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9)
연우혁을 비롯한 포쾌들이 기뻐하며 만세만세만만세를 외치는 대신 그냥 멈춰서 서로 시선만 교환하자 하인은 당황했다.
“포두님, 아니, 판관 어르신! 기쁘지 않으십니까? 헉! 설마 알고 계셨던 겁니까!?”
금 통판이 보낸 하인은 설마 싶었다.
이 포두, 아니 판관은 천 리 너머의 도둑을 꿰뚫어보는 것도 모자라서 길흉화복까지 점칠 수 있다고 한경에 소문이 자자했다.
본인은 그런 점은 치지 못한다 하지만, 원래 뛰어난 술객(術客, 점술가)은 겸손한 법이었다.
예전에 관로라는 유명한 점술가도 그러지 않았던가.
사람이 언제 죽을지 맞히고, 꿈을 해몽해서 앞일을 읽어냈으며, 심지어 먼 마을에서 누가 누굴 죽였는지까지 알아맞힌 점술가!
그런 관로도 결국 신선들에게 자꾸 천기를 누설하면 천벌을 받게 될 거라고 경고를 받았다.
하인이 보기에 연우혁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본인이야 그저 깊게 생각한 후 이치에 맞게 판단했다지만 그게 어떻게 사람의 재주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천기 때문에 겸손한 걸지도 몰랐다.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이 판관이 될 거라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을지도...
“정말 몰랐다.”
‘역시 알고 계셨던 거군!’
떨떠름해하며 대답하는 연우혁의 모습에 하인은 속으로 확신했다.
몰랐다면 절대 저런 반응이 나올 수 없었다. 하인이 연우혁이었다면 쓰러져서 엉엉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한경 같은 대도시의 판관이라면 최소한 과거에서 장원(壯元, 1등), 방안(榜眼, 2등), 탐화(探花, 3등) 정도는 해줘야 앉을 수 있는 자리 아닌가.
아무리 커다란 공을 세웠고 한경의 다른 고관들이 인정을 해줬다지만 포두가 판관 자리에 앉는 건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다시 한 번 경축드립니다!”
“고맙다...”
“자. 어서 돌아가시지요! 통판 어른께서 서둘러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하인은 뿌듯하게 말했다.
금 통판은 연우혁이 그 사이 산적이나 마두 놈한테 죽었을까봐 하인에게 빨리 달려가라고 크게 닦달했다.
기껏 판관 자리를 제수받아놓고 사지에 들어가 죽었다면 그것만큼 억울하고 분한 일도 없을 터였다.
그 사실을 아는 하인은 미친듯이 말을 몰아서 내달렸다. 도중에 말을 두 마리나 갈았을 정도로 격렬한 여정이었다. 저택에서 가장 말을 잘 다루는 자신이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뻗었을 것이다.
“그런 마두 놈들은 쉽게 잡기 힘듭니다. 판관 어르신. 지금 판관 어르신께서 하셔야 할 일은 마두를 잡는 게 아니라 빨리 돌아가셔서 칙서를 받으시는 겁니다! 자!”
“마두 놈들은 이미 잡았다.”
포쾌들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하인에게 말했다.
“예?”
“여기 안에 있잖나.”
“......”
함거 안에 갇힌 마두들은 포두와 포쾌한테 잡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눈만 끔벅거리고 있었다. 하인은 쓰러질 뻔했다.
“이, 이, 이, 이 놈들이...”
“악검삼마와 오독귀다.”
“어, 어, 어, 어떻게...”
“산채에 들어가서 잡아오셨지...”
“...!!!!!”
쿵!
하인은 그대로 쓰러졌다. 포쾌들은 깜짝 놀라 달려갔다.
“아니 적 형은 왜 사람을 쓰러뜨립니까!”
“내가 쓰러질 줄 알았나! 이 놈이 급하게 뛰어와서 그런 거지!”
소란이 일어나자 녹림의 녹왕대원 한 사람이 다가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별 거 아닙니다. 여기 포두님께서 판관이 되셨다는군.”
적조의 말에 녹왕대원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군졸이 시간 지난다고 장수가 되지 않듯이, 포두도 시간 지난다고 판관이 되진 않았다.
‘...포두가 원래 시간이 지나면 판관이 되나?!’
***
연우혁과 포쾌, 그리고 하인은 천천히 돌아갈 준비를 했다.
하인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는지 함거 안에 갇힌 마두들을 쳐다보았다.
“대체 이 놈들을 어떻게...”
“별로 어렵지 않다. 겁먹지 마라.”
적조는 탱자나무를 꺾어 만든 회초리로 마두들을 후려갈겼다. 마두들은 원독 가득한 눈빛으로 적조를 노려보았지만 적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 대단하다!’
적조의 담력에 하인은 자기 간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일개 포쾌가 저렇게 마두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무림의 고수가 포쾌 일을 하는 것도 아닐 텐데...
“진충비도. 부채주께서 부르시오.”
“?”
연우혁은 갑자기 녹왕대원들이 찾아오자 의아해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오. 음. 당신에게는 기연이라고 할 수 있소. 절대 나쁜 일은 아닐 거요.”
“...?”
녹왕대원들은 경건하기까지 한 태도로 말했다. 딱히 살의나 흉한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연우혁은 일단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영약이라도 발견했나?’
최근 포두로서의 일을 하느라 무공 수련에 그렇게 전력으로 집중하진 못했다.
일류의 경지를 넘었지만 그건 시작일 뿐. 연우혁은 자신이 이제야 후기지수들 수준이 되었다는 걸 잘 알았다.
‘영약이 필요하긴 하다.’
연우혁이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의 제자도 아니었고, 거기에 버금가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믿을 구석은 오로지 영안과 상단전에 쌓아놓은 기운밖에 없었다.
‘그나마 후자는 언제든지 날 죽일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고...’
이번에 마두를 바치지도 않았는데 판관이 된 건 정말 예상 밖의 행운이었다. 연우혁 본인도 이럴 수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아마 금의위의 보고나 한경에서 올린 장계가 생각보다 훨씬 더 파급력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일개 포두가 그렇게 공을 세우면 기특하긴 하겠지.’
언급이 아예 안 되면 모를까, 언급이 되면 기특하단 소리가 나올 법도 했다.
조정의 관리들도 포두가 쥐꼬리만한 녹봉으로 백성들의 전낭을 털고 다니는 놈들이란 걸 알 텐데 저렇게 평이 좋으면 기특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것만으로 판관 자리를 주진 않겠지만...
‘금의위. 그게 가장 클 거 같다.’
연우혁은 하 교위에게 마음속으로 감사인사를 했다. 언제 한 번 돈을 모아서 은으로 된 거북이라도 하나 선물해야겠다 싶었다.
덕분에 재산을 꽤 아낄 수 있었다.
원래 마두를 바치면서 크게 뇌물을 보낼 각오도 했었던 것이다. 이걸 다 영약으로 돌리고, 녹림에게 또 영약을 받으면...
“!”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연우혁은 숨이 막히는 압박감을 느꼈다. 어떤 살기나 위협도 없었지만, 영안으로 보는 순간 바로 두통과 함께 몸이 떨려왔다.
“신통력이 있군.”
녹림 총채주, 녹림대왕 임가적은 연우혁을 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읽어낼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다.”
‘차원이 다르다!’
이제까지 연우혁이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고수들을 못 본 게 아니었다. 이들은 분명 강맹하고 사나웠지만 연우혁이 아예 상대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본 임가적은 거대한 산을 연상시켰다. 영안으로 읽으려고 해도 그저 막막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직 초절정의 경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란 말인가!?’
연우혁의 생각을 읽었는지 임가적은 이어서 설명했다.
“나는 아직 초절정의 벽을 깨지 못했다. 벽 앞에 서있을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절정의 고수들과는 격이 다르지. 포두 네가 신통력으로 읽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의념(意念)의 차이지.”
“가르침을 주십시오.”
홀린 듯 연우혁이 말했다.
원래 녹림과 아무 관계가 없는 연우혁이 녹림의 총채주한테 가르침을 달라고 하는 건 뻔뻔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지만, 상대의 압도적인 무위를 보니 그런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다행히 임가적은 별다른 말 없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절정의 경지에 오를 때 일류의 무인은 자신이 배웠던 무공을 새로이 만들어낸다. 무학(武學)은 원래 모두에게 같을 수가 없기에 스승에게 배운 절세의 무공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맞춰가는 과정이 필요하지. 그렇게 새로 무공을 만들어낸 절정의 무인은 자신이 산봉우리에 올랐다고 생각하게 된다. 중단전이 열리고 배운 초식을 대성했으니 이제 무공의 모든 걸 알았다고 말이다. 내공만 쌓으면 적수가 없지 않겠는가.”
“아닙니까?”
“틀렸다. 그건 시작일 뿐. 상단전이 열리고 의념에 대해 알게 되면 그런 오만함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될 거다. 내가 여기서 주먹을 뻗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피하겠습니다.”
“절정의 고수가 뻗은 주먹이라면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익힌 무공을 완전히 이해했고 뒤로 물러나는 보법과 경신법이 좋다. 일반적인 일류 고수보다 보는 눈이 몇 수는 위인 만큼 이기진 못하더라도 피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내 주먹은 피할 수 없다. 내가 적중시키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임가적은 천천히 주먹을 뻗었다.
그 순간 연우혁은 임가적의 주먹이 자신을 향해 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뱀 앞의 개구리처럼 피할 수가 없었다.
마치 세상이, 임가적의 주먹을 자신에게 적중시키겠다고 못박은 것처럼 느껴졌다.
희미하게 임가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의념의 차이다. 초절정의 고수가 결심하면 그만큼 의념이 강하지 못한 사람은 거기에 저항하지 못한...”
순간 연우혁은 옆으로 비켜났다. 그리고 코와 입에서 피를 쏟아냈다.
“커헉!”
“!”
임가적은 처음으로 놀랐다.
고작 일류의 무인이 임가적의 의념에 저항한 것이다!
“총채주 님.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기는 피를 쏟으며 쓰러진 연우혁과 임가적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오해다.”
“오해는 지랄...! 미친 거요?!”
안 그래도 쌓인 게 많았던 한기는 존대도 내려놓고 분노를 폭발시켰다.
총채주란 작자가 하는 것도 없이 앉아만 있다가 상황이 해결되자 쭐레쭐레 찾아온 것도 죽이고 싶었는데, 진충비도를 만나게 해달라서 만나게 해줬더니 반쯤 죽여놓으니 어이가 없다 못해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녹림이 자기 치부를 숨기려고 은인을 살인멸구했다고 알 것 아닌가!
“도와주지 못하면 가만히 있을 것이지. 네놈이 대체 녹림에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 거냐!”
“오해다. 진정해라.”
임가적은 손을 뻗어 한기를 제지하더니 다른 손으로 연우혁의 전신을 두드렸다.
“초절정의 고수들이 사용하는 의념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진충비도의 상단전이 생각보다 훨씬 더 발달해있더군. 의념을 억지로 저항하느라 다친 거다.”
쓰러진 연우혁에게 임가적은 환약을 하나 먹였다. 느껴지는 기운이 꽤나 범상치 않았기에 한기는 무심코 물었다.
“그건 무슨 약이오?”
“취구환(翠救丸).”
“...미, 미친 새끼야! 그걸 왜 네가 함부로 쓰는 거냐!!”
녹림은 그 역사가 짧고 난잡한데다가 흩어졌다 모이는 이들이라 다른 명문정파처럼 비약을 만들어 낼 능력이 부족했다. 기껏해야 금창약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만큼 개방에서 으뜸가는 영약으로 꼽히는 취구환 같은 보물들은 개인의 물건이 아닌 녹림의 물건이었다. 저렇게 임가적이 멋대로 써도 될 게 아니었다.
“나는 아직 총채주고 이걸 쓸 권한이 있다.”
“......”
한기는 다시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절정고수가 되어서 또다시 심마로 주화입마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 줄이야.
다행히 연우혁의 호흡이 돌아왔다. 임가적은 이제 한기가 화낼 이유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곧 일어날 거다.”
“일어나겠지, 당연히! 취구환을 처먹었는데!!”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군. 진충비도를 죽이는 게 네 뜻이었나?”
“커헉.”
연우혁이 고인 피를 토해내며 정신을 차리자 한기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진충비도가 깨어나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총채주한테 다시 덤벼들었을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의념에 저항하느라 크게 내상을 입었다. 취구환으로 치유했으니 걱정할 건 없다.”
“과, 과연. 그렇군요... 뭘로 치유했다고요?”
연우혁은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그러나 임가적은 자기 할 말만 했다.
“상단전이 그렇게 발달한 건 운이 좋다. 초절정의 벽 앞에 선다면 훨씬 더 수월하게 돌파할 수 있을 거다.”
‘그 전이 문제 아닌가...?’
거기까지 가기 전에 귀신 들려서 뒤질 수도 있는데 뭔 개소린가 싶었다. 연우혁은 피를 옆으로 퉤 뱉었다.
“음. 가르침 감사합니다. 대협.”
“녹림의 일을 도운 빚을 갚았다.”
“이미 녹호군께서 값을 치루셨습니다만.”
“빚은 마음 안에 있지 종이와 먹물 위에 있지 않다. 오욕칠정에 얽매이면 의념을 유형화시켜서 벽을 넘을 수 없지. 잘하고 있으니 계속해서 세속의 욕망을 떨쳐내도록.”
“...예?”
연우혁은 무슨 소린가 싶었다.
‘내가 오욕칠정을 떨쳐내고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