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믿음직스러운 친구 동창 (1)
“아닙... 니까?”
연우혁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 중관이 무슨 암시를 보내는 것 같았는데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 조금 더 생각해보게. 자네가 판관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말이야. 물론 자네의 재주가 매우 뛰어나지만, 알다시피 조정의 관직이란 건 혼자서의 힘만으로는 될 수 없...”
“아!”
그제야 연우혁은 허 중관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깨달았다.
연우혁은 절대 배은망덕한 놈이 아니었다. 판관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을 잊을 리 없지 않은가.
“지부 대인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
허 중관은 보기 드물게 인자한 표정을 무너뜨리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네는 그렇게 재주가 뛰어나면서 왜 눈치가 없나?”
“아, 아니...”
“그 작자는 확실히 발이 넓고 원수가 적은 호인이지만 딱 거기까질세. 자기 자리에 만족하는 만큼 분수에 넘치는 짓은 하지 않지. 자네에 대해 물어보면 좋게야 말해주겠지만 먼저 나서서 포두를 판관 자리에 추천할 리는 없지 않나.”
‘그럼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야?’
연우혁은 혹시 예전에 도와준 적 있는 현령인가 싶었다. 결국 허 중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 공공...”
“예?”
“주 공공! 주 공공께서 자네 공을 확실하게 써서 상신하셨단 말일세!”
“?!”
믿기 힘든 말에 연우혁은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동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일개 포쾌도 동창의 악명은 잘 알고 있을 만큼, 동창은 만만한 조직이 아니었다.
이들은 환관들로 구성된 만큼 폐쇄적이었고 관리들의 뒷조사를 하는 만큼 위협적이었다. 가끔 지역의 관리들을 시켜 일을 돕게 했다지만 이들이 보상하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주 공공이 저번 혈교 관련 사건에서 연우혁의 공을 정확히 써서 보고해줬다니.
놀라움과 동시에 연우혁은 바닥에 엎드렸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흑흑, 눈이 있어도 은인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이런 눈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에잇, 에잇!”
“진, 진정하게.”
연우혁이 이마를 바닥에 쿵쿵 부딪치자 허 중관은 다급히 말렸다. 기세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그만두어라.”
주 공공이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연우혁은 이마로 나무바닥을 부수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금의위가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겠지. 동창의 악명이 있으니.”
“아닙니다! 제가 보는 눈이 없어서...”
“됐다. 그만두자꾸나.”
주 공공의 목소리에서는 미세한 쓸쓸함이 느껴졌다. 연우혁은 위험신호를 느꼈다. 여기서 정말 그만뒀다가는 눈앞의 환관이 보여준 호의가 회수될지도 몰랐다. 원래 사람이 한 번 빈정상하면 쉬이 풀어지지 않는 법 아닌가.
“제가 주 공공을 생각지 못했던 건 제 공이 너무나도 보잘것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공을 누가 장계에 적어주리라 생각했겠습니까?”
“......”
허 중관은 속으로 어이없어했다.
‘저건 좀...’
솔직히 저번 혈교 토벌 때 진충비도의 공이 작다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본인도 그걸 알 텐데 저렇게 뻔뻔하게 외치다니.
‘...효과가 있잖아?!’
허 중관은 주 공공이 말을 끊지 않고 가만히 듣는 부분에서 희망을 느꼈다.
평소 주 공공의 성격이라면 그만두라고 했을 때 지껄이는 놈의 혓바닥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가만히 듣는 것 자체가 희망적인 징조였다.
‘힘내게, 연 판관! 자네는 할 수 있어!’
“한경에 돌아와서 포두로 일하면서도, 주 공공을 따라 돌아다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한경의 일을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제 자신을 진정 우국지사로 느꼈던 것은 그 때 갑판 위뿐이었습니다! 어찌나 그립던지!”
“금의위는?”
묵묵히 듣고 있던 주 공공이 질문 하나를 던졌다.
“예?”
“금의위와 같이 일을 해결했을 때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흡족했는가?”
“어떻게 보름달과 반딧불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드렸듯이 금의위 교위들은 무례하고 무능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 교위!’
연우혁은 나중에 사과하기로 마음먹고 외쳤다. 하 교위라면 분명 이해해 줄 것이다. 동창 당두가 칼 들고 앞에 서있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주 공공의 지모와 비교하면 참으로 답답하고...”
“그랬단 말이지!”
주 공공은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아까와 달리 미약한 흡족함이 담겨 있었다. 연우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
“예?”
“더 말해보거라. 궁금하구나!”
“......”
연우혁은 그 후로 이각 정도를 더 금의위와 동창을 비교해가며 주 공공을 찬양해야 했다. 온갖 아부를 짜내면서 연우혁은 다짐했다.
‘앞으로는 더욱 더 조심하겠다...!’
말 한 마디 실수로 이렇게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될 줄이야.
들을 만큼 들은 주 공공은 냉정하게 말했다.
“물론 금의위 또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조직이지. 하지만 이들 중에 무식한 무부(武夫)가 많고 더벅머리 선비들이 많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탓에 실수를 저지르는데, 드러낼 생각은 하지 않고 숨기기만 하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실로 옳은 말씀이십니다.”
“동창에 대한 악명도 대부분 이들이 퍼뜨린 것이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연우혁이 노회한 관리는 아니었지만 동창에 대한 악명이 일개 조직이 허위로 만들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았다.
그리고 사실 금의위의 악명도 만만치 않았다. 자기들도 욕을 먹는데 무슨 동창한테 뒤집어씌운단 말인가. 그냥 이 둘은 자기들이 한 짓으로 욕을 먹는 것에 가까웠다.
“아주 나쁜 놈들입니다!”
“그래. 연 판관. 그렇게 동창과 같이 일하는 게 좋았다니 여기 이렇게 오길 잘했구나. 네 재주를 조금 빌려볼까 생각했었는데.”
갓 판관의 자리에 오른 연우혁은 동창과 어울려서 좋을 게 없었다.
주 공공이야 좋게 봐준다지만 다른 당두들이나 환관들이 좋게 봐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무엇보다 한경의 관리들이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걱정이었다. 아마 연우혁이 역병 걸린 것처럼 쳐다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제 평판과 명성, 앞길을 위해 주 공공과 거리를 두고 싶습니다 헤헤’라고 말할 만큼 연우혁이 멍청하진 않았다. 오늘은 무조건 아부를 해야 하는 날이었다.
“너무나도 기쁩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이걸 받아라.”
주 공공은 서신 하나를 던졌다. 글자가 빼곡히 들어선 서신이었다.
연우혁은 그걸 훑어 내려가다가 하도 내용이 많아 그냥 영안을 열었다.
“읽으면서 듣도록 하거라. 장우촌에서 일어난 일인데, 거기 촌장의 고희(古稀) 축연에서 갑자기 촌장이 쓰러졌다는구나.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만 평소에 워낙 정정하던 자라 의심쩍었다.”
“혈교도와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맞아!”
주 공공은 가면 너머로 미소 지었다. 충성스러운 부하도, 무력이 뛰어난 부하도 그리 귀하지 않았지만 그녀 본인보다 똑똑한 부하는 정말로 귀한 존재였다.
“저주나 술법으로 사람을 주살(呪殺)하는 건 혈교도들의 장기지. 고관대작은 물론이고 무림인들까지 이런 촌락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사소하다고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진정 중요한 단서는 이런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저도 동의합니다.”
연우혁은 살짝 감명받았다.
다른 당두들은 관리들의 뒤를 캐서 협박을 하고 뇌물을 받는 동안, 주 공공은 그래도 혈교를 쫓아 남들은 관심도 가지지 않는 자질구레한 잡무까지 보고받는 것이다.
꽤 높은 자리처럼 보이는데 대단한 의기였다.
“하지만 이건 혈교도들의 짓이 아닐 겁니다.”
“어째서지?”
“보아하니 장우촌은 한 해 내내 서늘한 지하동굴이 있어 거기에 장빙고(藏氷庫)를 뒀다고 하는군요. 축연에는 거기에 있던 얼음을 꺼내 썼고 말입니다. 얼음 안에 독을 넣은 뒤 촌장에게 대접했겠지요.”
시간이 지나면 얼음이 녹고 독이 나오기 마련.
그러나 허 중관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이보게. 연 판관. 알다시피 이런 축연 자리에서 독살은 하기 힘드네.”
독의 고수라고 하면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간에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기 쉬웠지만, 독의 고수일수록 때와 장소를 가리기 마련이었다.
독이란 건 한 번 풀려나오면 피아를 가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독의 고수들이 제일 까다로워하는 상황이 이런 연회나 축연 자리였다.
얼핏 보면 식기나 잔에만 독을 타면 될 것 같지만, 이런 자리는 음식이 오고가느라 식기나 잔이 쉽게 바뀌고 독이 전염됐다.
촌장 옆에는 촌장의 친족들이 앉아 있었고 이들도 얼음이 깔린 음식을 같이 즐겼는데, 독살이라면 왜 이들은 멀쩡하단 말인가?
“그야 그들이 범인 아니겠습니까? 아마 무슨 문제가 생겨서 촌장을 죽이려고 결심했을 겁니다.”
“무, 무슨... 독은?”
“얼음이 녹기 전에 음식을 해치우면 그만입니다. 도중부터는 배가 부르다고 하면 될 테니 말입니다.”
주 공공은 깊게 생각하더니 허 중관에게 말했다.
“촌장의 시신을 검시해보라고 하도록.”
“예!”
“장우촌까지 갈 필요는 없겠구나.”
주 공공은 서신에 불을 붙여서 태워버렸다. 그리고는 다음 서신을 꺼냈다.
“읽어보도록!”
“예.”
“이 관리는...”
“이 관리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습격을 당했다는 건 거짓말일 겁니다.”
서신을 읽은 연우혁은 바로 설명에 나섰다.
젊은 관리 하나가 부임지로 가다가 캄캄한 밤에 도적떼를 만난 모양이었다.
이 관리는 사로잡힌 뒤 갖고 있던 물건들을 전부 빼앗겼지만 목숨은 건드리지 않아 도적떼가 떠난 뒤 간신히 포박을 풀고 탈출에 성공했다.
이것도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주 공공은 혹시라도 혈교가 관리의 증표나 문서를 훔친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한밤중에 도적떼를 만났는데 도적놈들이 도(刀)를 쓰는지 부(斧)를 쓰는지, 두건을 썼는지 안 썼는지 지나치게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도적들도 빼앗은 물건을 봤을 때 관리인 걸 알았을 테니 얼굴을 봤다면 죽였을 겁니다. 아마 관리가 어딘가에서 물건을 잃어버리고 가짜 도적을 만들었겠지요.”
“과, 과연!”
허 중관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생각해보니 굳이 가서 확인해보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듣고 나니 이렇게 당연한 걸 왜 스스로 못 떠올렸나 싶을 정도였다.
‘어엇?!’
감탄하던 허 중관은 주 공공을 쳐다보았다.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불만스러운 기색이 느껴졌다.
‘추측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허 중관은 방금 연우혁이 말한 것 중에 무슨 문제되는 게 있나 생각해봤지만,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제대로 일을 해냈던 것이다.
주 공공은 다음 서신을 꺼냈다. 또 다음 서신도, 다음 다음 서신도...
연우혁은 그 때마다 앉은 자리에서 해결해갔다. 허 중관은 그 때마다 감탄했고, 주 공공의 기분은 조금씩 안 좋아져갔다.
마지막 서신이 하나 남았을 때쯤 되자 연우혁도 눈치 챌 정도로 주 공공이 못마땅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제가 무슨 실례라도 저질렀다면 용서해주십시오.”
“아니... 잘 하고 있다. 그래. 오늘 이 자리에서 다 해결하면 좋은 일이지. 하. 우국지사가 따로 없구나.”
‘뭘 잘못한 거지?’
연우혁은 허 중관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허 중관도 짐작이 가지 않았는지 희미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마지막 서신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주 공공은 말하다 말고 멈춘 채 기다렸다. 연우혁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설명하기 전에 알 것 같으면 지금 말해도 된다. 이 자리에서 해결하면 좋은 일이니까!”
“이것만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서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아예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었지만 어떤 사건인지 확실하진 않아서 직접 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못마땅해하던 주 공공이 화를 내기라도 할까봐 연우혁은 눈치를 봤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 공공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래? 정말로?”
“예. 재주가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지금 해결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거다.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어느 판관이 이렇게 빨리 난관들을 해결할 수 있었겠느냐?”
“감사... 합니다?”
상대의 기분이 다시 좀 좋아진 것 같자 연우혁은 더욱 더 혼란스러워졌다.
‘조울증이 있나?’
“준비하도록 해라. 가서 직접 확인해볼 테니.”
주 공공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에서 나갔다. 연우혁은 허 중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제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습니까? 혹시 너무 잘난 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아니, 자넨 잘난 게 맞지. 으음. 나도 모르겠군그래.”
연우혁은 물론이고 허 중관도 지모로는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실로 진정한 난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