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84화 (84/107)

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7)

“설마 여기서 맞추겠단 건가?”

“그럴 리 없잖습니까.”

연우혁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한기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한기도 뒤늦게 느꼈는지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활과 화살 하나만으로 곽탁의 목을 가져오겠단 건가?”

“간단한 반간계입니다.”

연우혁은 아무 내용도 없는 빈 편지 위에 대대대겸 표공의 이름을 적은 뒤 화살에 단단히 묶었다.

“표 장로가 서신을 받으면 곽 장로도 확인해보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비어있는 내용을 보면 곽 장로는 수상하게 여길 겁니다.”

“으음.”

한기는 감탄하는 대신 아리송해하는 표정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반간계는 분명 성공하면 좋은 계책이었지만, 원래 그렇게 쉽게 성공할 수 있는 계책이 아니었다. 적들도 분열하면 죽음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꾸준히 헛소문을 퍼뜨리고, 꾸준히 밀사를 보내고, 온갖 꼬드김을 다했는데도 분열이 일어나지 않아 실패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저런 서신 하나로 반간계를 성공시키려 하다니.

한기가 보기에는 영 힘이 부족해보였다.

“이것 하나로 끝인가?”

“예.”

“이것 하나로는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은데...”

“내일 끝장을 볼 생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랬지.”

“그렇다면 내일이 되기 전에 결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

자신만만한 연우혁의 태도에 한기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제까지 봤을 때 저 젊은 무인이 아무것도 없이 허세를 부리는 무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확실한 게 없다면 말을 삼가는 성격이었다.

그럼 정말 자신이 있다는 뜻이 되는데...

‘모르겠다, 모르겠어!’

한기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무림에서 남들이 우러러보는 절정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막막함만 느낄 뿐이었다.

사람 같지 않은 총채주도 불가해한 존재였지만, 이 포두도 비슷하게 불가해했다.

살면서 한 번도 지모(智謀)로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포두 앞에서는 그냥 무식한 일개 채주가 된 기분이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보인단 말인가?’

‘저렇게 생긴 곳이라면 확실하다.’

한기가 고민하는 것도 당연했다. 연우혁이 보고 있는 건 한기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산채 위로 삐죽 솟은 두 개의 망루, 갇혀 있는 산적들, 빈 편지와 갑자기 살해된 산적 우두머리...

연우혁에게는 철랑채에서 벌어질 사건이 보였다.

평소와 달리 벌어진 사건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사건을 일으키는 쪽이 되었지만 연우혁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이제까지 해왔던 걸 보면, 분명히 사건도 일으킬 수 있다. 빈 편지가 산채로 날아들면 사건은 일어난다!’

만약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괜찮았다. 연우혁은 녹림의 산적들 정도는 충분히 언변으로 구워삶을 자신이 있었다.

각오를 다진 연우혁은 문득 자신이 조금 마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다. 난 마두를 잡으려고 이러는 거니까.’

***

날이 밝자 한기는 산채를 공격하기 전 마지막 사절을 보냈다.

이번 사절은 조금 특별했다. 놀랍게도 한기 본인이 사절에 참가한 것이다.

“부채주 님! 놈들이 어떤 짓을 할지 모릅니다.”

“나 하나 정도는 충분히 빠져나올 자신이 있다.”

“하오나...”

“설마 내 무공을 의심하는 거냐?”

“아닙니다. 죽여주십시오!”

한기가 사절에 참가한 이유에는 자신감도 있긴 했다.

현재 철랑채에 갇힌 녹림도들은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있을 터.

한기를 멋대로 공격해봤자 처참한 최후만 맞이하리란 걸 잘 알았다. 장로들이 섣불리 급습해봤자 휘하의 부하들이 놀라서 먼저 도망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데리고 가는 녹림의 정예들까지.

상대가 급습하더라도 충분히 빠져나오고 남았다. 손익을 계산하면 한기는 차라리 상대가 급습해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보다 큰 진짜 이유는, 진충비도의 호언장담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정말로 곽탁이 죽었을까?

한기는 아직도 반신반의 중이었다. 머리는 곽탁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다고 외치지만, 본능은 진충비도가 믿는 구석 없이 호언장담하진 않았을 거라고 외치고 있었다.

같이 사절에 참가한 진충비도를 보니 본인은 태연했다. 표정에 별다른 변화 없이 무심하게 산채를 쳐다보는 걸 보니, 오히려 더 신뢰가 갔다.

‘...정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끼이익!

철랑채의 문이 올라갔다. 산적이 만들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잘 만들어진 산채였다. 도르래로 올라가는 문과 아래에 파여진 해자까지.

사절들이 들어오자 안에 모여있던 장로 휘하 녹림 산적들의 눈빛이 복잡하게 번쩍였다.

불안함과 기대감, 적대심과 후회가 섞여 있는 눈빛이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표 장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놈! 감히 녹림의 부채주가 방문했는데 일개 채주가 이렇게 방자하다니! 이 자리에서 죽고 싶은 것이냐!”

녹왕대의 대원들이 살기를 피우며 산적을 노려보았다. 한기는 잘했다고 전음을 보냈다.

한기가 방문했으면 당연히 이 철랑채의 채주 노릇을 하는 철랑도 곽탁이 마중을 나와야 하는 법.

그러나 한기는 분노 대신 기대를 느꼈다. 곽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니.

“오... 오... 오해가 있으십니다. 곽 장로께서는 이 산채의 채주가 아니십니다. 그리고 표 장로와 곽 장로 두 분의 배분은 같지 않습니까. 표 장로께서 나오신 건 절대 방자해서가 아닙니다.”

산채의 녹림도는 얼굴이 납빛으로 질렸지만 어떻게든 해명했다.

녹왕대 대원들이 윽박지르려고 하자 한기가 손짓으로 말렸다.

“됐다. 그렇다니 믿어줘야지. 곽 장로가 나를 보기 두려워하나보군.”

그 말에 사절들이 기세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산채의 산적들이 대꾸나 욕설을 날리는 대신 노려보는 것만 봐도 형세의 곤궁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희끗희끗한 머리와 수염을 가진 노인이 뒤에 부하들을 세워놓은 채 눈을 감고 사절을 기다리는 게 보였다. 녹림의 장로이자 대대대겸(大憝大鎌)이란 별호를 갖고 있는 표공이었다.

겸(鎌)이란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표공은 뒤에 커다란 낫 형태의 무기를 비스듬하게 걸쳐두고 있었다. 들어오는 사절들에게 무언의 압박을 보내는 셈이었다.

언제든지 출수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절들 중 어느 누구도 저런 협박에 넘어가지 않았다. 저런 협박에 넘어간다면 녹림도 자격이 없었다. 하물며 저건 상처 입어서 곧 죽기 직전의 호랑이 아닌가.

“반갑소. 장로.”

“많이 무례해졌군. 녹호군. 네가 녹림의 부채주가 되었을 때 널 지지해준 게 누구더냐?”

“총채주가 지지해줬던 것 같소. 그 외에는 기억에 없군.”

자신보다 배분이 낮은 부채주의 무례에, 표 장로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흥, 왜 녹림이 이렇게 결딴났는지 알 거 같군그래! 저런 놈이 부채주 자리에 앉았으니!”

사절로 온 무인들의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한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역시 녹호군 대협이시다!’

‘이 분이 아니라면 녹림은 예전에 반으로 쪼개졌을 터.’

대원들이 감탄해하는 사이 한기는 다른 생각에 깊게 몰두한 상태였다.

‘곽탁 놈이 정말 죽었나? 하지만 놈이라면 일부러 날 도발하기 위해 만나지 않으려고 한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놈이 정말 죽었다면...’

“이봐, 이봐!”

“!”

표 장로의 말에 한기는 고개를 들었다. 표 장로는 불만스럽게 수염을 휘어 감으며 한기에게 말했다.

“사절로 온 이상 협상을 해야하지 않나. 응? 원하는 게 있으니 이렇게 사절로 온 것 아닌가.”

사실 곽탁이 죽었는지 확인하러 온 것에 가까웠지만 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 장로의 얼굴에 교활한 빛이 번뜩였다.

“밑에 모여 있는 놈들을 몰아치지 않고 사절을 보낸 걸 보니 여기 철랑채가 두렵긴 한가보군?”

“하!”

사절의 무인이 비웃었자 장로의 부하들이 분노했다.

그러나 표 장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직 어린 놈이니 그것만 보이겠지. 하지만 내 말을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곽탁이 죽었을까?’

“총채주께서 왜 잠적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돌아오고 나니 녹림의 꼴이 말이 아니었던 거지.”

‘아니다. 살았을까?’

“네놈들이야 우리가 때려죽여야 할 배신자들로 보이겠지만, 총채주께서는 우리도 녹림의 일원으로 보이실 거다.”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게다가 녹호군 저 놈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도 어느 정도 있지 않겠나? 홀홀홀. 총채주께서 아마 더 이상 피를 보지 말고 최대한 온건하게 끝내라고 하신 거겠지!”

‘살았을지도...’

표 장로는 자기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연우혁은 뭔 개소리를 잘도 한다 싶었다.

“대답해라, 녹호군! 왜 아무 말도 없나! 정곡을 찔린 거냐!”

“철랑도 그 놈은 어딨소?”

한기는 무심코 묻고 후회했다. 너무 급히 질문을 던진 것 같았다.

“곽 장로? 그 놈 성격을 너도 알 텐데. 귀찮은 일은 나한테 맡겨두고 자기는 혼자 안에 있다. 네놈 보면 칼부터 휘두를 테니 만나기 싫다는 거지.”

표 장로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철랑도 곽탁이 귀찮고 체면 상하는 일들은 모두 자신한테 맡긴다는 불평이었다.

그 불평에 산채의 녹림도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둘의 사이가 막역하기에 저렇게 남들 보는 앞에서 불평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사소한 불평에도 오해할 수 있는 사이라면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아. 정말 어렵다!’

한기가 시름에 잠긴 표정을 짓자 사절로 온 무인들은 걱정이 됐다. 대체 부채주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보다 못한 연우혁이 속삭였다.

“한 대협. 지금 혹시 곽탁이 죽었나 안 죽었나 궁금해서 이러시는 겁니까?”

“어떻게 알았나?”

“그것과 별개로 사절로 오신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것부터 해야지요.”

“사절로 온 이유는 곽탁이 죽었나 안 죽었나 확인하러 온 걸세. 애초에 그렇지 않으면 오늘 새벽에 쓸어버렸을 놈들을 무엇하러 만나겠나.”

“......”

연우혁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 곽탁이 진짜 죽었나 안 죽었나를 확인하려고 사절을 보낸 거였다니!

분명 어떤 목적이 있어서 협상을 하려고 온 줄 알았는데...

“그건 그냥 쓸어버리신 다음에 확인하셔도 됐잖습니까.”

“혼란스러운 상황이 아닌, 내 눈으로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네.”

‘이 사람, 얼마나 궁금해한 거야?’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 같이 온 사절단의 수장이었다. 연우혁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럼 제가 그냥 확인시켜드리면 됩니까? 그 다음에는 아래에서 지원 오는 게 맞겠지요?”

“방법이 있나?”

“제가 잘 하는 게 뭐겠습니까. 사람 죽인 놈 찾는 겁니다.”

연우혁은 벌떡 일어나더니 표 장로에게 소리쳤다.

“네 이놈! 그래도 철랑도 곽 대협이 녹림의 장로였는데 멋대로 습격해서 죽이다니.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

죽음보다 무거운 적막이 방 안을 맴돌았다. 사절로 온 무인들도, 표 장로의 부하들도 어안이 벙벙해져서 눈만 깜박거렸다.

그러나 표 장로는 기절할 듯이 당황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당황해서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씹듯이 뱉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냐! 말을 하면 다인 줄 아느냐?”

연우혁은 일어나서 문을 벌컥 열더니 밖에도 들리게 크게 외쳤다.

“곽 장로가 저 망루 아래 묻혀 있다! 망루 아래를 보면 새 흙으로 덮여져 있을 것이다. 시체에 묻은 독기 때문에 변색된 새 흙일 터! 그 흙을 파내면 곽 장로의 시체가 있을 것이다. 표 장로가 곽 장로를 죽였다! 어젯밤 곽 장로와 말다툼한...”

“이 개새끼가!”

산채의 부하들 앞에서 은밀한 내막이 낱낱이 까발려지자 표 장로는 장로로서의 체면도 던져버리고 대겸을 꼬나쥔 채 휘둘렀다.

연우혁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쌍사보법을 펼쳐 거리를 벌렸다. 표 장로는 독기가 올라 살초를 던져댔지만, 피하는 것에만 전념하는 연우혁을 단기간에 죽이는 건 표 장로의 경지로는 무리였다.

아래에서 듣고 있던 산채의 산적들은 크게 귀담아듣지 않고 망루 아래를 확인해봤다. 놀랍게도 새로 흙을 덮은 흔적이 있고 독기가 있었다.

산적들은 대경실색해서 흙을 파헤쳤다. 그 아래에는 낯익은 무인의 시체가 있었다.

“곽, 곽 채주가 죽었다!!!!”

“곽 채주가 죽었다! 표 장로가 곽 채주를 죽였다!!!!”

표 장로는 공격을 날리던 걸 멈추고 우뚝 섰다. 산채의 녹림도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것이다. 심지어 방금까지 그를 호위하고 있던 부하들도 경악의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오해다!”

“무슨 오해 말입니까, 장로님! 어떻게 곽 채주를?”

“오해라니까! 저 놈이 수작을 부린 거다!”

“내가 밤에 들어와서 곽 장로를 죽인 뒤 저기 묻을 재주가 있었으면 당신부터 죽였겠지 여기서 이러고 있겠소?”

빈정거리는 말에 표 장로는 저 정체 모를 잡놈부터 찢어죽이겠다고 이를 갈며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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