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 연우혁 (3)
오늘 본 것 중 가장 놀라운 일이었다. 정 거사는 물론이고 정 거사의 아버지까지 열려고 시도한 목함 아닌가.
심지어 둘이서만 고민한 게 아니라 다른 직공들도 불러서 물어봤었는데...
대체 저걸 어떻게 열었단 말인가?
“어떻게 열었나?!”
“거사 어른.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자꾸 말을 끊자 연우혁도 짜증이 나서 탁자를 손으로 쳤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걸 자꾸 물어대니 짜증이 난 것이다.
목함을 어떻게 열었는지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중요한 건 안에 든 물건이었다.
그제야 젊은 판관 앞에서 자신이 실례했다는 걸 깨달은 정 거사가 헛기침을 했다.
“미안하네. 계속 말하게. 그런데 정말 어떻게 열...”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동원해야 하는 이유는, 이 열쇠가 흑염방(黑染幇)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그들이 확보한 백월비고의 열쇠지요.”
흑염방.
무림과 연관이 없는 정 거사도 이름을 알고 있을 만큼 규모가 큰 사파 문파였다. 흑도칠문 중 하나였으니 어떻게 보면 아는 게 당연했다.
정파무림에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이 있다면 사파무림에는 흑도칠문이 있었다. 이들은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처럼 서로 끈끈하게 협력하기보다는 싸우고 다투는 일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사파 무인들이 어디 가서 자기 별호를 내세울 때 최소한의 자부심 역할을 해줬다.
-나는 흑염방 소속 금 아무개다!
-헉! 그 흑도칠문의...!
오대세가나 구파일방과 비교하면 좀 엉성하고 역사도 짧게 느껴졌지만 사실 이들의 힘이 비웃거나 무시해도 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역사도 전통도 의미 없는 사파무림에서 저만한 이름을 가지려면 오로지 세력의 크기밖에 없었고, 역으로 말하자면 흑도칠문에 소속될 정도의 문파라면 가진 세력 하나만큼은 뛰어나다고 봐도 됐다.
연우혁이 알기로 아마 흑염방의 분타도 한경에 있었다. 한경이 치안이 좋은 만큼 개방 분타처럼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없지는 않았다.
“이 백월비고는 예전에 흑염방이 사들인 도관(道觀)의 비고입니다. 흑도의 문파들은 그 무공이 사납고 기세가 드높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무공이 가진 허점과 단점을 알기에 남몰래 도가나 불가의 무공을 찾아다니지요.”
당장 냉수사 고송만 봐도 알 수 있었듯이 사파나 마도의 무공을 익힌 자들은 대다수가 고수의 경지에 도달하면 그 한계를 느끼게 되어 있었다.
남들이 가지 않는 지름길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파나 마도의 무공을 익힌 무인들은 그 부작용이나 단점을 해결해 줄 무공이나 환약을 찾아다녔다. 이 백월비고도 그런 시도 중 하나였다.
설명을 들은 정 거사는 놀라워하면서도 의아해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립(而立, 서른)도 안 된 청년이 보여줄 만한 박학다식이 아니었다.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아는 건가?”
“...저는 원래 영특해 어렸을 때부터 위로는 천문을 깨달았으며 아래로는 지리를 통달했습니다.”
연우혁은 설명하는 대신 판관으로서의 위엄으로 밀고 나갔다. 판관이 되고 나서 좋은 점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도 상대가 뭐라고 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정 거사도 황당해하며 말문이 막혔지만 뭐라고 하진 못했다.
능력을 보여주면서 자기가 통달했다는데 어쩌겠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부르는 겁니다. 흑염방도 제갈세가의 손에 넘어가면 깔끔하게 포기하겠지요.”
연우혁은 모처럼 깔끔하고 편하게 해결했다 싶었다.
제갈세가의 손에 백월옥시가 넘어가면 흑염방도 포기할 터. 그러면 정 거사의 체면도 섰다.
하지만 정 거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서 구해주신 무인은 아마 그 도관 출신의 도인이었던 모양이군.”
“예. 그랬을 겁니다.”
“흑염방은 도관을 샀다고 했나?”
“새로 들어오는 도인이 없어서 쇠락해가던 도관을 통째로 샀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물건은 흑염방의 물건이겠군. 돌려줘야겠네.”
“...?!”
예상 밖의 말에 연우혁은 당황했다.
그러나 정 거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인이 창고 열쇠를 남한테 준다 해서 창고가 남의 소유가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너무 예상 밖의 논리에 연우혁은 당황했지만, 따지고 보면 정 거사의 말이 맞긴 했다.
흑염방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도관을 샀는데 도인들이 열쇠는 안 주고 웬 알지도 못하는 놈한테 몰래 넘겼으니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하지만 연우혁은 기본적으로 사파 문파들한테 도둑질하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 놈들도 도둑질하는 놈들이니까!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원래라면 정 거사의 물건이니 정 거사가 돌려준다고 하면 그러라고 했을 테지만...
‘돌려주면 피바람 부는데, 이거.’
연우혁은 자신이 아는 사건의 내막을 떠올리며 머뭇거렸다.
정 거사가 놀랄 정도로 연우혁의 견문이 넓었던 게 아니라, 당연히 알고 있는 사건이라서 저렇게 입을 놀릴 수 있었던 거였다.
원래 흑염방은 협박을 하던 도둑질을 하던 저 열쇠를 어떻게든 손에 얻어냈다.
그러자 이제 다른 흑도칠문 중 하나인 천화회(天火會)가 갑자기 시비를 걸어왔다. 알고 보니 천화회도 저 도관의 일부를 산 것이다.
누가 먼저 샀는지는 연우혁도 몰랐다. 어쩌면 도관이 동시에 같이 판 걸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제 흑도칠문답게 서로 양보하지 않고 피비린내 물씬 나게 찾은 곳에서 혈투를 벌이고...
...문제는 찾은 곳이 한경이란 점이었다. 한경에서 혈투가 벌어진다는 것 아닌가.
“거사 어른. 의기는 존중합니다만, 이 열쇠는 흑염방만 탐내는 게 아닐 겁니다. 흑염방의 손에 들어가면 바로 소문이 퍼질 거고 흑도 문파들끼리 싸움이 벌어질 텐데, 그러면 한경도 혼란에 빠질 것이고...”
정 거사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연우혁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흑염방 같은 곳은 방회(幫會)인 만큼 기밀이 새어나가기 쉬웠다.
“누군가 중재를 해주면 어떤가?”
“흑도칠문들이 싸우는데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만...”
연우혁은 떨떠름해했다. 이런 사안에서 중재라는 건 두 문파를 권위로 억누르고 서로 양보하게 해야 했는데, 무림에서 그게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음. 무송진인도 힘든가?”
“무송진인이요? 어느 문파 출신이십니까?”
“무당 출신일 걸세.”
“무당파의 무송진인이면...”
‘송자배 무인? 왜 들어본 거 같지?’
연우혁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으면서도 낯선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깨닫고 경악했다.
‘태극검존!’
현재 무림맹의 맹주이자 무당파 출신 최고수, 지금 무림에서 손꼽히는 초절정의 고수 아닌가!
워낙 전대 고수인데다가 무림맹의 맹주인 만큼 무당파의 진인이라고 들었을 때 바로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연우혁은 무림맹주와 아는 사이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정 거사를 경악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만약 상대가 오 포쾌나 적조 같은 놈이었다면 대번에 거짓말 하지 말라고 윽박질렀을 것이다.
“태극검존과 아는 사이셨습니까?!”
“그, 그렇지. 아버지의 친구 분이셨네.”
연우혁의 기세를 느꼈는지 정 거사는 당황해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연우혁은 새삼 왜 한경에서 청군 정씨가 재산도 그리 많지 않은데 대접을 받는지 알 것 같았다.
‘인맥이라는 게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무림맹주를 부탁으로 부를 수 있는 인맥이라니. 연우혁은 자신이 정 거사한테 실례한 게 있는지 고민했다.
“애초에 그럼 태극검존께 물어봐도 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게 무슨 목함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런 부탁을 드리나? 지금 부르려는 건 두 무림 문파가 서로 헛되이 피를 흘리지 않게 하려는 걸세.”
정 거사가 굳은 의기와 기개를 보여주는 동안 연우혁은 생각에 잠겼다.
‘초절정의 경지를 넘은 고수를 한 번 보고 싶긴 하다.’
당장 임가적 같은 벽을 넘지 못한 무인을 만났을 때도 정말 많은 걸 배웠는데, 과연 초절정의 경지를 넘은 무인을 만난다면 어떨까?
이제 와서 연우혁이 가진 난제를 한 번에 해결해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어떤 배움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부르실 수만 있다면 당연히 중재가 가능할 겁니다.”
“그렇다면 잘 됐네. 참. 자네도 진충비도란 별호를 갖고 있는 무림인으로 알고 있는데, 괜찮다면 검존께 자네의 무공을 한 번 봐달라고 해도 되겠나? 관직에서 일하는 사람을 이렇게 따로 불렀는데 아무것도 보답해주지 못해 민망하군그래.”
“...거사 어른!!!!”
연우혁은 거사(居士)가 사실 거사(巨士)였다는 걸 깨달았다.
한경에 이런 절개 높은 선비가 어디 있겠는가!
그 반응에 오히려 정 거사가 더 당황했는지 손을 내저었다.
“감사합니다. 거사 어른. 그럼 검존께서 오실 때까지는 저도 포쾌들을 풀어 주변을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나랏일로 바쁜 사람들을 내 멋대로 더 부릴 수는 없으니. 오늘 말해준 것만으로 충분하네.”
대화가 끝나고 떠나는 연우혁을 배웅하고 나서야 정 거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목함은 어떻게 열었던 거지?’
* * *
“진충비도 나으리!”
연우혁은 길을 막아서는 낯선 놈을 보고 멈칫했다. 연우혁보다는 낮은 이류의 경지였지만, 이류의 경지도 충분히 괜찮은 경지였다.
“누구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용한 곳으로 가시지요!”
무인은 길옆의 다관(茶館)을 가리켰다. 번영한 도시인 한경에는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다관들이 많았다.
꼭 고리타분한 문인들만 쓴 차를 마시는 게 아니라 상인이나 일꾼들도 찾아와 과즙이나 빙당을 녹여 넣은 차가운 냉차를 마시는 만큼 앉아서 이야기해도 나쁘지 않았다.
연우혁은 무인을 확인하고, 다관을 확인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안내해라.”
무인은 다관에 미리 말을 해놨는지 이층의 밀실로 안내했다. 연우혁은 문이 닫히자 무인의 뺨을 후려갈겼다.
짝!
“?!”
“이런 건방진 놈!! 한경의 판관한테 감히 네놈이 누군지 밝히지도 않고 이래라 저래라 하다니. 네놈이 한경의 정관을 우습게 보는 것이냐!!”
“아, 아니. 그것이...”
“당장 네놈을 붙잡아 가둬야겠다!”
연우혁은 극도로 분노해서 날뛰는 시늉을 했다.
이미 상대가 흑염방에서 보낸 무인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무인은 아마 연우혁을 같은 무림인이라고 생각해서 충분히 예의를 갖췄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별 거 없는 놈이 판관을 이렇게 불렀다가는 진짜 두들겨 맞는 수가 생겼다. 판관은 무림인이나 시정잡배가 아닌 것이다.
물론 연우혁은 별로 화가 나진 않았다. 얼마 전까지 포두였는데 갑자기 자존심이 생길 리 없지 않은가.
다만 흑염방에서 사람을 보냈다면 기선을 제압해둬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사파 무인들은 어떻게 날뛸지 몰랐다.
“용서해주십시오!”
드르륵!
아니나 다를까 흑염방에서 나온 다른 무인이 재빨리 문을 열고 무릎을 꿇었다. 연우혁이 방금 파악해놨던 무인이었다.
“이 놈이 한경의 사정에 어두워서 판관 어르신을 몰라 뵈었습니다! 죽여도 시원찮으나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무림인 놈들이 날 얕보다니!”
뺨을 맞은 사파 무인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일단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자긴 나름 무림인으로서 존중해서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다.
‘미친 놈 아닌가, 이거!’
“네놈들이 누군지 알겠다. 흑염방 놈들이지! 네놈들이 지금 날 협박하려고 부른 것이냐!”
“아, 아닙니다!”
흑염방 무인은 기겁해서 대답했다. 상대가 설마 흑염방에서 나온 것까지 이렇게 쉽게 맞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저희는 그저 제안을...”
“네놈들의 뇌물 같은 건 받지 않는다. 나를 누구로 보느냐!”
연우혁은 여유를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사실 얼마를 줄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열쇠 때문에 찾아온 거겠군!’
열쇠 때문에 협상하거나 캐물으려고 찾아왔을 테지만 연우혁은 해줄 말이 없었다.
무림맹주 불렀으니 두 문파가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고 대답해주면 아무리 흑염방 놈들이라도 ‘뇌물 돌려주시오!’라고 외칠 가능성이 컸으니까.
“제안도 필요 없다. 꺼지거라! 다시는 한경의 판관 상대로 이런 얕은 수작을 부리지 마라!”
“어, 어이쿠!”
연우혁이 쉬지 않고 날뛰자 결국 흑염방 무인들은 포기하고 밖으로 도망쳤다.
“무슨 일이요? 저들은 누구고?”
다관의 점원은 그 광경에 감탄해서 자신도 모르게 손님들에게 설명했다.
“저 자들은 흑염방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새 판관 어르신에게 뇌물을 바치려고 했는데 망신만 당하고 쫓겨나는군요!”
“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