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 연우혁 (2)
‘...아니다. 정신줄 놓지 말자.’
궁 판관이 간 뒤 연우혁은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보니 궁 판관이야 과거에서 방안(榜眼, 2등)을 차지한 수재였고 한경의 명문가 출신이니 미친놈처럼 탐학질을 해도 뒤탈이 없는 거였지, 연우혁 같은 사람이 저걸 따라해서는 안 됐다.
뱁새가 황새를 억지로 따라했다가는 뒷일이 좋지 못한 것이다.
주부나 전사를 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연우혁은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영안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일일이 읽는 대신 한 번에 내용 흡수가 가능했다.
“연 판관 있나?”
“아버지, 절 받으십시오!”
“우하하하! 그래, 그래!”
놀러 온 금 통판은 연우혁이 넙죽 엎드리자 좋아 죽으려고 했다.
사실, 여기 오면서 금 통판은 조금 걱정했었다.
실권으로만 따지면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된 셈 아닌가.
원래 감탄고토(甘呑苦吐)하는 놈들이 한둘도 아닌 만큼 타당한 걱정이었다.
그러나 연우혁은 한 치의 달라짐도 없이 넙죽 엎드렸다.
이 기특한 젊은이는 판관이 되고 나서도 조금도 오만해지지 않은 것이다!
금 통판은 이 일화를 충신효자도(忠臣孝子圖)에 새로 실어서 한경의 젊은이들한테 뿌리고 싶을 정도였다.
“일어나게, 일어나! 판관이 되고 나서 이 무슨 짓이란 말인가!”
“금 아버지께서 저를 돌봐주지 않으셨다면 제가 어떻게 이 과분한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습니까?”
“으하하, 으핫! 사람 참. 일어나게! 어서!”
금 통판은 엎드린 연우혁을 잡아당겼다. 내공 하나 없는 힘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일류 고수인 연우혁이 슬슬 끌려나왔다.
“궁가 놈이 뭐라고 하지는 않던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저것 알려주셨습니다.”
“흠! 궁가 놈이 자네를 좋게 본 것 같긴 하네. 원래 은자 아니면 관심을 안 가지는 놈이거든.”
금 통판은 칙사가 왔을 때 궁 판관이 연우혁의 편을 같이 들어줬다고 설명했다. 원래 궁 판관의 성격을 봤을 때 믿기 힘든 일이었다.
“아마 자네의 재주 때문이겠지!”
‘은자 때문일 겁니다.’
연우혁은 아직도 궁 판관이 모용세가한테 얼마를 받은 건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액수는 몰라도 궁 판관이 저렇게 챙겨주는 걸 보니 적지는 않을 것이다.
“물어볼 건 없나? 원래 한경을 돌아다니다가 앉아서 붓을 놀리면 좀이 쑤실 것 같은데. 게다가 자네는 무공을 익혔다면서?”
“신경써주신 덕분에 견딜 만 합니다. 혹시 아버지께서 해주실 조언이 있으십니까?”
질문을 하면서 연우혁은 살짝 기대했다.
금 통판은 궁 판관보다는 훨씬 더 제정신인 사람이었다. 새로 자리에 앉은 관리로서 신경 써야 할 일들을 제대로 가르쳐 줄 가능성이 높았다.
“흠... 새 포두를 뽑게.”
“예.”
“그리고 자네에게 선물을 바치지 않은 놈들을 적어두게. 절대 용서해선 안 되지.”
“...보고를 작성할 때 주의할 점은 없습니까?”
“그건 주부나 전사를 시키면 되네. 으핫핫!”
“......”
***
도움이 안 되는 관리들이 많긴 했지만 연우혁은 그럭저럭 적응해나갔다.
사서 일을 맡은 덕분에(덕분에 관청의 주부나 전사들이 찾아와서 왜 일을 안 시키시냐고 걱정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저택의 선물들을 확인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요령이 붙자 빠르게 해나갈 수 있었다.
보름이 지나자 연우혁은 일을 점심 전에 끝내고 내공을 소주천시킬 여유까지 확보했다.
“판관 어르신. 약재 시장에서 싸움이 났습니다. 정 노인은 분명 멀쩡한 당삼(黨參)을 팔았다고 하는데, 의원은 그게 속이 썩어 있는 놈이라 탕약이 전부 망가졌다고...”
“당삼이 아니라 양유(羊乳, 더덕)일 거다. 둘은 비슷하게 생겨서 착각하기 쉽지. 정 노인이 파는 다른 당삼을 챙겨서 한경의 의원들에게 물어보도록.”
하는 일 또한 포두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포두였을 때도 이제 다른 구역의 포두들이 난처한 문제다 싶으면 연우혁을 찾아와서 지혜를 구했는데, 판관이 되자 공손하게 찾아와서 묻는 정도였다.
연우혁이 사라졌는데 포두들이 어디에 묻겠는가?
처음에는 곤장이라도 맞을까 벌벌 떨면서 찾아왔던 포두들도 연우혁이 친절히 대답해주자 안심하고서 물었다.
“으음!”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적 포쾌는 연우혁이 하도 진지하게 고민하자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어떤 어려운 난제도 눈 한 번 깜박하고서 해결하는 사람이 저렇게 고민하다니.
“뇌물을 언제부터 얼마나 받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
적조는 괜히 물어봤다고 생각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다. 너무 빨리, 노골적으로 받으면 탐관오리라고 소문이 날 것이고 아예 받지 않으면 돈을 모을 수가 없지.”
“잘 하실 겁니다.”
“적 포쾌는 고견 없나?”
적조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살막의 대주한테 뇌물 받는 요령을 묻는 걸 보니 저 포두, 아니 판관도 보통 미친 놈이 아니었다.
“판관 어르신 계십니까?”
“들어와라.”
연우혁의 말이 떨어지자 관졸이 달려왔다.
“정 거사께서 판관 어르신을 뵙고 싶어하십니다.”
“정 거사라면...?”
연우혁은 물론이고 적조의 표정까지 같이 변했다.
한경의 명문가인 청군 정씨의 가주이자, 적조가 신경 쓰고 있는 장로 손녀의 할아버지 아닌가.
그 사이 관졸 한 명이 더 찾아왔다. 궁 판관 쪽 형관에서 온 관졸이라 연우혁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판관 어른께서 무슨 일로 사람을 보냈느냐?”
관졸은 급히 뛰어왔는지 헉헉대며 서신을 건넸다. 연우혁은 서신을 열고 내용을 확인했다.
청군 정씨는 제대로 된 선물을 보내주지 않았으니 청탁을 무시하란 궁 판관의 조언이 적혀 있었다.
“...오늘 퇴청하고 나서 직접 찾아뵙겠다고 전해드려라.”
안으로 불렀다가는 궁 판관이 무슨 짓을 할 지 몰랐기에 연우혁은 밖에서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히 내가 거절할 위치는 아니다.’
정 거사면 지부 어른하고도 안면이 있고 한경의 여러 관리들과 관계가 있는데 뇌물 좀 안 줬다고 안면몰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상대도 내가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괜히 원수 만들 필요 없지.’
***
“오지 않을 줄 알았네.”
“?!”
꼿꼿한 태도로 앉아 있던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쩍 말라서 바람에도 흔들릴 것 같았지만 눈빛에는 정광이 가득했다.
정 거사는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완고해보였고, 또...
...가난해보였다.
‘명문가가 가난할 수도 있나?’
연우혁은 살짝 당황했다. 상대가 깨끗한 의복을 갖춰 입고 있었지만 연우혁의 영안 앞에서 가난함을 완전히 숨기기는 힘들었다. 당장 관과 도포도 낡은 게 느껴졌다.
“한경의 판관이 어떻게 백성의 부탁을 거절한단 말입니까?”
“선물을 바치지 않았으니까. 궁 판관은 부임할 때 선물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형관에 출입을 막았지.”
‘미친 놈 아니야 이거?’
연우혁은 질색했다.
이 사람은 뒷감당이 무섭지 않단 말인가?
그러나 연우혁의 질색과 별개로 정 거사는 출입을 막은 것에 대해 별도의 악감정은 없어보였다.
한경의 관리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권리였던 것이다.
정 거사는 지부 대인한테 이런 걸 말할 생각도 없었다. 일단 말하는 것 자체가 ‘나는 가난해서 새 판관한테 선물 하나 못 준다’라는 뜻이 됐고, 말한다 하더라도 지부는 판관의 편을 들어줄 게 분명했다. 이건 판관의 권리였으니까.
‘술법을 쓰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기분이군.’
설명을 들은 연우혁은 아찔해지는 정신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궁 판관께서도 나쁜 뜻은 없으셨을 겁니다.”
“그랬겠지. 여하튼 진충비도의 소문이 틀리지는 않았나보군.”
정 노인은 여전히 연우혁이 온 게 신기했는지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포두 출신 판관이면 더 악독해도 모자랄 판에 쫄래쫄래 찾아온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기왕 멍청해진 김에 연우혁은 청백리처럼 굴기로 결심하고 말했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부르셨습니까? 억울한 일이 있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억울한 일은 아닐세. 걱정되는 일이지. 제갈세가에 대해 아나?”
“...예.”
연우혁은 살짝 찔려서 늦게 대답했다.
제갈규를 정여혜와 만나게 해준 게 연우혁 본인이었으니까.
그 뒤로 들어보니 제갈규가 지나치게 사랑에 빠진 것 같아서 조금 죄책감이 들었지만, 연우혁은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아니었어도 제갈규는 누구든 미색 반반하면 사랑에 빠졌을 거다.’
“알고 보니 제갈세가의 청년이 손녀에게 푹 빠진 모양이더군.”
“이럴 수가!”
연우혁은 가식적으로 반응했다. 정 거사는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잘 나가지도 않는 규중처녀를 무림의 청년이 어떻게 만났나 싶었네.”
“정말 세상 일이란 알 수 없이 묘하군요.”
“음.”
정 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매파 이야기가 나오고 있...”
“커헉.”
연우혁은 사레가 들렸다. 노인은 하인을 불러서 새 차를 따라오게 했다. 비싼 찻잎을 쓰지 못하는지 차의 맛이 조금 약하고 가벼웠다.
“놀랐나?”
“조금 놀랐습니다. 제갈세가의 청년과 혼인이라니.”
“나도 놀랐네. 아직 결정된 건 아니지만, 둘 다 슬슬 혼사를 고민해야 할 나이이니.”
“혹시 제갈세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셔서 부르신 겁니까?”
정 거사는 연우혁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런 불평을 하려고 한경의 판관을 부르는 자가 어디 있겠나. 제갈세가는 마음에 드네. 명성이 높고 무림의 가문답지 않게 학문 또한 뛰어나지.”
말을 마친 정 거사는 목함을 하나 꺼냈다. 단단하게 잠겨서 열리지도 않는 특이한 목함이었다.
“이 함은 어렸을 적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물건일세.”
정 거사의 말에 따르면, 이 목함은 먼 옛날 정 거사의 아버지가 무림인을 구해주고 받은 물건이었다.
단단하게 잠겨 있는 만큼 정 거사의 아버지 또한 신기해하며 열어보려고 애썼지만 소득이 없었다. 정 거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잊어버린 뒤 가문의 창고 잡동사니 어딘가에 던져놨었는데...
“...얼마 전 이런 서신을 받았네.”
정 거사는 서신을 펼쳤다. 내용은 간결했다. 목함을 내놓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어떤 놈들입니까?”
“나도 모르네. 많고 많은 무림인 놈들 중 이걸 보낸 놈을 어떻게 찾겠나. 원래라면 제갈세가와 인연을 맺은 김에 물어봐야 하겠지만, 가문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돈 될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싶진 않더군.”
“너무 위험하시지 않겠습니까? 협박이 날아올 정도면...”
“저택은 걱정할 것 없네. 지부 어른에게 부탁해 병사들을 배치해놨으니. 문제가 생기면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도 추가로 온다더군.”
“?”
연우혁은 멈칫했다.
‘군병을 그렇게 멋대로 써도 되나...?’
당연히 안 됐다. 하지만 연우혁은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군선을 유람선으로 개조하는 사람한테 병사 이야기를 꺼내서 무엇하겠는가.
“지금 같은 상황에 조언을 해줄 수 있겠나?”
“일단 잠깐 보겠습니다.”
연우혁은 목함을 받고 영안을 열었다. 그런 뒤 천천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흠.”
“알겠나?”
“열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나.”
정 거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정 거사까지 저 목함을 열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었다. 각종 서책을 뒤지고 토수(土手)나 이공(泥工)을 불러서 이런 것에 대해 아냐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연히 아무 소용도 없었다.
열어보면 좋겠지만 안 열리니 이렇게 찾아온 것 아닌가.
“열어봐도 됩니까?”
“열 수 있다면 그러게.”
정 거사는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영리하고 재주가 많은 청년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덕분에 과신이 과한 면이 있었다.
노인은 눈을 감고 기다렸다. 적당히 두들기고 만져보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포기하리라.
“거사 어른.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감았던 눈을 다시 뜨며 정 거사는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젊은 판관은 옥시(玉匙, 옥으로 된 열쇠)를 손바닥 위에 둔 채 말을 이어나갔다.
“제 생각에는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동원해야 할...”
“그 열쇠는 뭔가?”
“목함 안에서 꺼냈습니다. 제 생각에는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목함 안에서 꺼냈다고?!!!”
정 거사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