 찍겠다!’

이런 기회가 온 이상 연우혁은 한 번 해볼 생각이었다.

마두들을 붙잡고, 영약 구매는 잠시 미룬 뒤 모은 재산들을 전부 사용한다.

한경의 고관들은 물론이고 조정의 고관에게도 뇌물을 보내서 제대로 도전해보겠다!

실수하면 은자만 날리는 꼴이 됐지만 연우혁은 한 번 해볼만한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악검삼마와 오독귀는 조정에 악명이 높은 마두였다. 일개 포두가 잡아서 바친다면 한경을 넘어서 분명 조정까지 명성이 닿으리라.

그렇지만 그 전에...

“악검삼마는 붙잡으셨지만 오독귀는 아직 붙잡지 못하신 거군요.”

연우혁은 말로서 가볍게 초식을 출수했다. 상대를 설득하고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신비감과 위압감이 있어야 했다.

“!”

한기는 속으로 놀랐다.

저 진충비도의 말이 맞았다. 악검삼마는 장로들과의 대립이 터지자마자 급습해서 생포했지만 오독귀는 아직 장로들 밑에 있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난 악검삼마 그 놈들이 장로 밑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부채주 님께서 그 놈들을 어떻게...”

“맞네. 데리고 있지.”

“?!”

종광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부채주를 쳐다보았다. 한기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장로들이 헛소문을 퍼뜨리고 흉계를 꾸미는데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악검삼마 놈들은 장로들의 손발이 되어서 무림을 주유하던 놈들. 놈들의 혀를 비틀면 그 일들이 줄줄 나올 거다.”

“허... 대, 대단하십니다.”

종광은 머쓱해졌다.

녹림의 일이란 건 산채의 시설을 보수하고 주변 고갯길과 산길을 갈고 닦아 행객을 늘리는 것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녹림에 이렇게 거센 풍랑이 치고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거짓말을 한 건 아닐세. 오독귀도 잡을 자신이 있어. 장로들만 처리한다면...”

“믿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녹림대왕의 행방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기세를 휘어잡은 연우혁은 본론을 꺼냈다.

녹림칠십이채의 총채주 임가적은 녹림대왕이라는 거창한 별호를 달고 있었지만, 무림의 어느 누구도 그 별호를 비웃지 못했다. 녹림의 역사상 임가적만한 고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이 마흔에 절정의 경지에 올라, 정사를 가리지 않고 여러 고수들과 생사결을 벌여 승리한 일은 녹림도들이 아직도 자랑하는 일화였다.

고루한 정파의 무인들도 임가적의 무공 실력까지는 부정하지 못했다. 절정의 경지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초입부터 말입까지 차이가 났는데 임가적의 전적은 누가 봐도 말입에 가까운 실력이었다.

몇몇 녹림도들이나 호사가들은 더 과감하게, 임가적이 말입을 넘어 초절정 직전에 도달했으며 곧 벽을 깰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면 무림에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드문 초절정고수가 한 명 더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십 년 전 이야기였고, 녹림대왕 임가적은 최근 십 년 사이 공적인 자리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다.

절정의 경지에 올랐을 때는 생사를 계산하지 않고 무림을 쏘다니던 자가 저렇게 은인자중하자 무림인들이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심마에 빠졌다느니, 아니면 면벽수련을 하고 있다느니, 배신을 당해서 내공을 잃었다느니 여러 헛소문이 돌 정도로.

부채주와 장로들의 정쟁이 터진 것도 따지고 보면 녹림대왕의 부재 탓이 컸다. 총채주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어느 누구도 쉽게 경거망동하지 못했으리라.

“녹림대왕께서는 폐관수련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맞네.”

녹림도들은 총채주의 이야기를 외부에 하는 걸 꺼렸지만, 한기는 순순히 대답했다.

상황도 상황이지만 저 포두라면 확신을 갖고 말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기간으로 따지면 십 년도 넘었지.”

“허! 실로 대단하십니다. 저는 일 년도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종광의 말에 한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마찬가지일세. 어떻게 사람이 빛 한 점 들지 않는 동굴에서 십 년 넘게 버틴단 말인가? 그것도 벽곡단과 이슬만 마시고.”

“그러니 총채주를 하시는 겁니다.”

“말 마저 해도 되겠습니까?”

“아. 미안하군. 계속하게.”

“폐관수련을 하고 계신 분을 사라졌다고 하시는 걸 보면, 어느 순간부터 안에 계시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신 거겠지요. 그 기간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이년 반 정도 되었군. 실제로는 더 길 수도 있네. 폐관수련 때는 말을 많이 걸지 않으니.”

폐관수련을 하는 무인에게 계속 말을 거는 얼간이는 없었다. 몇 개월에 한 번 벽곡단과 물을 안으로 집어넣을 때가 아니라면 녹림대왕이 있는 동굴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다.

녹림에 급한 일이 있어서 의견을 구하러 가지 않았다면 지금도 모를 수 있었다.

“의견을 여쭤보았는데 아무 대답도 들어오지 않더군. 나를 비롯해서 장로들이 모두 찾아가 외쳤지만 묵묵부답이었네. 그 때 우리는 총채주께서 사라졌다는 걸 알았지.”

“그냥 안에 계시는데 무시한 거 아니오?”

적조는 의아하해며 물었다. 그러자 한기는 물론이고 종광까지 적조를 비웃었다.

“어이구, 무식한 포쾌 놈 같으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녹림은 하나의 산채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수십 개의 산채가 모여서 만들어진 힘이다. 오합지졸이 아니라 녹림으로 묶이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똘똘 뭉쳐야 한단 말이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분이 총채주신데, 부채주 님과 장로 님들이 찾아갔는데도 무시한단 말이냐? 산채들이 흩어질 수도 있는데!”

졸지에 종광 같은 우락부락한 채주한테 멍청하다고 욕을 들은 적조의 얼굴이 붉어졌다. 살수 인생에서 손으로 꼽을 만한 수치였다.

“그만해라. 무슨 안건이었는지는 말해주지 못하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었네. 총채주께서 계셨다면 절대 무시했을 리가 없는 일이었고. 그 다음부터는... 자네도 짐작하고 있으리라 믿네.”

폐관수련을 하고 있는 줄 알았던 녹림대왕이 사라지자 부채주는 물론이고 장로들도 발칵 뒤집혔다.

처음에는 녹림의 위세를 생각해 진실을 은폐했던 이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슬슬 다른 마음이 생겼다.

총채주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누군가 현명한 자가 녹림을 다스려야 하지 않겠는가?

“천벌 받을 개자식들! 우라질 놈들, 총채주 님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종광은 이를 갈았다. 산채의 채주로서, 장로들이 하고 있는 짓은 믿을 수 없는 배신이었다.

그러나 한기는 반응하지 않고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사실, 진충비도가 이 이야기에서 무슨 비밀을 찾아낼 수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애초에 한기를 비롯해 장로들이 총채주를 그리 찾지 않았던가.

온갖 흔적과 단서를 조사하고 하오문까지 동원했는데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행적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귀신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채주 님. 지금이라도 채주들을 불러주십시오. 무림의 채주들이 일제히 달려들면 총채주 님을 못 찾겠습니까?”

“그만둬라. 이미 찾아볼 만큼 찾아봤으니. 무림에 괜한 소문까지 퍼뜨려야 하겠느냐?”

한기의 말에도 종광은 불만을 숨기지 못했다. 부채주는 지친 표정으로 설명했다.

“총채주께서는 정인(情人)이 있으셨다. 그 사이에서 자식도 하나 얻으셨지.”

“!!!”

종광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녹림대왕의 자식이 있었다니!

“말, 말도 안 됩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돌보고 있었으니 잘 안다. 혹시 이 둘에게 온 것 아닌가 싶었지. 기다려봤는데 아무도 오지 않더군. 또 총채주께서 젊은 시절 세운 산채가 있었다. 혹시 폐관수련을 하시다가 그쪽으로 가신 건가 싶어 찾아가봤었는데... 물어보니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하더군.”

녹림대왕이 직접 신뢰하고 맡긴 만큼 한기는 총채주에 대해 가장 아는 게 많았다.

장로들 몰래 총채주가 갔을 법한 장소를 모두 찾은 한기는 강호에 더 이상 찾을 곳이 없다고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아까부터 경청하던 적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뭐? 포쾌 놈아.”

“혹시, 돌아가신 거 아니오?”

“이 미친 포쾌 놈이 뚫린 아가리라고 어디서 감히!”

종광은 발작하려고 했지만 한기가 그보다 빠르게 대답했다.

“음!”

“부, 부채주 님!”

‘음’에 담긴 뜻을 느낀 종광은 절망한 눈빛으로 한기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한기는 각오를 다진 얼굴이었다.

“나도... 그 생각을 하긴 했다.”

“부채주 님!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널 이해한다. 쌍패부. 나도 일 년 넘게 부정했으니. 하지만... 총채주께서 사라지셨어도 녹림은 녹림이다. 남은 자들은 식솔들을 돌봐야 하지.”

한기는 어두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누군가... 누군가, 폐관수련을 하던 총채주 님을 밖으로 불러냈을지도 모르지. 녹림의 급한 일이라면 총채주 님은 아무리 폐관수련 중이더라도 밖으로 나오셨을 테니. 장로들일수도 있고, 장로들과 결탁한 외부의 고수일수도 있다. 총채주 님이 쌓은 원한이 있으니 누구든 가능하겠지.”

녹림대왕은 절정의 고수가 되고 나서 정사를 가리지 않고 원한을 쌓았다. 어느 누구든 보복을 해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총채주 님께서 지실 리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무림에 무적은 없다. 어느 고수든 철저하게 기습당하고 매복당하면 패배하기 마련이지. 총채주 님한테 목숨을 잃었던 고수들도 자기가 갓 절정의 경지에 오른 애송이한테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말을 하던 한기는 자신의 가슴 속을 무겁게 짓누르던 돌덩어리 같은 게 사라지는 걸 느꼈다.

계속해서 외면해오던 진실을 인정한 덕분이었다.

그 순간 한기는 진충비도가 왜 ‘산채로 안 들어가도 총채주께서 어디 계실지는 짐작이 간다’라고 말했는지 깨달았다.

저 총명한 포두는 이미 총채주가 사라지고 녹림의 장로들과 부채주가 내분을 일으켰을 때부터 확신한 것이다.

총채주가 죽지 않고서야 이런 내분을 내버려둘 리 없었으니까.

진충비도를 쳐다보니 머뭇거리는 얼굴로 한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기는 연우혁이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렇군. 진충비도.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가?”

“녹호군 대협.”

“더 말할 필요 없네. 이제 이해했네. 자네가 왜 산채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는지. 내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외면하고 있었으니 답답했겠지. 무림의 선배로서 부끄럽군.”

한기는 후련하게 말했다.

이제 이 사실을 인정한 이상 더 이상 미망(迷妄)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원수를 찾아내 그 심장의 살점을 씹어 먹고 말리라.

“고맙군. 진충비도. 자네가 처음부터 말을 꺼냈다면 나는 다시 부정했을 걸세. 내 스스로 말을 꺼내게 유도해주지 않았다면 인정하지 못했겠지. 이제야 자네의 명성이 이해가 가네.”

무림에 자신의 총명함을 뽐내는 군사들은 많았지만 진정 사람을 설득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한기가 보기에 진충비도가 바로 그 드문 사람 중 하나였다. 저렇게 젊은 포두가 무림에 명성을 날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 거였나!’

적조는 새삼 감동했다.

아까 산채로 들어가지 않아도 안다고 했을 때는 대체 무슨 귀신의 조화인가 싶었는데, 연우혁은 상황만으로 녹림대왕의 죽음을 확신한 것이다.

그렇다면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적조는 이런 대단한 지혜를 목격하는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악검삼마와 오독귀는 반드시 잡아서 자네에게...”

“녹호군 대협!”

연우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쳤다. 한기는 물론이고 종광, 적조까지 깜짝 놀라서 당황했다.

“왜... 왜 그러지?”

“녹림대왕께서는 안 돌아가셨습니다. 그냥 면벽수련하던 동굴 안에 계실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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