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82화 (82/107)

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5)

뜬금없는 연우혁의 말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적조는 당황해서 말했다.

“포두님.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왜 말이 안 되나?”

“그야... 들으셨잖습니까. 동굴 앞에서 부채주와 장로들이 계속해서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고.”

적조도 살막의 대주였던 만큼, 한 조직의 장(長)을 맡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총채주 자리를 맡은 녹림대왕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책임을 진중하게 받아들였으리라.

“그리고 또 정인과 자식도 있었다잖습니까. 살아계셨다면 궁금해서라도 대답을 했을 겁니다.”

연우혁은 적조를 설득하는 대신 한기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폐관수련하던 동굴의 입구는 열어보셨습니까?”

“...열어보지 않았네.”

폐관수련하는 무인이 머무르는 곳의 문을 함부로 여는 것은 무림에서 금기에 해당됐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피해서 집중하기 위해 폐관수련을 하는데, 밖에서 멋대로 문을 열면 본말전도였다. 정말로 불운할 경우에는 주화입마나 내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녹림대왕 임가적이 폐관수련을 위해 머무르는 동굴은 녹림대산의 심처(深處)였다.

한 때는 다른 이름을 가진 산이었지만 칠십이채 중 으뜸가는 산채이자 총채 역할을 하는 녹림대왕의 산채가 자리잡고 나서는 녹림대산이라고 불리게 된 산.

당연히 그 흔한 땅꾼이나 채삼꾼도 여기에는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동굴 앞에는 다섯 치 두께의 철문이 출입을 막고 있었다. 운철을 섞어 만든 이 철문은 다른 문파의 어느 고수가 와도 쉽게 부술 수 없을 터였다.

이 모든 걸 폐관수련을 방해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준비했는데, 녹림도들이 자기 손으로 부술 수 있을 리 없었다.

실제로 부채주나 장로들 중 어느 누구도 불경스럽게 문을 건드리지 못했다.

“왜 열어보지 않으셨습니까?”

“폐관수련을 하는 무인을 방해하지 않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녹호군 대협께서는 총채주께서 안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계시잖습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멋대로 동굴의 문을 여는 건 멍청한 짓일세. 장로들이 뭐라고 지껄이겠나? 건방진 걸 보니 총채주께서 왜 사라졌는지 알겠다고 소문을 퍼뜨리겠지. 텅 빈 걸 확인하기 위해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는가?”

“저는 총채주께서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연우혁은 단호하게 말했다.

확실한 증거를 보여줄 수 없을 때에는 더 강하게 나가야 했다.

“총채주 님이 암습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그럴듯했지만 오히려 가능성이 낮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총채주 님은 무공만 높은 무인이 아닙니다. 본인 또한 채주로 시작해서 녹림의 대소사를 겪고 올라온 분이지 않습니까. 자기 자식도 쉽게 드러내지 않을 만큼 심계가 깊은 분이 녹림의 급한 일이라고 해서 몰래 밖으로 나와 허무하게 암습을 당한다? 아무리 믿음직스러운 장로들이라 하더라도 저는 가능성이 낮다고 봅니다.”

“.....”

한기는 혼란스러웠다. 듣고 보니 또 이 포두의 말에 이치가 기울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면 다른 곳으로 가신 거 아닌가?”

“녹림대왕 정도 되는 분이 밖에 나온 이상 아무리 정체를 숨겨도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소문도 하나 없고, 갈 만한 곳을 전부 다 뒤졌는데도 없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애초에 나가질 않으신 거지요.”

“하지만... 하지만...”

“녹호군 대협.”

증거가 없는 만큼 연우혁은 여기서 대화를 강하게 끝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저는 녹림대왕께서 왜 대답이 없으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귀신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를 믿고 철문을 열어보실지, 아니면 저를 믿지 않으실지. 그건 녹호군 대협께서 판단하십시오. 저는 강권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다른 말도 안 되는 장황한 가능성들보다는 가장 간단한 답이 맞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겠네. 고맙군.”

한기는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종광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아 머뭇거리다가 뒤늦게 눈치를 보며 서둘러 일어났다.

“좋은 결과가 있길 기대하겠습니다.”

“동감이네.”

녹림도들이 돌아가고 나자 적조는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물었다.

“저 놈들이 돌아갔으니 이제 속 시원히 설명해줘라. 대체 녹림대왕이 안에 있다는 게 뭐냐? 그럼 왜 대답을 안 한 거지?”

“눈치 못 채셨습니까? 저는 적 대협이라면 채셨을 줄 알았는데.”

“도저히 모르겠다. 왜 대답이 없었던 거지?”

“적 대협은 무림에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를 만나본 적이 있으십니까?”

적조는 고개를 저었다.

살수로서 무림에 다섯도 안 되는 초절정고수를 만나지 않았다는 건 행운이었다. 만났다면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만났다면 땅 속에 묻혀서 떠들고 있었겠지.”

“그럼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에게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아십니까?”

“글쎄...? 무공의 경지가 초월적이다, 사람 같지 않은 놈들이다, 뭐 이런 쓸데없는 말밖에 기억이 안 나는데.”

“방금 잘 말하셨습니다.”

“무공의 경지가 초월적이다? 그게 왜?”

“사람 같지 않은 놈들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제가 보기에 절정의 벽을 넘고 초절정으로 가려면 어딘가 도통(道通)하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연우혁은 청허진인이 설명해준 무공의 경지와, 자신이 알고 있는 녹림대왕의 진실을 토대로 그럴듯한 가설을 세웠다.

“소림승들은 오욕칠정을 버리고 해탈의 경지에 오르려고 노력한다잖습니까? 초절정의 경지도 비슷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전까지는 그렇게 집착했던 세속의 가치들이 덧없게 느껴지는 거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은데? 무공의 경지가 오른다고 머리가 맛이 간다는 건가?”

“하지만 전 그것 말고는 짐작 가는 게 없습니다. 그런 상태가 되었다면 밖에서 녹림의 일이 급하다고 외쳐도 무시할 수 있지요.”

“난 녹림대왕이 안에서 주화입마에 빠진 탓에 대답을 못하나 싶었다. 중독됐다면 그럴 수도 있잖냐.”

“그런 고수가 벽곡단에 독 좀 넣었다고 중독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주화입마도 마찬가지고요. 훨씬 더 가능성 낮은 이야기입니다.”

“내가 보기엔 이번엔 네가 틀린 것 같은데...”

적조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하게 들렸던 것이다.

“그럼 내기하시겠습니까?”

“좋다, 얼마든지!”

흔쾌히 수락하던 적조는 멈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예전에 장로가 해준 말이 갑자기 떠올라서.”

“뭐라고 하셨는데요?”

“너보다 똑똑한 놈이 내기를 하자고 제안하면, 아무리 유리해보여도 내기를 하지 말라고 하셨었지.”

“하하. 과장이 심하시군요.”

“......”

적조는 연우혁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

“...결정했다. 문을 연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한기는 결정을 내렸다. 종광은 물론이고 휘하 무인들은 모두 놀랐다.

“부채주 님! 장로들이 이걸로 공격하면...”

“모두 그만.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따라오도록.”

달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밤.

한기는 휘하 무인들과 함께 동굴 앞에 도착했다. 시커먼 철문은 어둠을 머금고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모두 물러나라.”

“예!”

부하들이 보초를 서는 사이 한기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절정의 고수가 뿜어내는 심후한 초식이 한 점을 정확하게 때리자, 문에 점점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얼마나 두드렸을까.

한기는 땀에 흠뻑 젖은 채 철문에 난 구멍으로 쇠막대를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돌려서 문의 빗장을 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한기는 연우혁의 말이 떠올라서 심란해졌다.

정말 이 안에 총채주가 있는 게 맞을까?

“총채주 님. 한기입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기는 캄캄한 동굴 속으로 걸어갔다. 구석에 쌓인 벽곡단과 이슬이 담긴 그릇이 보였다.

‘속았나?’

한기는 순간 두려움이 몰려왔다.

군사란 놈들이 얼마나 혀를 잘 놀리는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걸 알면서도 당했다면 한기는 어디 가서 말하지도 못할 만큼 수치스러울 터였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너무 길어서 알아보기도 힘들었지만, 한기는 그 사람이 누군지 즉시 알아보았다.

녹림칠십이채의 총채주, 녹림대왕 임가적이었다.

“총... 총... 총채주!!”

임가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앉아서 명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총채주 님. 저 한기입니다. 대답하십시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기는 흥분해서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으려고 했다.

그 순간 임가적이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예?”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한기. 나가서 문을 닫고, 아무도 여기 오지 말라고 해라.”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왜 대답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하지도 않으십니까? 당신의 자식이 어떻게 지내는지...!”

임가적은 눈을 떴다. 그 눈빛을 마주하자 한기는 가슴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살기나 적개심 때문이 아니었다.

상관의 눈빛에 드러난 감정은 완전한 무관심이었다.

“궁금하지 않다. 한기. 왜 대답하지 않았냐고? 귀찮았기 때문이다. 무공에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에 산적 놈들이 아옹다옹하는 걸 돌봐줘야 한다니.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총채주 아닙니까!”

임가적은 차고 있던 한 자루 도(刀)를 한기 앞에 던졌다. 평범한 도검이 아니었다. 녹림의 신물이었다.

“오늘부터 총채주는 너다. 수고해라.”

“미... 미친 놈...!”

한기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눈앞의 무인이 자신과 함께 녹림의 산채들을 휘어잡던 무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디 도 없이 한 번 막아봐라!”

한기는 분노해서 출수했다. 같은 절정이라고 해도 녹호군의 실력은 녹림대왕에 비하면 몇 수나 아래였다.

그러나 한기는 상대를 죽이려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방금 던진 녹림의 신물을 다시 붙잡게 만드려는 게 목표였다.

도법을 자랑하는 녹림대왕이 권법을 장기로 삼는 한기를 맨손으로 막아내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놀랍게도 임가적은 도를 잡지 않고 주먹을 뻗었다. 처음 보는 권법에 한기의 권법이 막혔다. 한기는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안 보는 사이 총채주의 무공은 훨씬 더 심후해져 있었다. 이게 초절정의 경지가 아니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허공에서 십여 초식이 지나갔다. 한기는 그대로 날아갔다.

“...죽여라!”

“한기.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군. 총채주가 꿈이 아니었나?”

“이딴 식으로 될 생각은 없었다!”

임가적은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다. 되고 싶지 않다면 다시 맡아두지. 밖의 상황을 말해라.”

“상황을 말하라니?”

“밖의 상황이 시끄럽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지금, 다시 무공을 수련하려고 해결하겠다고 하는 건가?!”

한기는 다시 한 번 경악했다.

무공에 집중하려고 밖의 상황을 정리하겠다니.

“싫나? 싫다면 네가 알아서 해결해라. 난 다시 수련에 집중하겠다.”

“......”

번민하던 한기는 입술을 깨물고 무릎을 꿇었다.

“총채주 님께서 나서주십시오!”

“알겠다. 대신 일을 끝내면 방해하지 마라.”

“...예.”

“한기. 그런데 내가 안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

“최근에 용하다는 포두 놈한테 물어봤습니다.”

“원래 농지거리에 능하진 않았지만 더 심해졌군. 가자.”

임가적은 자포자기해서 대답하는 한기의 말을 무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

사 포쾌의 천객객잔은 요즘 연 포두 휘하의 포쾌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였다.

원래는 철전 한 푼 동료에게 쓰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지만, 연우혁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기자 사 포쾌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이보게! 다들 한 잔씩 하게. 내가 사는 걸세.”

적조는 기뻐하며 싸구려 탁주를 받았다. 살막에 있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술이었는데 포쾌로 일하니 이상하게 입에 쩍쩍 붙었다.

“소문 들었나? 산적 우두머리 놈이 살아있었다는군!”

“뭐? 녹림대왕 말인가?”

“그래. 몰랐는데 녹림 놈들이 자기네 우두머리가 사라진 줄 알고 꽤 치열하게 싸웠나보더라고. 그런데 우두머리가 갑자기 돌아오니, 안 돌아올 줄 알고 날뛰던 놈들은 큰일 난 거지. 벌써 산채 몇 개는 박살이 났다더군.”

“그게 어딘가? 그쪽은 좀 편하게 다니겠군!”

“컥.”

적조는 탁주를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서 컥컥댔다. 사 포쾌는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찼다.

“거 아무리 공짜로 줘도 그렇지... 천천히 좀 마시게. 자. 한 잔 더 줄 테니까.”

“그... 그게 아니라...”

“그래. 알겠네. 오늘 특별히 인심 좀 쓰지. 자!”

적조는 일단 다 마시고 녹림 놈들 이야기를 캐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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