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 연우혁 (4)
‘안타깝군.’
연우혁은 도망치는 흑염방 무인들의 뒷모습을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만약 다른 용건으로 만났다면 흑염방과 좋은 사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그런 좋은 사이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미친놈처럼 호통을 치고 뺨을 후려갈기며 쫓아냈으니, 겁을 먹고 기선은 제압당했을지언정 다시 접근해서 뇌물을 바치지는 않을 터였다.
연우혁은 괜히 가슴이 쓰라렸다. 왜 궁 판관이 판관으로 부임했을 때의 선물에 집착했는지 잘 알 것 같았다. 받을 수 있을 때 받지 못하니 마음이 아팠다.
***
짝!
놀랍게도 흑염방 무인만 뺨을 맞지 않았다. 천화회에서 보낸 하인도 뺨을 맞았다. 연우혁은 속으로 한탄했다.
‘이런 아둔한 놈들. 흑염방 무인이 뺨을 맞았다는 소식을 왜 듣지 못한 것이냐!’
그걸 들었다면 얌전히 물러나야지 이렇게 뇌물을 바치려고 오다니. 그럼 연우혁은 더더욱 뺨을 때릴 수밖에 없었다.
열쇠 관련된 일에 참가하지 않으려고 흑염방 무인의 뺨을 쳤는데 천화회하고는 협상하면 흑염방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역시 새 판관 어른은 다르셔도 뭔가 다르시다!”
“한경 백성들에게 실로 홍복이구나!”
허둥지둥 도망치는 천화회 하인들을 보자 한경의 사람들은 고소해하며 외쳤다.
한경의 관리들이 탐욕스럽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한경만 특별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탐욕스럽지 않은 사람은 관리가 되기 힘든 것이다.
위에 뇌물을 바쳐야 부임이 되는데 혼자 청백리 노릇을 해봤자 어떻게 지방에 부임이 되겠는가.
그런 점에서 연우혁 같은 청백리는 보기 드문 한경의 명물이었다. 벌써 몇몇 호사가들은 한경에 명판관이 났다고 다른 지역에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쯧.”
연우혁은 못마땅한 얼굴로 관청을 향해 걸었다. 옆에서 칭송이 쏟아져도 못 받은 뇌물이 아른거려서 영 아쉬웠다.
“판관 어르신. 서신이 하나 와있습니다만...”
“?”
관졸의 말에 연우혁은 멈칫했다. 상대가 눈치를 보는 꼴을 봤을 때 정식으로 날아온 서신은 아니었다.
보통 부정한 청탁을 할 때 이런 식으로 서신이 날아왔다. 관청 문지기를 하는 하인한테 얼마 쥐어주고 서신을 전해달라고 하면, 하인은 또 관청 안을 돌아다니는 다른 하인한테 얼마 쥐어주고 서신을 전해달라고 하고, 또 그 하인은 관졸한테...
이런 식의 수입은 관졸이나 하인들에게 실질적인 녹봉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포쾌도 녹봉이 거의 없어서 백성들한테 뜯고 다니지 않았던가.
연우혁은 관졸이 겁먹지 않도록 말했다.
“꺼내봐라. 어느 누구든 백성의 부탁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지.”
“예!”
관졸은 얼굴이 환해지더니 고개를 꾸벅였다. 연우혁은 살짝 기대에 찬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흑염방인가? 아니면 천화회?’
지금 흑염방이나 천화회가 서신을 보낼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새 판관한테 무례를 저질러서 미안했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다, 우리도 한경에 분타가 있으니 너무 핍박하지 말아달라...
그런 거라면 연우혁도 얼마든지 못 이기는 척 관계를 회복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서신의 내용은 예상 밖이었다.
‘독망검(毒忘劍) 서광!’
연우혁도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흑염방의 고수였다. 무려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고수 아닌가. 그런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사죄하는 서신을 보내자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한경은 치안이 좋은 곳이라 흑염방의 분타가 그리 세력이 크지 않았다.
당연히 분타를 책임지는 자도 별 명성 없는 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독망검이 서신을 보내다니.
대체 독망검이 왜 한경에 와있나 의아해하며 연우혁은 서신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사실 독망검이 한경에 와있는 것보다 더 이상한 건 연우혁에게 직접 사죄의 서신을 쓰는 이유였다.
독망검이 연우혁에게 굽신거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물론 연우혁이 작정하면 한경의 흑염방 분타를 매우 피곤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지만, 말했듯이 한경에서 흑염방은 세력이 별로 크지 않았다. 얼마든지 포기하고 물러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우리는 한경의 질서를 어지럽힐 생각이 조금도 없소. 그저 한경의 새 판관이 무불통지(無不通知)로 뛰어나다기에 묻고 싶은 게 있을 뿐이오. 최근에 목함 하나를 얻었는데, 이 목함을 열고 싶소...
“......”
이유를 깨달은 연우혁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자식들, 목함은 무조건 얻었다고 생각하는구나!’
하긴 흑염방 입장에서는 정 거사가 거절하거나 천화회가 훼방을 놓으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터.
당연히 얻었다고 생각하고 여는 방법을 찾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미 열어서 맹주까지 불렀는데.’
연우혁은 어떻게 해야 하나 깊게 고민했다. 그리고는 결정을 내렸다.
“이 서신을 전해주고 오도록.”
연우혁이 내린 결정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기였다.
‘어차피 초절정 경지에 오른 고수가 올 테니까.’
***
독망검 서광은 한경의 흑염방 분타 건물 안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곳과 달리 한경에서 흑염방은 문파의 이름을 걸고 있지 못했기에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허름했다. 기존 흑염방 무인들은 혹여라도 서광의 심기가 뒤틀릴까봐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봤다.
그러나 서광은 그런 허름함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서광의 머릿속에는 목함 생각만이 가득했다.
‘백월비고의 열쇠는 반드시 내가 손에 넣고 말겠다.’
흑염방이 도관이나 절 여럿을 확보해 무공 비급을 뒤진 건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었다. 서광이 아는 곳만 해도 수십 군데가 넘었다.
하지만 그런 곳들 중 제대로 된 무공이 나오는 곳은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검증이 끝났고 그나마 확인이 안 되고 남은 곳 중 하나가 백월비고였다.
오래 전에 열쇠가 사라져서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최근 백월비고에 관한 몇몇 소문이 돌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 탓에 흑염방의 고수들은 분명 백월비고에 마공의 단점을 해결해 줄 상승의 도가 심법이 있을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꽁꽁 잠가놓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서광도 그런 무인 중 하나였다.
‘방주가 가장 먼저 열쇠를 손에 넣은 무인에게 들어갈 권한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서광은 자신이 지금 열쇠에 가장 가깝다고 확신했다. 이제 남은 건 날파리들이 꼬이기 전에 목함을 열고 열쇠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진충비도한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서신을 보낸 건 조금 걱정이 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보내지 않았다면 진충비도는 무시할 수도 있었다.
상대는 특이하게도 포두, 아니, 판관의 자리에 오른 무림인이었으니까.
“답신이 늦는데 설마...”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무인 한 명이 걱정스럽게 말하자, 대주가 혹시라도 서광이 들을까봐 급히 입을 막았다.
“흑염방의 이름이라면 모를까 진충비도 또한 무림인! 독망검이란 별호를 듣고서 무시하진 않을 것이다.”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는 건 정사를 떠나서 막강한 의미가 있었다. 이런 무인의 부탁을 듣지도 않고 거절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체면을 무시하고 원수를 질 생각이 아니라면 무엇하러 그러겠는가.
새 판관은 지혜롭기로 소문난 사람이니만큼 사소한 부탁을 거절하면서 모욕을 줄 리 없...
“답, 답신이 왔습니다. 그런데...”
“?”
“그게...”
서광은 불길함을 느끼며 무인의 손에 들린 서신을 뺏었다. 놀랍게도 안에는 공사가 다망하여 시간을 낼 수 없다는 답장이 적혀 있었다.
“?!!”
서광은 분노하기보다는 당황했다. 흑염방하고 무슨 원한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진충비도가 이럴 이유가 없었다.
“네놈들. 혹시 진충비도와 충돌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저, 저희가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대인께서 오시기 전까지 아무런 충돌도 없었습니다.”
“혹. 혹시...”
무인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그 무인에게 쏠렸다.
“무어냐? 말해봐라.”
“진충비도는 청백리로 이름 높은 사람인데, 그래서 우리 제안을 받지 않는 것 아닌가...”
서광의 눈썹이 분노로 꿈틀거렸다. 안 그래도 짜증이 치솟는데 부하란 놈이 헛소리를 하니 칼에 피를 먹여주고 싶은 살심이 솟구쳤다.
그러나 의외로 흑염방의 다른 무인들은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그, 그럴듯한 거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 자는 정말 다른 관리들과 달라서...”
“닥쳐라.”
살기 찬 목소리에 무인들은 입을 다물었다. 서광은 이를 악물고 내뱉듯이 말했다.
“진충비도 네놈.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
-서광. 나오려무나.
“?!”
서광은 정체불명의 전음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변에는 전음을 보낼 만한 고수가 없었다. 흑염방 무인들이 전음을 보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다른 고수가 보냈다 하더라도 인근에 보여야 하는데 아무도 없었다.
-서광. 안에는 아무도 없다. 난 문 앞에 있으니 나오도록 하려무나.
“어떤 미친 놈이...!”
분노해서 달려 나가려던 서광은 그제야 깨달았다.
문 닫힌 방 안에 있는 자신에게 대문 밖에서 전음을 보낼 만한 고수가 있나? 본인도 그럴 수가 없는데?
“어... 어느 고인께서...?”
-서광. 나는 무송진인이다. 늙은이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게. 백월비고 건으로 왔으니.
“......”
잠시 상대가 누군지를 고민하던 서광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서 무기도 던지고 뛰쳐나갔다.
그 체면 없는 뒷모습에 흑염방 무인들은 독망검이 미친 게 아닌가 의심했다.
***
‘미친 놈, 미친 놈, 미친 놈, 미친 놈, 미친 놈...!’
정 거사의 저택에 도착한 서광은 연우혁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저건 정신 나간 놈이었다.
차라리 그냥 거절을 하던가, 아니면 자신이 태극검존과 인연이 있다고 말을 하던가(믿진 않았겠지만).
목함 좀 열어달라고 했다고 태극검존을 부르는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진충비도가 정사지간의 괴인이란 말은 들었지만 정말 괴팍하기 그지없는 놈이었다.
앞을 보니 천화회에 소속된 고수, 탈령장 추수욱이 보였다. 저 놈도 서광 못지않게 넋이 나간 상태였다. 왜 불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태극검존의 등장에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오해를 하고 있군.’
연우혁은 흑도칠문의 무인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마 정 거사가 아니라 자신이 불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허름한 저택의 주인이 그런 능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상관없지.’
연우혁은 그런 오해를 푸는 대신 태극검존을 쳐다보았다.
태극검존은 백발이 성성하고 혈색 좋은, 길을 걷다보면 참 선하고 서글서글하게 생긴 노인이구나 싶은 도사였다. 어딜 봐도 무인이 내뿜는 칼날 같은 기세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서광. 추수욱. 둘 다 와줘서 고맙네. 늙은이가 불렀다고 불만은 없겠지.”
“예, 예.”
“없... 습니다.”
둘은 여전히 혼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극검존은 자상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늙은이가 여기 온 건 백월비고를 여는 백월옥시의 주인을 확실하게 정해주기 위해서네. 여기 저택의 주인은 백월옥시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어하더군.”
태극검존의 말에 서광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눈빛을 빛냈다.
역시 예상대로 이 저택의 주인인 늙은이는 괜한 평지풍파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여기 추수욱은 자기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더구나.”
“예?”
서광은 살기 넘치는 눈빛으로 추수욱을 쳐다보았다. 속셈을 들킨 추수욱은 움찔했지만 이미 들킨 만큼 부정하지 않고 대답했다.
“백월비고를 산 건 우리 천화회도 마찬가지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지금 백월비고를 누가 갖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강제로 뺏고 있는 거겠지.”
“이 놈이 감히...!”
서광의 눈빛에 살기가 짙어지자 태극검존은 손짓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살기가 흩어졌다. 서광은 자신이 뭘 당했는지 몰라 눈을 깜박였다.
‘술법!’
연우혁은 태극검존이 술법을 썼음을 깨달았다. 영안으로 한 번 봐서는 알기 힘들 만큼 대단한 술법이었다.
“늙은이 피곤하게 떠들지 말아주게. 둘이 잘 이야기해서 백월비고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게나. 싸우지는 말게. 둘 다 죽여 버릴 테니. 보름 안에 결정을 마치게. 보름 안에 마치지 않으면 백월옥시는 내가 갖도록 하지.”
태극검존이 열쇠를 흔들자 둘은 깜짝 놀랐다.
“검존께서 여신 겁니까?!”
“여기 판관이 열었네. 자넨 날 따라오게.”
연우혁이 태극검존의 뒤를 쫓아 사라지자, 두 무인은 자리에 남은 정 거사에게 외쳤다.
“어떻게 열었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