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83화 (83/107)

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6)

술에 취한 보부상들은 질문 몇 마디를 던지자 신이 나서 최근에 주워들은 녹림의 정세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녹림끼리 내분이 나서 치고받고 한다는 말에 포쾌들은 물론이고 다른 행객들까지 발을 구르고 함성을 질렀다.

평소 강호를 돌아다니다 보면 한 번쯤은 녹림에게 돈을 지불해야 할 때가 있었고, 허전해진 전낭의 한구석을 보면 어느 누구나 녹림에게 가벼운 원한 정도는 쌓이기 마련이었다.

포쾌들은 돈 뜯긴 원한은 없었지만 그냥 무림에서 싸움 났다는 소식을 즐거워했다. 더군다나 도둑놈들끼리 싸웠다니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적 포쾌. 왜 그렇게 울상인가?”

“하... 말 걸지 말게.”

“어허. 그럴 수 있나. 자. 한 잔 더 마시고 말해보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아. 잠깐. 알겠군!”

오 포쾌의 날카로운 눈빛에 적조는 깜짝 놀랐다.

명포두 밑에 약포쾌는 없단 법인가?

설마 방금 적조의 반응만으로 무언가 알아차리다니...

“자네 혹시 녹림 출신인가?”

“......”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유랑민으로 떠돌다보면 녹림 좀 할 수 있는 게 사람 일 아니겠나. 내 모르는 척 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게.”

“아니다!”

“아니야? 미, 미안하군. 화내지 말게.”

적조가 발끈해서 고함치자 오 포쾌는 허둥지둥 물러났다. 그 모습에 적조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괜히 놀랐군.’

살막 출신이라 그런지 녹림 출신이라고 의심을 받아도 괜히 놀라게 됐다.

‘정말 녹림대왕이 살아있었을 줄이야...!’

적조는 장로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기보다 똑똑한 놈과 내기한 자신을 탓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멀쩡하게 살아있는 놈이 죽은 사람 노릇을 했단 말인가?

“산적들은 모두 죽어라! 하하하!”

“칠십이채가 삼십육채가 되고, 삼심육채가 십팔채가 될 테니, 관군을 보내서 토벌해버리세!”

“나는 녹림대왕이다. 이놈! 너희 산적 놈들이 통행세를 걷어가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아이고, 대왕님. 지나가는 놈들한테서 돈을 걷지 않으면 무엇을 바칩니까요?”

“어이쿠. 그렇구나! 그럼 앞으로 두 배로 걷어라!”

“에라이, 저 도둑놈 같으니! 죽여라! 죽여!”

객잔은 외지인들과 포쾌들이 섞여 매우 시끌벅적해졌다. 그러는 사이 문이 조용히 열렸다.

새로 방문한 손님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적조였다. 적조는 한기가 들어온 걸 보고 눈을 끔뻑거리다가 경악했다.

‘아, 안 돼!’

저걸 내버려뒀다가는 한경 한복판에서 녹림 놈들의 칼부림이 일어나게 됐다. 적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취해 떠드는 놈들의 입을 다물게 할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한기는 피곤한 얼굴로 적조에게 손짓했다. 밖으로 나오란 신호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찔리는 구석이 많은 적조는 밖에 나와서 객잔을 힐끗 쳐다보았다. 눈치 없는 놈들이 녹림에 대한 노래를 아직까지 부르고 있었다.

“포두 말이 맞았더군.”

“예... 뭐.”

“객잔 때문에 그러는 건가? 신경 쓸 필요 없네. 지금 저런 놈들한테 일일이 손을 쓸 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으니.”

객잔에 걸린 등불에 비춰진 한기의 얼굴은 저번에 만났던 것보다 십 년은 더 늙어보였다. 적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녹림대왕께서 살아계셨던 거 아니오...?”

“맞네.”

“그런데 왜? 아, 혹시 장로의 편을 든 산채들이 많아서? 그것 때문에 이렇게 지치신 거요?”

“...아닐세. 포두는 어디 있나?”

“따라오시오.”

적조는 연우혁의 자택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우혁은 먹과 붓을 치워둔 채 종이를 읽고 있었다.

“?”

평소 연우혁이 무공을 수련하는 건 많이 봤어도 먹을 갈아서 글씨를 쓰는 것은 보지 못했기에, 적조는 뭘 쓰고 있나 의아해했다.

“녹호군도 왔나?”

연우혁의 질문에 적조는 깜짝 놀랐다.

“그 자가 오늘 올 것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자네 뒤에 서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연우혁의 말에 적조는 그제야 한기가 기다리지 않고 따라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적조는 얼굴을 붉히며 따졌다.

“예의도 없소?”

“산적 놈이라 예의가 없지. 예의가 있다면 산적을 하겠나?”

“......”

비열하게 산적 핑계를 대는 한기의 태도에, 적조는 이를 악물고 등을 노려보았다.

‘확 찔러버린 다음에 살수 핑계를 대버릴까보다.’

“진충비도. 자네 말대로 총채주님께서는 살아계셨네. 아주 멀쩡하시더군.”

“다행입니다.”

“다행... 그래, 다행이지.”

한기는 씁쓸해하며 대답했다. 적조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캐물었다.

“대체 왜 대답이 없으셨던 거요? 심마라도 빠지셨던 거요?”

“아니. 나를 포함한 녹림이 전부 다 수련에 방해가 되었다고 하시더군.”

이미 알고 있는 연우혁은 놀라지 않았지만 적조는 깜짝 놀랐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살막의 막주가 갑자기 ‘너희가 수련에 방해가 되니 나를 부르지 말거라’라고 하는 꼴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도 모르겠네. 그만하지. 설명은 다 된 것 같으니. 진충비도. 오늘 온 건 저번에 이야기한 악검삼마와 오독귀 때문이네. 어떻게 가지고 갈 생각인가?”

악검삼마와 오독귀를 넘겨받기로 약속했지만, 사실 이런 마두들은 은자 주고받듯이 쉽게 넘길 수 없었다.

당장 악검삼마 셋을 잘 묶어서 관아에 데리고 가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어떻게 잡았는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시전에서 물건 훔친 도둑놈이야 어떻게 잡았는지 묻지 않겠지만 악검삼마와 오독귀는 예전에 고관을 죽인 뒤 십 년 넘게 추격을 따돌린 놈들 아닌가.

그렇다고 ‘허허 제가 녹림 총채주의 실종을 앉은 자리에서 해결하고 그 대가로 받았습니다’같은 말을 했다가는 ‘저 미친 마두 놈이 본색을 드러냈구나!’같은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넘겨주더라도 적절한 준비가 필요했다.

조금 조잡하긴 하지만 연우혁이 다른 지역으로 친척을 보러 가는데, 길가에 쓰러진 놈이 있어서 누군가 확인해봤더니 낯익은 죄인의 얼굴이어서 목을 베었다거나...

“오독귀는 잡으셨습니까?”

“어디 산채에 있는지는 확인했네. 악검삼마는 저번에 말한 대로 붙잡아놓은 상태고. 자네가 어떻게 받을지 말해주면 오독귀까지 붙잡아서 정해주겠네.”

“감사합니다. 사실은...”

쿵!

저택 문 두드리는 소리에 적조는 또 누가 왔나 싶었다. 그 때 마침 연우혁이 읽던 종이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신 우혁이 삼가 아뢰옵니다... 스스로를 무림이라고 일컫는 무뢰배들이... 감히 조정의 신료들을 해치우고... 하찮은 포두지만 일말의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이들을...

“......”

무슨 거창한 출사표 같은 글줄에 적조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쿵!

밖의 사람은 기다릴 생각이 없었는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왔다. 한경의 정관 중 하나인 금 통판이었다. 살찐 몸을 이끌고 뛰어왔는지 온몸이 땀에 푹 젖어있었다.

“연... 연 포두! 미친 건가! 포쾌들을 이끌고 마두를 잡으러 간다니.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할 거다! 내 너를 아들처럼 여기고 잘 대해주려고 했거늘, 무엇이 아쉬워서 사지로 기어가는 것이냐?! 당장 지부 어른께 말씀드려라! 지금이야 질책으로 끝나겠지만 정말 이끌고 떠나면 절대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거다!”

금 통판의 외침에 적조는 연우혁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이 포두 놈은 포쾌들을 이끌고 마두를 붙잡아 오겠다고 지부한테 계서를 올린 것이다!

‘저... 저런 뻔뻔한 놈!’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한경의 관리들한테 연우혁은 녹림의 내분을 틈타 포쾌들만 데리고 가서 마두를 붙잡아오겠다는 미친 포두처럼 보일 것이다.

진짜 난 놈은 난 놈이다!

“지부 어르신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부 어르신께서는 좋아하시면서 수락하셨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반대했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냐!”

금 통판이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 같자 연우혁은 뜨겁게 외쳤다.

“아버지!”

“...!”

“이 아들이 언제 틀린 계책을 내놓은 적이 있었습니까? 녹림이 혼란스러운 지금이 아니라면 마두들을 붙잡아 올 수 없을 겁니다. 또, 마두들이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의로움이 없습니다. 의롭지 못한 자가 의로운 자를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하... 하지만...”

금 통판은 어떻게든 연우혁을 말리려고 했지만, 고작 금 통판이 연우혁을 언변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금 통판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외쳤다.

“좋다, 가라! 가서 마두들을 잡아와 한경 관리의 의기를 높이 알려라! 만약 죽기라도 한다면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금 통판이 돌아가고 나자 한기는 못 볼 걸 본 표정으로 적조에게 물었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

***

오 포쾌는 곧 죽을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 곧 녹림 놈들의 산채가 가까워졌다.

“좀 진정하게. 안 죽으니까.”

그래도 무공을 익힌 사 포쾌는 조금 나았다. 물론 오 포쾌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포두님의 무공이 뛰어나도 여기 있는 산적 놈들의 화살을 다 막아줄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면갑까지 갖춰 입은 건가? 그럴 거면 차라리 오지 말지...”

“어떻게 혼자 빠지나? 그걸 말이라고 하나?”

“조용히 하게. 저기 녹림 놈들이 있으니.”

적조가 앞을 가리키며 말하자 포쾌들은 모두 기겁했다.

아직 산채가 보이지도 않았는데 녹림 놈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저, 저 놈들은 왜 산채 밖에서 저러고 있는 거지?”

“요즘 녹림 놈들끼리 싸운다던데 그것 때문에 저러고 있는 것 아닌가?”

금세라도 같은 녹림의 산채를 공격할 것 같은 흉흉한 기세에 포쾌들은 주눅들었다.

저들이 포쾌들이라고 내버려둘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포두님. 다시 생각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들이...”

“어서 오시오. 진충비도.”

아래 모여 있던 녹림도들은 일제히 길을 비켰다.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걸어갔다.

“...?!!”

“?!?!?”

그 모습에 포쾌들은 귀신을 본 것마냥 놀랐다.

“포, 포두님. 녹림 놈들이 대체 왜 저러는 겁니까?”

“관의 일로 왔기 때문이지. 원래 관과 무림은 서로 관여하지 않는 법이니.”

“......”

“......”

연우혁의 말에 포쾌들은 어이가 없었다.

산길을 가다가 녹림 놈들 만났을 때 포쾌 요패 휘두른다고 겁먹을 놈들이 어디 있겠는가.

킬킬 웃으며 요패를 뺏으면 뺏을 놈들이었다.

관무불가침도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서로 존중해주는 거지 포두가 포쾌 한 무리 끌고 왔다고 ‘저런! 공무 때문에 오셨습니까!’하고 비켜주는 건 정말 말도 안...

그러나 다시 물어보기도 전에 연우혁은 천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 포쾌가 그걸 보고 중얼거렸다.

“알았다! 포두께서 놈들에게 섭혼술을 쓰신 거구나.”

“......”

***

“반기를 든 장로들 중 남은 놈들은 모두 여기 철랑채에 모였네. 철랑도(鐵狼刀) 곽탁. 대대대겸(大憝大鎌) 표공. 오독귀도 여기 있고.”

한기의 말에 연우혁은 물었다.

“총채주께서는 왜 저 산채를 안 치십니까?”

들었던 대로의 고수라면 그냥 혼자서 밀고 들어가면 끝이 날 것이다.

게다가 저들도 원래는 녹림도 아닌가. 총채주가 직접 나타나서 덤벼들면 아무리 용맹한 놈들도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질 터.

“소문과 달리 총채주께서 직접 싸움에 나서신 적은 없네.”

“!”

연우혁은 놀랐다.

녹림대왕이 돌아와서 산채를 몇 개 박살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니.

그렇다면 그냥 등장만으로도 녹림 내의 전세를 완전히 바꿔버린 것이다.

‘장로들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겠군.’

죽은 자가 살아난 것도 놀라운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상황을 끝내버리다니.

“총채주께서는 우리끼리 알아서 마무리를 짓길 원하시네. 도움을 부탁드릴 순 없을 것 같군. 그래도 걱정할 것 없네. 내일 끝장을 볼 생각이니까.”

한기는 내일 녹림의 정예를 이끌고 철랑채를 몰아칠 생각이었다.

장로, 철랑도 곽탁 또한 절정의 고수였지만 한기는 충분히 곽탁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대대대겸 표공이나 오독귀 정도는 휘하의 다른 대주들이 제압할 것이다.

“여기 산채 이름이 철랑채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산채 위로 삐죽 솟은 저 두 개는 망루 맞습니까?”

“맞네. 곽탁은 교활한 자라, 철랑채는 다른 산채보다 방비가 좀 두텁네. 저 망루 또한 곽탁이 직접 세운 걸세. 산 아래까지 쉽게 볼 수 있도록.”

“활과 화살 하나만 주십시오. 곽탁의 목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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