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 연우혁 (7)
서광은 흑교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이 젊은 판관도 흑교서가 열려다가 실패했단 사실을 들으면 생각이 좀 달라질 터였다.
그러나 그 때 마침 탈령장 추수욱이 도착했다.
미운 놈은 뭘 해도 밉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서광은 인상을 찌푸렸다. 물어볼 기회를 놓친 것이다.
“늦었군.”
“네 녀석이 빠른 거겠지. 판관 어른. 안녕하십니까.”
“예. 반갑습니다.”
“......”
둘이 서로 훈훈하게 인사를 주고받자 서광은 괜히 초조함을 느꼈다.
“...저번에 개방에 맡긴 은자는 확인해보셨소?”
“예. 독망검 대협께서 베푼 은혜에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사실 개방의 한경 분타를 맡고 있는 협걸개가 한 말은 ‘독망검이 뒤질 때가 됐나?’였지만 연우혁은 좋게 말해줬다.
그제야 좀 안심이 됐는지 서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판관 어른. 이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목함 말입니다. 저희 천화회에서도 그걸 한 번 만져본 적이 있습니다만 열지 못했습니다.”
“하하. 시간이 부족하셔서 못 여신 겁니다.”
“아니... 저희 천화회에 지모(智謀)로 유명한...”
“......”
서광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탈령장이 하는 말을 들었다.
이상한 이야기였지만, 처음으로 저 밉살스러운 놈과 마음이 통한 기분이 들었다.
***
백월옥시를 끼워넣자 온갖 기관진식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비고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림의 기관진식은 허가 받지 않은 침입자들이 힘으로 부수고 들어오는 걸 경계했기에 외부의 침입자들을 막음과 동시에 유사시 안의 물품들을 파괴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서늘한 공기가 안에서 밀려들어왔다. 꽤 오랫동안 밀폐되어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먼지 냄새는 나지 않았다. 안의 기관진식이 공기가 썩지 않도록 잘 순환시켰다는 뜻이었다.
‘진짜 뭐가 있나?’
영약이나 상승무공에 관심 많은 연우혁이 백월비고와 관련된 옥시를 봤을 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건, 백월비고에 크게 기대하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월비고와 관련된 사건 중 연우혁이 알고 있는 건 두 가지.
하나는 간 큰 도인이 두 문파한테 사기쳐서 같이 팔아먹은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목함에 든 열쇠를 꺼내달라고 찾아온 사건이었다.
둘 다 별로 대단한 사건은 아니었다.
심지어 후자의 경우에는 흑도칠문이 찾아오지도 않았었다. 웬 이름 모를 작은 무관이 새로 건물을 사들였다고 찾아왔다.
백월비고에 정말 대단한 무공이 있었다면 그것과 관련된 무슨 일이라도 좀 일어났을 텐데 연우혁의 기억에는 그런 게 없었다.
‘정말 대단한 무공이 있다면 원래 있던 도관이 모르는 것도 이상한데.’
한 도관을 둘, 아니 셋한테 팔아먹을 정도로 영리한 자가 정말 대단한 무공 비급을 그냥 내버려뒀을 것 같진 않았다.
연우혁은 적조가 태극검존의 뜻을 오해한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냥 두 마두가 싸우지 않고 일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붙여놓은 걸 수도...
“이쪽부터 시작하지.”
두 무인은 서고에 꽂힌 서책들을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빠르게 훑어 내려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의 움직임을 경계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암습을 걱정하기보다는 상대가 비급을 먼저 발견하고 몰래 치울까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양생법 책, 외단 만드는 책, 역사서...’
연우혁은 영안을 열고 두 무인이 보는 책들을 확인했다. 도관의 책들이라 그런지 도가에 관한 잡서들이 많았다.
건강해지기 위한 양생법 책은 원시적인 심법 책에 가까웠고 외단 만드는 책은 유익한 구석이 별로 없는 사이비 책이었다.
반 시진 정도 지나자 두 무인은 고개를 들었다. 확인을 모두 끝낸 것이다.
“다 끝났군.”
“혹시 독망검이 수상쩍은 행동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쓸만한 서책을 몇 개 찾았지. 네놈이 눈치챘을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책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잡서들 중에서 쓸만한 책을 찾았다니 독망검의 명성도 곧 무너지겠군!”
둘이 날 선 말을 주고 받는 사이 연우혁은 앞으로 걸어갔다가 돌아왔다.
“다음 서각으로 가시죠.”
“잠깐. 진충비도. 여긴 진법이 있소.”
서광은 팔을 뻗으며 말렸다.
군사나 책사처럼 진법이나 술법에 능하지는 못하지만, 절정의 경지에 오를 정도의 무인은 이 둘에도 어느 정도 견문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서광은 물론이고 추수욱도 여기 들어왔을 때부터 앞에서 느껴지던 진법의 기운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예. 생문을 찾아서 해제하고 왔습니다. 가시죠.”
“......”
“......”
두 무인은 갑자기 스스로가 멍청해진 기분을 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탈령장 추수욱은 속으로 생각했다.
독망검 놈이 똑같이 멍청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
세 시진 후.
서광은 책을 벽에 집어던졌다.
“빌어먹을 놈! 잡히면 포를 떠서 죽여주마!”
“이미 늙어죽었겠지.”
“놈의 친족이라도 남아있겠지!”
“잡히면 말해라. 나도 머리통을 으깨버릴 테니.”
두 무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서고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쓸만한 비급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원래 문파나 도관의 책들이란 게 대부분은 허섭스레기였다. 구파일방 정도는 되어야 역사가 있고 서고의 비급도 생기는 거지, 이름 모를 무관이나 도관에 비급이 있을 만큼 강호는 만만하지 않았다.
둘도 당연히 그걸 알고 있었지만 허탈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들인 시간과 노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연우혁은 조용히 기다렸다. 태극검존의 이름이 있다지만 두 절정의 무인이 아주 예민할 때 잘못 건드렸다가는 순간적으로 이름을 잊을 수도 있었으니까.
‘...저런 곳이 있었나?’
기다리던 연우혁은 서각 사이에 난 길 끝에 처음 보는 모퉁이를 발견했다.
기억에 따르면 지도에 저런 길은 없었다. 들어와서 둘러봤을 때에도 저런 길은 없었고.
연우혁은 별 생각 없이 발을 내밀었다. 영안으로 봤을 때 이상한 함정이나 진법은 없었다.
모퉁이를 돌자 그 끝에는 연무장이 있었다. 도관의 연무장이 참 특이한 곳에 있다 싶어서 연우혁은 두 무인을 불렀다.
“여기 연무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연우혁은 당황해서 고개를 내밀었다.
방금까지 있었던 두 무인은 보이지 않고 캄캄한 어둠만이 서고를 채우고 있었다. 그 이질적인 상황에 연우혁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쿵!
갑자기 날아오는 공격에 연우혁은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어느새 연무장에서 적이 튀어나와 연우혁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적은 현란한 움직임으로 주먹을 지르고, 회수하고, 휘두르고, 웅크렸다.
연우혁은 쌍사보법으로 물러나며 공격을 피했다. 영안으로 볼 틈도 주지 않고 매섭게 날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공간을 점령하고 있다!’
허공을 채우는 권영에 연우혁은 자신이 수세에 몰렸음을 느꼈다. 안 그래도 좁은 서고 복도 때문에 쌍사보법의 위력은 크게 줄어든 상태.
연우혁은 작정하고 주먹을 내질렀다.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의 기세를 잠깐 끊어야지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금의위가 시전하는 제대로 된 위국권법이 연우혁의 손에서 펼쳐져 나왔다. 그 사이 증가된 내공과 쌓은 경험이 연우혁이 영안으로 처음에 이해했던 무리(武理)와 합쳐져 상승의 효과를 만들어냈다. 연우혁은 전력으로 뻗은 자신의 권초가 생각보다 강맹해 놀랐다.
상대의 내공은 다행히 연우혁에 비해 높지 않았다. 권격끼리 부딪치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상대의 권영이 점점 줄어들었다. 연우혁은 상대를 몰아붙이기 위해 더욱 더 집중했다.
‘답답하다.’
연우혁은 답답함을 느꼈다. 좁은 복도에서 싸우느라 답답함을 느낀 게 아니었다. 상대에게 기습을 받은 뒤 우위를 점하지 못해서 느낀 것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답답함은 자신의 무공에서 나오고 있었다. 연우혁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평소 연우혁은 무공의 경지가 낮고 부족하더라도 별다른 불만 없이 상황에 맞게 최선의 선택을 했었다. 지금 당장 없는 내공, 없는 초식에 불만을 가진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연우혁은 자신의 권법이 이상할 정도로 답답하고 불만스러웠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무공을 바꿔보자.’
연우혁은 어떻게든 틈을 타 탈혼비도를 꺼내보려고 했다. 지금 뻗을 수 있는 가장 강한 초식인 충칙진명(忠則盡命)을 펼쳐 상대를 친 뒤 몸을 비틀어서 탈혼비도를 준비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상대는 연우혁의 생각을 읽었는지 귀신 같이 따라붙었다. 연우혁은 답답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생각해라! 탈혼비도를 쓰려면...’
연우혁은 더욱 더 깊숙이 생각에 잠겨들었다. 이는 위국권법과 탈혼비도의 근원적인 무리(武理)에 대한 고민이었다.
동시에 영안은 열려서 주변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읽어내고 빨아들였다. 평소와 다른 과감한 사용에 영기가 줄줄 소모되고 코피가 흘러내렸지만 연우혁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 위국권법은 탈혼비도와 같이 이어서 펼칠 수 없는가?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같이 이어서 펼칠 수 있는가?
‘알맞게 바꿔야 한다!’
순간 연우혁의 뇌리에 번개가 치는 듯한 충격이 찾아왔다.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은 자신이 배운 무공을 다시 새로 만들어낸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무슨 소리인지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이제 연우혁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느끼고 있었다.
두 무인이 같은 무공을 배우고 똑같이 완전히 대성했다 하더라도, 둘이 펼치는 초식의 투로는 분명 다를 것이다. 초식의 순서와 변화까지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 논리는 가장 처음으로 무공을 만든 선인에게도 들어맞았다. 선인과 후인이 같은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같은 위력이 나오겠는가?
후인은 결국 자신의 무공을 새로 깨달아야 했다.
연우혁의 답답함은 수많은 경험을 쌓고 깨달음을 얻으면서 자신의 무공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었다.
태극검존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눈앞에 있어도 알지 못하면 보지 못하는 게 있는 법. 무공을 완전히 이해했어도 끝은 없었다.
상대의 움직임을 꿰고 거리를 벌리며 정확한 빈틈에 탈혼비도를 쓸 수 있도록 권법과 보법을 변화시킨다. 연우혁의 생각이 무공을 조금씩 움직였다. 아직 고작해야 일류의 내공이었기에 변화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상대는 연우혁의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처음으로 빈틈을 드러냈다. 연우혁은 이를 악물고 탈혼비도를 펼쳤다.
푹!
짜릿한 소리와 함께 상대의 몸이 아래에서부터 흩어지기 시작했다. 믿기 힘든 기현상에 연우혁은 놀라서 쳐다보았다.
상대는 연우혁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영안이 있는데 진법에 걸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다음 적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궁 판관의 얼굴을 한 적이었다.
“......”
질색하면서, 연우혁은 주먹을 뻗었다.
***
“헉, 헉...!”
연우혁은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걸 느꼈다. 전신이 노곤해서 그냥 쓰러지고 싶었다. 내공은 물론이고 상단전까지 영안 혹사로 인해 욱신거렸다.
그러나 연무장의 적은 쓰러뜨릴 때마다 나왔다. 궁 판관은 물론이고 지부 어른까지 은자를 쏘아내더니 이번에는 오 포쾌가 쾌검을 뽑아냈다.
이쯤 되자 연우혁도 이게 서고의 무슨 시험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아까 새로 열린 길이 시험으로 인도하는 길인 모양이었다.
문제는 연우혁 수준으로 시험을 통과하기 힘들다는 거였다. 벌써 쓰러지기 직전인데 시험은 끝날 기색이 없었다.
‘젠장. 아무리 그래도 퇴로는 보여야 하지 않나?’
영안으로 봐도 빠져나가는 길이 없었다. 아까 싸움에서 하도 혹사시킨 탓에 더 깊게 볼 힘도 부족했다.
순간 오 포쾌가 찌른 검이 어깨를 관통했다. 연우혁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주먹을 휘두르게!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연우혁의 주먹이 갑자기 앞으로 뻗어져나갔다.
‘강신술(降神術)?!’
자기가 쓴 적도 없고 익힌 적도 없는 술법이 펼쳐지자 연우혁은 당황했다. 그러나 연우혁의 몸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연자여. 당황해하지 말고 기억하게!
쾅!
권격이 터져나오자 오 포쾌가 일격에 사라졌다. 연우혁은 그 위력에 경악했다. 아까 새로이 초식을 변화시키며 뿌듯함을 느꼈는데, 그게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강신술이란 게 원래 이름은 거창하게 들려도 그렇게까지 극적으로 강해지지 않았다.
당장 연우혁이 남두성군의 힘을 빌리는 술법을 쓴다지만, 그걸 정말 남두성군의 힘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비웃으리라.
당연히 쓰는 사람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위력은 그런 상식을 부수고 있었다.
“제 주먹이...”
-연자여. 뿌듯함은 미뤄두고 집중하게!
“...박살나고 있습니다!”
-...여긴 심상 속이니 상관없네. 다시 말하지만 집중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