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 연우혁 (8)
‘심상 속이라고?’
연우혁은 믿기지가 않았다.
환술이나 술법에 걸렸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자체가 현실이 아니라 심상 속이었다니.
손에서 통증이 몰려왔다. 아까 말도 안 되는 위력의 권격을 뻗은 탓에 손이 버티지 못한 모양이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살점이 드러났다.
‘혈옥갑이 없다!’
그제야 연우혁은 이게 심상 속이라는 증거를 깨달았다. 살벌한 위력을 자랑하던 혈교의 신물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연자여.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걸세. 자네가 깨달아야 해!
말과 함께 연우혁의 몸이 멋대로 권법의 초식을 출수했다. 손이 망가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까보다 위력은 더욱 강맹했다.
연우혁은 통증을 참고 집중했다. 영안이 스스로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관찰했다.
‘이건... 위국권법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강맹한 초식을 가진 권법이 위국권법이었다니?
이미 충분히 혼란스러웠지만 연우혁은 더욱 홀린 기분이 들었다. 연우혁은 이미 영안으로 위국권법의 초식을 완전히 이해한 상태였다.
그런데 연우혁의 예상을 넘어서는 위력이 어찌 이렇게 쉽게 나온단 말인가?
연우혁은 관찰하고 관찰했다. 주먹이 박살나서 뼈까지 드러날 지경이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연우혁은 다시 한 번 깨달음을 얻었다.
‘의념이다!’
초절정의 벽 앞에 도달한 임가적이 연우혁에게 보여준 경지.
서로 같은 초식을 펼치고 동등한 수싸움을 하더라도 의념을 사용하는 고수의 일격은 피할 수가 없었다. 세상의 섭리가 고수의 일격에 따라 순간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강신술로 들어온 혼령은 순간순간 의념을 사용해 위국권법의 위력을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같은 진충보국 초식이라 하더라도 의념을 사용하자 뚫지 못하는 걸 뚫고 맞추지 못하는 걸 맞췄다.
순간 연우혁은 온몸의 기혈이 뒤흔들리는 듯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 연우혁의 몸을 안에서 찢어발기는 기분이었다.
피를 토할 뻔한 걸 참는 사이 혼령이 다급히 사과했다.
-미안하네! 권강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강기는 무리였군!
“......”
연우혁은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혼령은 마지막으로 연우혁의 몸을 비틀더니 자세를 잡았다.
‘탈혼비도...!’
혼령이 탈혼비도를 쓰려고 한다는 걸 깨달은 연우혁은 눈을 부릅뜨고 집중했다.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무리(武理)를 가진 탈혼비도는 빠르게 격살시키는 것에 모든 것을 건 암기술이었다. 그러나 혼령이 보여주는 탈혼비도는 무언가 달랐다. 연우혁이 아무리 내공을 많이 끌어모은다 하더라도 저 속도보다는 느릴 것 같았다.
푹!
‘늦게 던졌는데... 어떻게...?!’
믿기 힘들었지만 연우혁은 분명히 보았다.
상대의 몸에 비도가 꽂힌 뒤 연우혁이 던지는 모습을!
말도 안 되는 빠르기였다.
-연자의 절초는 바로 이거였군. 나 한종리(漢鍾離)가 보여준 수법을 잊지 말게. 지금은 무리더라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연자의 무공은 올라갈 걸세!
연우혁은 그제야 끝났다고 생각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심상 밖으로 나가 현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심상은 끝나지 않았다.
“...한, 한 대협. 돌려보내주십시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일단 이 혼령의 강신술은 태극검존의 수법이 분명했다. 최근에 이렇게 고명한 술법을 굳이 연우혁에게 걸어줄 사람은 태극검존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심상은 백월비고의 절진으로 발동된 심상이었다.
즉...
‘둘은 아무 상관이 없군!’
연우혁은 아찔해졌다.
당연히 몸이 망가지더라도 싸움이 끝나면 돌려보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연우혁은 자신을 한종리라고 밝힌 자를 욕했다. 이거 완전 미친 놈 아닌가.
태극검존도 보통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연우혁이 보기에 태극검존은 이 비고에 이런 함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 확실했다. 그게 아니라면 연우혁을 억지로 들여보낼 이유가 없었다.
그냥 들여보냈다가는 연우혁이 허무하게 깨질지 모르니 이런 술법을 걸어준 것이리라.
문제는 지금 연우혁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단 것이었다. 내공은 바닥이고 팔다리도 후들거렸다. 연우혁은 태극검존이 자신의 수준을 너무 과대평가한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됐다.
‘이 상태로는 그냥 오 포쾌가 나와도 힘들 것 같은데...’
연우혁은 비틀거리며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연무장에서는 새로운 적이 나오지 않았다. 위에 발을 올리는 순간 연우혁의 머릿속에 깨달음의 덩어리가 들어왔다.
-...명시처주(明時處主)...지소설법문(指所說法門)...
범망공(梵網功)의 구결과 함께, 연우혁은 심상 속에서 깨어났다.
***
태극검존은 자리에 앉아 정 거사가 가져온 찻잔을 들어올렸다. 정 거사는 주름 잡힌 얼굴에 민망함을 드러내며 말했다.
“대접이 변변치 않아서 부끄러울 뿐입니다.”
“네가 떳떳하면 그걸로 충분하단다. 아해야.”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오래 계셔도 되시겠습니까?”
정 거사는 개인적인 친분으로 태극검존 같은 정파의 거두를 너무 오래 붙잡아놓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태극검존이 문파의 문객마냥 문지기 노릇을 시켜도 될 무인은 아니지 않은가.
“일이 마무리되는 걸 보고 갈 거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리고...”
“정 거사님, 정 거사님 계십니까!”
밖에서 들려오는 젊은 포두의 목소리에 태극검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고 하게.”
연우혁은 매우 혼란스러운 얼굴로 들어왔다. 유약한 촌부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던 태극검존이 물었다.
“비고는 어땠나?”
“역시 알고 계셨습니까?!”
“술법이 사라진 걸 보니 종리권을 만난 모양이로군... 깨달음을 얻었길 비네. 팔선의 심득이 저렇게 선명하게 담긴 보물은 찾기 힘드니.”
“!”
태극검존의 설명에 연우혁은 자신이 겪은 경험이 어떤 경험인지 깨달았다.
놀랍게도 태극검존은 신선이 남긴 심득을 자신한테 써준 것이다!
“팔, 팔선이라면 저도 알 만큼 유명한 신선들인데, 그런 심득을 무당의 제자가 아닌 제가 받아도 되는 겁니까?”
“원래는 안 되지. 무당의 제자들 앞에서는 말해주지 마라.”
연우혁은 황당했지만 눈앞의 고수한테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무공 이야기를 하자 태극검존은 젊어지는 것 같았다. 아까보다 훨씬 더 기운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깨달음을 얻었지?”
“의념을 어떻게 쓰는지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의념을! 좋구나! 보통이라면 초식의 버릇을 고쳐줬을 텐데.”
연우혁 같은 경우는 영안으로 무공을 이해하고 펼쳤기에 초식에 군더더기가 없고 잘못된 버릇을 찾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종리권이 남긴 심득도 그 다음 단계를 가르쳐준 것이리라.
“네 수준에서는 가장 손에 익은 초식을 펼쳐야 이해가 될까 말까 할 텐데, 어떤 초식을 보았나?”
“탈혼비도란 암기술을...”
“권법이 아니라? 판관이 익힌 무공치고는 너무 사파 같은데.”
연우혁의 얼굴이 흐려지자 태극검존은 농이었다고 말했다.
“암기술이든 권법이든 중요한 건 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건 계속해서 정진해나가는 거지. 보고 겪은 심득을 잊지 말고 정진해나가라.”
“감사합니다. 태극검존 님.”
연우혁은 예를 갖춰 절했다.
다른 건 몰라도 태극검존이 이번에 베푼 은혜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여러 술법을 봐왔던 입장에서 저렇게 생생한 심득이 담긴 술법의 가치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자. 그럼... 비고에서 뭘 갖고 나왔나?”
“범망공이 있었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대충 짐작만!”
태극검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설명했다.
범망공은 불문의 무공, 그것도 중원이 아닌 서장 불승들이 익히는 독특한 심법이었다.
불순하고 탁한 내공을 정순하게 만들어주는 내가기공!
연우혁도 냉수사 고송이 그걸 애타게 찾아다니는 걸 봤던 만큼 범망공을 비고 안에서 배웠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도관을 세운 도인이 숨겨놓았던 거겠지. 도가의 무공은 아니니 도관의 사람들이 보게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런 비급을 태워서 없애버릴 순 없으니.”
“왜 저만 볼 수 있었던 겁니까?”
“욕심이 없었으니까! 비급을 뒤지러 온 놈들은 절대로 절진을 발동시키지 못했을 거다.”
도관을 세운 도인은 범망공이란 비급을 처리하기 위해 꽤나 고민을 했던 모양이었다.
다른 문파의 비급을 멋대로 태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인들에게 익히게 할 수도 없고...
그 결과가 서고에 깃든 절진이었다. 태극검존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 일이 만족스럽게 해결되었다. 두 놈은 성이 풀릴 때까지 비고를 직접 뒤져보았으니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겠지. 범망공은 수고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해라.”
“감, 감사합니다.”
사실 연우혁은 범망공이 별로 필요가 없었다. 이미 하해불택신공의 단점은 현청벽사신공이 막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태극검존은 담담하게 말했다.
“네게 필요 없는 무공이라고 생각해서 버리지 말고 곰곰이 고민해보도록 해라. 범망공은 흔히 볼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니까! 공부하다 보면 네게 도움이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대화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연우혁은 떠나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태극검존이 왜 그러느냐는 듯이 물었다.
“할 말이 더 있나?”
“혹시... 도관을 판 도인 말입니다. 태극검존께서 아시는 분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도관에 대해 유난히 자세히 아는 것도 그렇고, 일개 도인이 흑도칠문의 두 문파를 속였다는 게 매우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 거사의 일도 그랬다. 태극검존쯤 되면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고수들이 여럿 될 텐데 그들을 보내서 전언을 전해도 됐다.
그러지 않고 직접 왔다는 건 무언가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었다.
“...제법이야, 제법이야! 맞네. 도관을 판 놈은 내가 아끼던 녀석이었네.”
“무당의 제자였습니까?”
“꼭 무당의 제자여야만 아낄 수 있는 건 아니지. 녀석은 무재(武才)는 부족해도 도사의 자질이 뛰어났네. 차라리 관주로서의 자질이 뛰어났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녀석은 도관을 팔면서 자신을 핍박한 문파들에게 보복하고 싶어했네. 그래서 도와줬지.”
태극검존은 옛날 생각이 났는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꼿꼿했던 허리가 굽어져 있었다.
“녀석이 갖고 도망친 열쇠가 정 거사의 손에 들어갔을 줄 누가 알았겠나... 세상 일은 언제나 예상하기 힘든 법일세. 경지에 올랐어도 그건 달라지지 않지. 진충비도.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사물을 세심히 살펴본다면, 한경에서 억울한 사람은 없을 걸세그려.”
태극검존은 연우혁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연우혁이 고개를 들자, 태극검존은 이미 모습을 감추고 사라진 뒤였다.
***
“흑염방하고 천화회를 아나?”
“예. 무슨 일이십니까?”
일이 마무리되고 평소처럼 관청에 나온 연우혁은 궁 판관의 질문에 의아해했다.
“이 놈들이 나한테 선물을 보냈는데, 아무 말도 없이 보내서 당황스럽군그래!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판관 어른의 명성을 존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냥 받으시지요.”
연우혁은 왜 두 문파가 선물을 보냈는지 알았다. 궁 판관 몰래 도관을 뒤지고 팔아치웠으니 혹시라도 나중 일을 대비해 선물을 보내놓은 것이다.
“그건 틀릴 소리다. 공물(空物)만큼 위험한 것도 없지. 하물며 저런 사파 놈들이라면 더더욱.”
궁 판관은 꽤나 신경이 쓰였는지 혼자 중얼거리며 골똘히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물었다.
“맞아. 정 거지 놈 일을 그냥 도와줬다면서?”
“헉. 급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연우혁은 다급히 일어났다. 궁 판관에게 무슨 욕을 얻어먹을지 두려웠던 것이다.
“덕분에 지부 어른이 크게 기뻐... 일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 없다니까!”
궁 판관은 벌써 저 멀리 뛰어가는 연우혁을 보며 외쳤다. 무공을 익힌 놈이라 그런지 몸놀림이 보통이 아니었다.
‘위험했다.’
연우혁은 앞으로 보름 정도는 궁 판관을 피해다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방 안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중관 어른... 아니, 주 공공!”
혈기 넘치는 시절에 젊은 관리들의 양물을 잘라댄 허 중관과, 허 중관의 윗사람인 주 공공까지 앉아있자 연우혁은 깜짝 놀라 급히 인사했다.
허 중관은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띠우며 축하했다.
“판관의 자리에 오른 걸 축하하네. 난 자네처럼 재주 좋은 포두는 분명 출세할 거라고 생각했지. 왜, 낭중지추란 말도 있지 않나.”
“아닙니다.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하 교위께서 제 공을 제대로 써주신 덕분에...”
“......”
눈치 없이 다른 사람에게 감사하는 연우혁의 말에 허 중관은 자신도 모르게 주 공공을 쳐다보았다. 미동도 없었지만, 허 중관은 다급히 연우혁에게 눈짓했다.
‘...아차!’
연우혁은 자신이 최근 판관의 자리에 오르고 무공 수련에 몰두하느라 둔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동창 환관들 앞에서 금의위를 칭찬하다니!
“사실 하 교위께서는 오만하고 교만한데다가 무례한 분이었습니다! 그 일을 도우면서 얼마나 괴로웠던지!”
“그, 그게 아닐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