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 연우혁 (1)
당장 지금 하고 있는 생각만 해도 오욕 중 재욕에 칠정으로는 근심(憂)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러나 한기는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저 포두한테는 흔히 볼 수 있는 벼슬아치들과는 다른 초연함과 신비함이 있었다.
“도술을 익혀서 그런지 탐욕과 거리가 멀긴 하지요.”
“그러한 자세가 초절정의 벽을 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다.”
‘으음.’
연우혁은 임가적의 말에 떨떠름해했다.
임가적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지금 본 것만으로도 임가적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누가 자신의 평생을 바친 곳에 대해 저렇게 냉정하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당장 연우혁만 해도 저렇게 할 자신이 없었다.
‘거의 사람 자체를 바꾸는 수준 아닌가?’
“녹림의 일을 도운 빚은 갚으시는 분이 녹림의 일은 왜 신경 쓰지 않는 겁니까?”
한기는 아직도 불만이 쌓여 있었는지 쏘아붙였다.
“한기. 난 녹림에 빚진 게 없다. 십 년 넘게 녹림의 성세를 이끌고 휘하 산채를 칠십이채로 만들었다. 내가 왜 신경을 써줘야 하나?”
“......”
대답에 부채주의 말문이 막혔다.
논리는 타당했다. 임가적만한 총채주는 녹림의 역사에도 드물었으니까.
하지만...
저건 녹림도가 아니라 장사치의 논리 아닌가?
말문이 막힌 한기 대신 연우혁이 물었다. 아직 방금 나눴던 문답이 이해가지 않았던 것이다.
“오욕칠정을 버리지 않으면 초절정의 벽을 넘을 수 없는 겁니까?”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한낱 범부(凡夫)가 어떻게 신선에 가깝게 될 수 있겠는가.”
“저로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사람이 갖고 있던 감정을 전부 버렸는데도 여전히 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연우혁의 말에 한기는 잘하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고 있네. 더 설득해보게.’
물론 한기를 위해서 녹림대왕을 설득하고 있던 게 아니었던 만큼 연우혁은 당황했다. 무공에 대한 질문이었지 녹림에 남아달란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그게 네 길이다.”
“!”
임가적은 까마득하게 먼 무림의 후배가 자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내지 않았다.
“나는 이게 맞는 길이라고 생각할 뿐. 이 길로 오지 않는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해주겠는가.”
“으음!”
“논파되면 어떡하나? 힘 좀 써보게.”
“아니...”
연우혁은 멀고 먼 초절정의 경지에 대해 고민하려는데 옆에서 말을 걸어오는 한기가 성가셨다.
하지만 한기도 총채주 때문에 상당히 필사적이었다.
“녹림의 보물인 취구환을 먹었지 않나. 자네의 재주를 부려서 설득 좀 해보게.”
“취구환?! 개방의 보물 아닙니까?”
“그 정도는 되어야 녹림의 보물이지. 부탁하네.”
‘어쩐지 내공이 늘었다 싶었다.’
갑자기 일류 중입에 가까울 만큼 내공이 늘었기에 녹림대왕이 뭘 했나 싶었는데, 개방의 보물인 영약을 먹인 모양이었다. 취구환이라면 이렇게 내공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것도 당연했다.
받은 게 있는 만큼 연우혁은 뭐라도 해주고 싶긴 했지만 영 막막했다.
초절정의 벽을 앞에 두고 자기 길을 확실하게 정한 사람에게 무슨 말이 통하겠는가. 문파며 가족이며 이미 다 버리지 않았던가.
그 때 연우혁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협.”
“말해라.”
“대협께서 정말 말씀하신 대로 다 버리셨다면 왜 이렇게 나오신 겁니까?”
“한기가 성가시게 굴 테니까.”
“녹호군을 죽이셔도 됐을 텐데요.”
“......”
한기는 배은망덕한 진충비도의 대답에 경악했다. 그러나 임가적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럼 다른 자들이 왔겠지.”
“그 자들도 죽이셨으면 됐을 겁니다.”
“......”
임가적이 말없이 연우혁을 쳐다보자,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무림에서 무공을 출수하는 것보다 남들을 설득하는 걸 더 많이 한 만큼 자신이 있긴 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영 긴장이 됐다.
“제 생각에 대협께서 이렇게 나오신 건 일말의 감정이 남으셨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남았다?”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평생을 바친 문파의 일에 무감정할 수 있겠습니까? 대협께서는 지나치게 급히 인연을 끊으신 것 같습니다. 그 미련이 지금 이렇게 나오는 거지요.”
임가적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연우혁은 실수했나 싶었다.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닌 고수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
그러나 임가적은 분노해서 출수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십 년 동안 녹림의 일을 더 보도록 하지. 그 사이 미련을 끊을 수 있도록 준비해보겠다.”
“훌륭하신 생각이십니다.”
“진충비도의 명성이 왜 대단한지 알겠군.”
임가적이 말을 마치고 천막 밖으로 나가자 한기가 고함을 지르며 연우혁의 등을 두드렸다.
“잘했네, 잘했어! 정말 고맙네!!!”
“별 거 아닙니다. 제가 말하지 않았어도 총채주 님께서는 곧 깨달으셨을 겁니다.”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네.”
녹호군은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눈시울을 붉히며 고마워했다.
이 정도까지 잘 설득해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자네가 화살 하나로 곽탁을 죽였을 때 정말 사술을 쓰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방금 보여준 건 그 이상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셨군...’
“녹림은 절대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걸세.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게. 녹림의 이름이 자네 뒤에 있을 걸세.”
“대협. 감사합...”
대답하려던 연우혁은 멈칫했다.
그런데 판관이 저런 이름을 달고 다녀도 되나?
***
어사화를 꽂고 삼일유가(三日遊街)를 받진 않았지만, 한경에 돌아온 연우혁은 그에 버금가는 축하를 받았다.
위로는 지부 어르신부터 아래로는 한경의 백성들까지.
어느 누구 하나 축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궁 판관은 축하하면서도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정말 아쉽게 됐군. 너만한 포두가 또 어디 있겠느냐? 앞으로 백 년 동안 한경에서 너만한 포두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판관 어르신...!”
“이제 어르신이라고 부르지 마라. 너처럼 은자를 긁어내는 포두가 사라졌으니 이제 어디서 은자를 받을까.”
궁 판관은 창밖을 쳐다보며 근심 어린 목소리로 시름에 잠겼다. 연우혁은 방금 받은 감동이 바로 싹 식는 걸 느꼈다.
사건 해결을 잘 해서가 아니라 은자를 잘 바쳐서 좋아했던 거였다니!
“이제 판관이 되었으니 네가 몇 가지 알아야 할 일들이 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연우혁은 관복을 입었지만 매우 공손했다.
과거에 급제해서 각종 학식을 쌓고 판관 자리를 제수받은 판관과 달리 연우혁은 아래에서 올라오지 않았던가. 일에 대해 경험한 게 많다 하더라도 놓치는 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경의 동쪽을 맡고 있는 궁 판관이 도와주지 않고 심술을 부린다면 실수가 많아지고 공격받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벼락출세한 만큼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했다.
‘판관의 일이란 게 사실 포두보다 더 어렵다.’
포두는 그냥 저택에 누워 포쾌들 부리며 잔돈푼을 뜯어내도 됐지만 판관이 그런 짓거리를 했다가는 대번에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 권한이 큰 만큼 책임도 커지는 것이다.
아침 일찍 나와야 하고(한경의 길거리를 보면 하급 관리들이 허겁지겁 노점(露店)이나 객점(客店)의 떡이나 만두를 들고 달려가는 걸 볼 수 있었다), 관청의 형관(刑館)에 도착하면 단정하게 정리한 관복에 먼지 한 점 묻히지 않고 자리에 앉아야 했으며, 그 뒤로는 쉬지 않고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사건의 대소사를 확인해야 했다.
판관이 그냥 대뜸 판결해버리고 끝내버리면 차라리 편했을 테지만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정 이상 처벌을 내린 사건은 위에 보고를 올려야 하는데, 이 보고가 틀리면 바로 문책이 날아왔다. 이런 문책을 몇 번 받으면 중앙 조정으로 승진하는 건 기대하기 힘들어질 뿐더러 심한 경우 파직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한경이 속한 커다란 지역을 다스리는 관찰사나 지휘사, 황제의 명령을 받고 나온 순안어사 등 한경 밖의 고관들은 일손이 필요하면 하찮은 포두를 부르지 않았다. 어느 정도 급이 되는 판관을 불러서 협조를 시켰다.
정말로 재수 없을 경우에는 내각이나 육부, 도찰원에서도 판관을 직접 불러서 증언을 시키거나 일에 관여시켰으니 이 일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벌써부터 걱정하진 말자.’
연우혁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벌써부터 안 좋은 가능성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위의 일들은 대부분 가능성 낮고 희박한 일들이었고, 판관이란 자리는 장점이 훨씬 많았다.
게다가 연우혁은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이 자리에 앉지 않았던가. 지금은 뿌듯해해도 될 때였다.
“음. 그래.”
궁 판관은 연우혁의 공손한 자세가 흡족했는지 입을 열었다.
“먼저 첫 번째.”
“예.”
“이번에 판관이 되면서 받은 선물들이 있을 텐데.”
연우혁이 판관이 되자 한경에 있는지도 몰랐던 가문들과 상단들이 축하의 뜻으로 선물을 보내왔다. 한경의 정관이라면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는 물건들이었다.
덕분에 평소에 무공을 수련하던 저택의 마당에 선물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알겠군.’
연우혁은 씩 웃었다. 이제 궁 판관의 마음을 읽을 자신이 생긴 것이다.
“알겠습니다.”
“오. 말해 보거라.”
“저를 물심양면으로 돌봐주신 한경의 고관들에게 선물을...”
궁 판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 있어 하길래 기대했는데 아직 모자란 점이 많은 놈이었다.
“판관이 됐는데 왜 한경의 관료들한테 선물을 바치느냐? 선물을 바칠 거면 조정에 바쳐야지. 그리고 지금은 조정에 바로 뇌물을 바치지 마라. 너무 속이 보이니, 한 일 년 정도 지난 다음에 바치는 게 좋을 것이다.”
“그, 그렇군요.”
연우혁은 머쓱해졌다.
그럼 선물 이야기는 왜 꺼낸 거지?
탁!
궁 판관은 두꺼운 장부책을 던졌다.
“이걸 읽어보고, 네놈에게 선물을 바치지 않은 놈들의 이름을 적어 놔라.”
“어... 어디에 쓰는 겁니까?”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것이냐? 그 놈들이 원통함을 풀어달라고 찾아오면 절대 풀어주지 마라.”
“......”
연우혁은 그제야 선배 판관의 뜻을 이해하고 아찔해졌다.
선물 안 바친 놈을 하나하나 다 적어놓으라니!
‘정신 나간 집요함이다!’
한경의 부자들도 설마 판관이란 작자가 돈 많은 놈들을 하나하나 다 기록해놨을지는 몰랐을 것이다. 심지어 장부책에는 재산 규모까지 대략적으로 적혀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연우혁은 대답만 하고 장부책을 꽂아놓으려고 했다. 이런 정신 나간 짓에 쓸 시간은 없었다. 차라리 자기 관무실에 가서 무공을 수련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금 써라.”
“예?”
“지금 쓰라고. 네놈은 맺고 끊는 게 무르고 돈에 헤퍼서 잊을 수 있다. 지금 써라!”
궁 판관의 눈에서는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평생 한경의 판관으로서 보낸 사람만이 뿜을 수 있는 기세였다.
결국 연우혁은 첫 판관으로서의 업무를 오전 내내 뇌물 안 바친 놈 명단 작성으로 마쳐야했다.
***
“다... 다 했습니다.”
“이건 매일 품속에 넣고 다닌 뒤, 아침에 세 번, 저녁에 세 번 읽고 이름을 외우도록 해라. 절대 한 명도 빼서는 안 된다.”
“예...”
궁 판관은 그제야 흡족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관무실로 가버리려고 했다. 연우혁은 당황해서 궁 판관을 불렀다.
“일에 대해서는 안 알려주십니까?”
“아. 일. 흠... 일단 포두를 뽑아라. 눈치가 빠르고 부지런하며 한경에 발이 넓어야 한다. 무공이 뛰어나야 하고 삼족 중에 도적이나 무림인이 없어야 하며 시신을 보고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또...”
궁 판관은 좋은 포두의 조건을 설명해줬다.
연우혁 본인이 워낙 뛰어난 포두였기에 고르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포두는 필요한 법이었다.
판관은 앉아서 일을 해결하는 만큼 수족 노릇을 해줄 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한경 서쪽에도 포두들이 몇 있었지만 전 판관이 고용한 자들이라 능력이 부족하고 충성심도 의심스러웠다. 확인하고 갈아버린다 하더라도 그 전까지 포두 하나 정도는 자기 심복으로 박아놔야 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난 가보겠다.”
“...잠, 잠깐. 판관 어른. 이게 다입니까?”
“뭘 말이냐?”
“판관으로서 해야 하는 일 말입니다.”
“네가 아는 일을 말해봐라.”
연우혁은 대답했다.
아침 일찍 나와서 의복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백성들의 대소사를 들어주고 일을 처리하면 보고를 작성하고...
“전에 하던 놈보다 더 잘 아는구나. 그런데 왜 물어보느냐?”
“보고를 작성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나...”
“그건 주부(主簿) 놈 시켜라. 그 놈이 할 일이다.”
“위에서 판관에게 의견을 묻는 문서가 날아오면...”
“그건 전사(典史) 놈 시켜라. 그 놈이 할 일이다.”
“......”
연우혁은 예상했던 것보다 판관 노릇이 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