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85화 (85/107)

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8)

“장로님, 설명해주십시오. 채주께서 왜 저기 계신단 말입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부하들의 외침에 표 장로는 울화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배신감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힐난하는 꼴이 견디기 힘들었다. 장로 본인이 고수가 아니었다면 심마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지금 철랑도의 죽음에 가장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표 장로 본인이었던 것이다.

표공이라고 해서 철랑도를 죽이고 싶었겠는가?

밖에 녹호군이 녹림의 정예를 이끌고 와서 턱밑까지 살기를 쏘아 보내고 있는데?

하지만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 공격하지 않았다면 철랑도 본인이 먼저 표 장로를 공격했을지도 몰랐다. 철랑도보다 무공이 한 수 아래인 표 장로로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었다.

‘그 빈 편지만 아니었다면!’

표 장로는 아직도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내용 없는 빈 편지 하나 때문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래에 있는 녹림 놈 하나가 조롱을 하려고 그랬는지 화살에 편지를 묶어서 산채로 쏘아 보냈다. 당연히 이런 것에 흔들릴 표 장로가 아니었기에 코웃음을 치며 편지를 펼쳤는데...

놀랍게도 편지는 대대대겸한테 보낸다는 말만 있고 나머지는 텅 비어있었다. 표 장로는 어느 무식한 놈이 내용이 담긴 종이를 실수로 빼먹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철랑도의 생각은 달랐다. 텅 빈 편지를 보자 철랑도는 표 장로에게 분노와 의심을 폭발시켰다.

-지금 밖의 놈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편지가 빠진 거 같다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입조심해라, 곽탁! 지금 내가 설마 결탁이라도 했다는 거냐!

-못할 것도 없지. 네놈만큼 꿍꿍이 수상한 놈이 녹림에 어디 있겠느냐! 내가 이길 것 같을 때에는 나한테 붙더니 내가 질 것 같자 저 녹호군 놈한테 붙으려는 것 아니냐. 왜, 내 목을 가져오면 대우해주겠더냐?

-이런 죽일 놈이!

-감히 어디서! 나가라, 표공! 이제까지 해온 게 있으니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근신하고 반성하라! 한 번만 오늘처럼 행동하면 아무리 장로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살기 넘치는 철랑도의 행동에, 표 장로는 가만히 있다가는 누명으로 죽겠다고 느꼈다.

밑에 있던 오독귀 또한 표 장로를 꼬드겼다.

-철랑도 놈을 믿으시는 것입니까? 그 놈은 난폭하고 거친 자라 믿을 놈이 안 됩니다. 차라리 놈을 죽여버리고 철랑채를 휘어잡으시지요.

-철랑채는 놈의 산채다. 멋대로 죽여버린다고 해서 될 게 아니야.

-크크크...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십니까. 천하의 대대대겸께서 겁이 이리 많으실 줄이야. 놈을 죽인 다음에 그 사실을 숨기면 되지요. 채주가 안 나오겠다는데 문을 두드릴 놈이 있겠습니까? 그런 다음 적당한 때를 봐서 밖의 놈들이 죽였다고 하면 다 속을 겁니다.

-하지만 놈의 무공은...

-제 독과 장로님의 무공이라면 충분합니다. 오늘! 오늘 밤 놈을 해치우시죠. 망루 아래로 불러내겠습니다.

-네 독공으로는 놈을 중독시키지도 못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평소 철랑도가 마시던 술에 독을 타놨으니 말입니다. 한 달은 넘게 마셨으니, 이제 슬슬 독을 깨울 때가 된 거 같습니다.

-너, 너...!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저지른 오독귀의 행동에 분노했지만, 표공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안 그래도 의심을 산 상황에서 오독귀의 행동까지 들킨다면 정말로 죽을 수 있었다.

결국 둘은 사투를 벌여 철랑도를 제압했다. 오독귀가 미리 중독시키지 않았다면 둘로서도 힘들었을 치열한 싸움이었다.

“...철랑도가 날 죽이려 했다.”

“그렇다면 왜 저희한테 숨기신 겁니까!”

“말했다고 한들 네놈들이 귀담아 들었겠느냐!”

표 장로와 부하들이 떠드는 사이 한기는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정말 빈 편지 때문에 죽였소?”

“??”

부하들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표 장로는 눈을 부릅떴다.

“너... 너... 너...?!”

그 편지가 설마 잘못 온 게 아니라 책략이었단 말인가?

“대단하군... 정말 통할 줄이야.”

한기가 연우혁을 보며 말하자 표 장로는 홱 고개를 돌렸다. 본능적으로 누가 가르침을 준 건지 깨달은 것이다.

옆으로 쭉 찢어진 눈꼬리에서 살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표 장로는 귀신 같은 형상으로 외쳤다.

“네놈의 간을 씹어먹지 못하면 이 표공은 대장부가 아니다!”

“걱정 마시오. 장로. 어차피 오늘 여기서 죽게 될 텐데.”

말과 함께 한기와 녹림의 정예들이 발검했다. 번뜩이는 검광이 방 안을 휩쓸고 피가 튀었다.

충격적인 사실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던 장로의 부하들은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다. 이들은 표 장로를 지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신호를 보내라.”

“예.”

효시가 허공을 가르고 찢어지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동시에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녹림의 정예들이 함성을 지르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기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산채 전체를 호령했다.

“대대대겸 표공은 녹림도로서 하늘에 맹세한 것을 잊어버리고 질서를 망가뜨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철랑도 곽탁을 멋대로 기습해서 죽였다. 철랑채의 녹림도들은 지금이라도 곽탁의 원수를 갚아라! 그렇지 않다면 곽탁은 저승에 가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닥쳐라!”

표 장로는 대겸을 휘두르며 이겸차안(以鎌遮眼)의 초식을 펼쳤다. 허공에 어지러운 잔영이 생겨나더니 한기의 요혈을 위협했다.

녹호군 한기는 상대가 펼친 환의 묘리에 넘어가는 대신 우직하게 주먹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생겨난 허초들이 순식간에 뭉개지고 오히려 초식을 낭비한 표 장로의 움직임이 더뎌졌다.

“비키지 못할까!”

“나보다 강하지도 않은 자가 한눈을 팔려는 거요?”

“저 놈은 죽이고 말겠다!”

표 장로가 연우혁부터 죽이려고 집착하면 할수록 한기한테는 좋은 일이었다.

한기는 수월하게 표 장로를 밀어붙였다. 긴 거리를 잡고 상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막은 뒤 치명적인 살초를 흩뿌리는 게 대겸이란 무기였지만, 지금처럼 서두르면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기도 전에 초식이 꺾여버렸다.

“오독귀, 오독귀! 어디 있느냐! 빨리 나와서 도와라!”

표 장로는 점점 수세로 몰리는 걸 느끼자 다급하게 외쳤다. 몇 없는 직속 부하들은 지금 다른 녹왕대원들을 상대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오독귀가 필요했다.

대답이 없자 한기는 연우혁에게 외쳤다.

“오독귀 놈을 잡으러 가게!”

“감사합니다. 녹호군 대협.”

연우혁은 고개를 숙였다. 보아하니 표 장로는 굳이 합공을 할 필요도 없어보였다. 무공의 경지도 한기보다 높지 않은데 심지어 평정심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아무리 원한이 있는 관계라 하더라도 그렇지 저렇게 평정심을 잃고 덤비다니.’

“죽어라!”

표 장로가 붉어진 눈으로 연우혁을 죽이려고 보법을 펼치자, 연우혁은 바로 쌍사보법과 사심불구경공으로 거리를 벌린 뒤 오독귀를 찾으러 출발했다.

“거기 서라! 거기 서란 말이... 커헉!”

“포두는 그만 쫓고 나를 상대하시지 그러시오.”

“포... 포두라니. 농지거리는 여전히 못하는군...!”

한기는 표 장로에게 사실을 설명해주려다가 말았다. 차라리 모르고 죽는 게 더 자비로울지도 몰랐다.

***

‘산채가 박살이 났구나!’

오독귀(五毒鬼)는 전대의 마두들 중에서도 무공이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조정의 고관을 죽이고도 살아남은 전대의 마두가 고작 일류 말입이라니. 보통 무공이 높지 못한 마두는 비명횡사하기 마련인 무림에서 특이한 일이었다.

대신 오독귀는 교묘하고 끈질긴 하독술을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 위험에 대한 감각이 날카로웠다. 밖에서 함성이 들리고 안에서 싸움이 벌어지자마자 오독귀는 결과도 보지 않은 상황에서 도주를 결심했다.

‘제기랄! 철랑도 놈을 기껏 죽였는데.’

석탄 가루를 개어서 진흙에 섞은 걸 얼굴과 손끝에 바른 뒤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은 오독귀는 산채의 일개 녹림도로 변장했다.

소란이 벌어졌을 때 가장 도망치기 좋은 위장이었다. 일개 산적 놈 하나 도망치는 걸 적들도 죽어라 쫓지는 않을 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놈을 괜히 죽였나?’

철랑도는 오독귀와 처음 만났을 때 하찮게 여기며 모욕을 주었었다. 오독귀의 뇌물을 받은 표 장로가 막아줘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녹림에서도 쫓겨날 뻔했다.

그 원한도 풀고 산채의 권력도 가져올 겸 끈질기게 하독술을 펼쳤고, 또 운 좋게 표 장로가 궁지에 몰려서 같이 철랑도를 습격할 수 있었는데...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오독귀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운이 없어도 참 더럽게 없었다.

“같이, 같이 가자!”

“!”

뒤에서 누가 부르자 오독귀는 고개를 돌렸다. 산채 목책에 몰래 만든 통로였는데 용케 그걸 알았는지 거기로 기어 나오는 놈이 있었다.

“...따라오지 마라!”

오독귀는 바로 죽이려다가 참았다. 지금 녹림의 정예들이 주변에 득시글거릴 텐데 주의를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괜히 수상해 보인다고 쫓아오면 일이 귀찮아졌다.

“나한테 은자가 있다.”

“헛소리하지 마라.”

오독귀는 비웃었지만 놀랍게도 산적은 전낭의 입구를 비틀어서 열어보였다. 번쩍이는 은조각들이 들어있었다.

“네놈이 어떻게?”

“틈틈이 챙겼지. 여기 길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창고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라고 몰랐겠나.”

오독귀의 눈빛에 탐욕이 맴돌았다. 저 놈을 조용한 곳까지 끌고 가서 은자를 뺏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같이 가지. 어디로 갈지 생각은 했나?”

“사실 저기 토벌대 쪽에 아는 놈이 있다. 포위가 없는 곳이 있다더군.”

“그게 어디지?”

“저쪽. 저쪽 개울가 보이나? 저쪽은 길이 험해서 보초가 없다는군.”

“안 보이는데.”

“나 원 참. 저기 저 개울가가 왜 안 보이나? 이쪽으로 올라와라!”

성질을 내는 산적 놈의 모습에 오독귀는 빨리 죽여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무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 순간 비도의 시푸른 칼날이 오독귀를 파고들었다.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쾌속한 암기술이었다. 오독귀는 고통과 함께 몸이 쿵 쓰러지는 것을 느꼈다.

“...!”

오독귀는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자기 아들뻘 놈의 수작에 당하다니.

‘이 놈...!’

상대는 점혈로 죽지 않게 출혈을 막더니 옆의 바위에 앉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녹림의 정예들이 달려왔다.

“용케 여기까지 도망친 놈을 잡으셨소, 진충비도!”

“한경의 포두들은 다 이런 겁니까?”

‘뭐?’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오독귀는 자기가 누구한테 잡혔는지 믿지 못하고 귀를 의심했다.

동창도, 금의위도 아니라 포두 놈이 자신을 잡았단 말인가??

***

“오독귀 놈은 멀쩡하겠지?”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연우혁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오독귀가 상처가 덧나서 죽는 것이었다. 기껏 생포하려고 고생했는데 가는 길에 죽으면 그것만큼 허탈한 일도 없었다.

연우혁이 절정의 고수였다면 가볍게 혈도만 짚었겠지만 연우혁은 상대를 봐주면서 제압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방심시킨 다음 일격에 쓰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함거(轞車)에 악검삼마와 오독귀를 넣고 출발할 준비를 하는 포쾌들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사지에 걸어 들어와서 이렇게 마두 놈들을 데리고 멀쩡히 나가게 될 줄이야!

오독귀는 죽여 버리겠다는 듯이 살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하필 지나가던 게 적 포쾌였다.

살수한테 이런 협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적 포쾌는 들고 있는 나뭇가지를 휘둘러 오독귀의 얼굴을 갈겼다.

“한 번만 더 눈을 그렇게 뜨면 애꾸로 만들어주마.”

“...!”

오독귀는 믿기지 않았다. 저 포두 놈한테 잡힌 것도 놀라웠는데, 이 포쾌 놈은 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이렇게 겁이 없단 말인가.

“연 포두님! 연 포두님!”

“?”

포쾌들과 함께 함거를 끌고 출발하려던 연우혁은 저 멀리서 피어오르는 흙먼지에 멈칫했다.

하인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말을 타고 달려올 정도의 하인이면 한경에서 꽤나 권세 있는, 고관이나 재산이 있는 사람의 하인이었다.

‘한경에 무슨 일이 생겼나?’

“연 포두님 계십니까!”

“여기 있다. 무슨 일로 온 것이냐?”

“경축드립니다!! 빨리 한경으로 돌아오십시오!”

“...어째서?”

“칙서가 내려왔습니다! 연 포두님께서는 이제 한경의 판관이십니다!!”

연우혁과 포쾌들은 동시에 함거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 그럼 굳이 저 놈들을 안 잡았어도...”

“쉿. 닥치지 못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