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96화 (96/107)

백성의 믿음직스러운 친구 동창 (2)

고민에 잠긴 채 밖으로 걸어 나오자, 궁 판관이 하급 관리와 이야기하는 게 보였다. 연우혁은 가볍게 목례했다.

“잠깐 와봐라.”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 이놈의 고충을 네가 좀 해결해봐라.”

궁 판관의 부름에 연우혁은 살짝 뿌듯함을 느꼈다.

판관이 다른 관리의 일을 해결해준다는 건 각종 민사에 끼어들어서 판결을 내려준다는 뜻. 당연히 궁 판관처럼 은자에 미친 새끼는 한 몫 챙길 기회였다.

그런 기회를 자신한테 양보해준다는 건 그만큼 연우혁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뜻이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어떤 일이길래?”

“그게 말입니다...”

하급 관리는 하소연을 시작했다.

한경에서 남쪽으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이 관리는 거기에 제법 큰 전답(田畓)을 갖고 있었다.

전답이 있으면 물을 대는 저수지와 보(洑)도 근처에 있기 마련. 이 시설은 농사에서 생각보다 중요했다.

그런데 작년부터 근처에 생긴 문파와 충돌이 생긴 것이다.

-여기 수당(水塘)은 우리 쪽에 더 가까운데 왜 네놈들이 멋대로 쓰는 것이냐?

-무슨 소리십니까? 분명 이 수당은 여기와 가장 가까운데...!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라!

문파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수준의 무관이었지만 마을에서는 제법 규모가 됐고 또 관주가 사업 수완이 있는 모양이었다. 전답의 주인이 관리라는 걸 알자마자 재빨리 한경에 뇌물을 바쳤다.

통판이나 판관 정도 되는 한경의 고관이면 모를까 일개 하급 관리들까지 챙겨주진 않는 것이다. 그 때부터는 그냥 누가 더 뇌물을 잘 바치나의 승부였다.

그리고 여기 이 하급 관리는 궁 판관이란 연줄을 붙잡은 게 분명했다.

“저런.”

“억울해 죽겠습니다. 똥물에 빠뜨릴 무림인 놈들! 국법이라고는 신경도 안 쓰는 화적떼 같으니라구!”

궁 판관은 이해한다는 듯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인 놈들만큼 귀찮은 도적떼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상황은 꽤 귀찮게 꼬였다.

원래 촌락의 농사와 관련된 문제는 예민한 문제라 권력자가 아니라면 잘 건드리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도 목숨이 걸린 만큼 결사저항할 가능성이 높은 문제였다.

즉 무관 관주가 ‘저 저수지는 우리에게 권리가 있고 이런저런 근거가 있습니다’하면서 열심히 뇌물을 바치면, 하급 관리 입장에서는 결정적인 반론이 없는 한 뒤집기 쉽지 않았다. 보기에 둘 다 논리가 비등하면 그냥 내버려두는 게 제일이었으니까.

연우혁은 가만히 듣다가 물었다.

“무관 쪽 전답이 원래는 더 멀었습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맞습니다!”

만약 상대 관주가 사들인 전답이 원래 더 가까웠다면 억울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나 관리가 알기로 관주가 사들인 전답은 원래라면 저수지에서 더 먼 전답이었다.

궁 판관이 옆에서 말했다.

“아마 저번에 잘못 쟀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진 거겠지. 흔한 일이다.”

땅이 가만히 있는데 거리가 바뀌는 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원래 측량 기술이 형편없으면 잴 때마다 거리가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궁 판관은 어제 잰 길이가 오늘 달라지고 하는 일을 몇 번이고 봐왔기에 하급 관리의 억울함에 크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상대 관주의 땅이 원래 더 가까운 걸 지금 알아챘을 가능성도 높은 것이다.

“전답도 그렇고 못도 아마 마을에서 꽤 떨어져 있을 텐데, 거리를 어떻게 잽니까?”

“마을 밖에 관개비(灌漑碑)가 있습니다. 마을의 자랑 같은 거라 아직도 잘 관리가 되고 있지요. 그게 표식이라 거기서부터 출발해 거리를 잽니다. 서쪽으로 쭉 가면 전답들이 나오지요.”

“침반(針盤)으로 방향을 재고 가겠지요?”

“예. 당연히. 측량하는데 방향은 잡아야 하잖습니까.”

“다음부터는 측량할 때 옆에 있는 사람의 소매 안을 확인해보십시오. 아마 지남철(指南鐵)을 넣어서 방향을 틀었을 겁니다. 그러면 걷는 길이가 늘어나지요.”

“...?!”

생각치도 못한 말에 하급 관리는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런...?!”

“보아하니 꽤 오래된 전답 같은데 길이가 갑자기 달라지는 건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이상합니다. 속임수일 텐데, 관개비를 보고 서쪽으로 걸어가는 식이라면 방향을 조금만 틀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하급 관리는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것마냥 감사해하며 물러났다. 연우혁은 궁 판관을 보며 말했다.

“다행히 잘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궁 판관은 흡족해하는 대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 말부터 해줬어야 했는데!”

“예? 그게 무슨...”

“내가 저 사건을 청탁받은 게 얼마 전인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일 년 전이다.”

“예...?”

일 년 전에 부탁을 받은 게 뭐가 중요한 건가 싶어서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궁 판관은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외쳤다.

“나는 일 년 동안 그 핑계로 은자를 계속 받아냈단 뜻이다!”

“......”

그제야 말뜻을 이해한 연우혁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미친 놈 아닌가?’

“그걸 저렇게 한 번에 해결해버리다니. 아니다. 네가 저런 문제도 한 번에 해결해버릴 줄 몰랐던 내 잘못이지!”

“하, 하지만 판관 어른. 같은 관리인데 그렇게 일부러 기간을 늘리는 건 조금... 가혹하지 않습니까?”

“나는 내 일을 하는 것뿐이다. 저 녀석은 저 녀석의 일을 하는 것뿐이고.”

누가 들으면 판관의 업무가 일 년 동안 동료 관리한테 은자 뜯어내는 거라고 생각할 당당함이었다. 연우혁의 말문이 막힌 사이 궁 판관은 마저 설명했다.

“저 녀석은 사사로 일하고 있는 만큼 이 근처의 식량을 관리하고 점검할 거다. 가서 열어보면 알겠지만, 아마 절반 정도는 모래가 섞여 있을 거다. 저 녀석부터 저 녀석의 전임자까지 야금야금 챙겨갔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걸 핑계로 저 녀석의 은자를 갈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럼 녀석도 내 힘을 빌릴 때는 마땅히 대가를 지불해야지!”

“아... 예...”

“행여라도 저 놈을 가엾게 생각하지 마라.”

궁 판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연우혁의 성정을 어느 정도 아는 만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것이다.

“저 놈이 마을 사람들에게 잘 대해줬다면 온 지 얼마 안 되는 무관 놈들 편을 들어줬겠느냐? 아마 무관 놈들도 처음에는 물값을 내겠다고 했을 것이다. 객지에 온 놈들이 무슨 배짱으로 횡포를 부렸겠나? 하지만 저 놈은 거절했지. 자기 전답밖에 모르는 놈이니까. 그래서 무관 놈들이 마을 사람들과 손을 잡은 거다. 마을 사람들도 원한이 있으니 도와준 거고.”

“...!”

연우혁은 궁 판관의 안목에 감탄했다.

사건이 어떻게 굴러갔는지는 몰라도, 궁 판관은 오랫동안 판관으로 일한 사람답게 전후관계로 정확한 짐작을 하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안목이었다.

그 안목으로 자기 돈벌이에만 집중해서 그렇지만...

“그런 사연이 있었다면 괜히 알려준 것 같습니다.”

“됐다. 어차피 달라질 건 없으니까.”

“?”

“저 놈은 멍청해서 알려줘도 못 쓴다. 아마 지남철을 꺼내려고 할 텐데, 마을 사람이나 무관 놈들이 없앤 다음 증좌가 어딨냐고 하면 어쩌겠느냐. 게다가 지부 어른은 이미 무관 관주 편을 들어준 적이 있다. 체면이 있는데 바로 말을 바꾸시진 못하지. 저 놈도 그걸 깨달으면 포기하고 무관 놈들과 타협할 거다. 무관 놈들도 찔리는 구석이 있을 테니 적당히 양보하겠지.”

“판관 어른께서는 정말 대단한 명판관이십니다!”

“족히 일 년은 더 받을 수 있었는데 무슨 명판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냐!”

“예...”

괜히 아부했다가 욕만 먹은 연우혁은 입을 다물었다.

‘아. 맞아.’

뒤늦게 동창의 일이 떠오른 연우혁은 입을 열었다. 공공연히 자랑할 일은 아니었지만 자리를 비우는 만큼 궁 판관에게는 말해두는 게 나았다.

“판관 어른.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울 일이 생겼습니다.”

“마음대로 해라.”

원래 마음대로 하면 안 되고 엄연한 규율이 있었지만 궁 판관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판관이란 직위는 핑계를 붙이려면 얼마든지 붙일 수 있어서 백 리 밖의 강산을 유람하고 와도 괜찮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갔다 왔다고 하면 누가 뭐 어쩐단 말인가.

“잠깐. 설마 또 거지 놈들 돕나?”

“개방 말입니까?”

“개방 놈들은 의외로 돈을 낸다. 그보다도 못한 놈들이 수두룩하지. 저번의 정 거사 같은 놈들 말이다.”

“아.”

“그런 놈들은 밑 빠진 독이라고 생각해라. 한 번 잘 해주면 계속 징징대는 놈들이지. 문제를 해결해줬으면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들끼리 해결을 봐야지, 이리 와달라, 저리 와달라... 이런 곤장을 쳐도 모자랄 괘씸한 놈들 같으니!”

궁 판관이 싫어하는 부류 중 하나가 한경 밖의 호족 가문들이었다.

호족이면 차라리 낫지 재산도 별로 없는 주제에 가문의 명성만 믿고 ‘판관이 와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하면 뇌옥에 가둬버리고 싶었다.

“정 거사가 거지는 아닙니다만... 그리고 그 분 아닙니다. 동창에서 중관들이 나오셨는데, 일을 좀 도와달라고 하셨습니다.”

“동창에서?”

“예. 그래서 얼마 동안은 한경 밖에 나가있을 것 같습니다.”

궁 판관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있었다.

그러다가 한숨을 쉬더니 자신이 쓰는 별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 판관은 상자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가슴팍에 댔는데도 비틀거리는 걸 보니 꽤나 무거운 모양이었다.

“네 녀석이 재산을 모았을 리는 없고, 이걸 갖다 바쳐라!”

“이게 뭡니까?”

연우혁은 의아해하며 상자를 열었다. 열자마자 안에서는 눈부신 은빛이 가득 뿜어져나왔다.

놀랍게도 이 커다란 상자에 묵직한 은덩어리가 가득 들어가 있었다!

“이, 이건...?”

은도 놀라웠지만 이걸 궁 판관이 줬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은을 내놓을 바에는 죽음을 선택할 사람 아닌가.

궁 판관은 동창에 대한 증오심을 눈동자에 드러내며 씹어먹듯이 말했다.

“그거라도 바쳐야 네 녀석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다.”

“판, 판관 어른...!”

연우혁은 살짝 감동했다.

궁 판관이 이렇게 챙겨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만난 중관들은 이런 재물에 크게 관심이 없으신 분들이었습니다.”

“...닥치고 그냥 가져가기나 해라!”

안 그래도 속이 쓰린데 젊은 판관 놈이 헛소리를 자꾸 해대자 열이 받은 궁 판관은 빽 고함을 질렀다.

저 놈은 대체 동창을 뭘로 생각한단 말인가?!

***

“자네, 무슨 고민이 있나?”

허 중관은 연우혁을 보며 물었다.

젊은 판관답지 않게 고민하는 기색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게 말입니다...”

연우혁은 이번 일을 돕기 위해 궁 판관에게 전후를 밝혔고, 궁 판관이 잘 부탁한다고 은자를 맡긴 것까지 말했다.

“판관 어른께서는 성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은데, 이걸 전해드려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아하.”

허 중관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자기가 몰래 챙겼다면 탐욕스러운 놈이었고 아무 말 없이 바쳤다면 상대를 볼 줄 모르는 멍청한 놈이었다.

그러나 진충비도는 둘 다 선택하지 않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직하게 밝히는 길을 택했다. 욕심을 버리는 건 물론이고 지혜가 없다면 하기 힘든 처세였다.

“잘 말해줬네. 주 공공께서는 그런 뇌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시지. 바쳤다면 실망하셨을지도 모르네.”

“과연. 주 공공께서는 실로 공명정대하고 지공무사한 분이시군요.”

“자네는 참 망설이지도 않고 그런 말이 잘도 나오는군.”

허 중관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감탄했다.

환관들도 저렇게 아부가 줄줄 나오지는 못할 것 같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그렇군... 하여간 그 은 덩어리는 자네 갖게.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이 되겠군.”

“!”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그걸 그냥 챙기라니.

‘...아, 아니. 걸리면 뒷감당이 어렵겠지.’

만약 궁 판관한테 들키기라도 한다면 정말 궁 판관을 죽여야 할지도 몰랐다. 궁 판관의 집념은 연우혁도 오싹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돌려주면서 은 덩어리 하나만 어떻게 받을 수 없나 생각하며 연우혁은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서 가마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마를 멘 사람들은 모두 다 동창의 환관들이었는데, 각자 다 무공을 익힌 덕분에 그 움직임이 빠르고 안정되어 있었다.

“오셨군!”

-오래 기다렸나?

가마 안에서 주 공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혁과 허 중관은 동시에 대답했다.

“아닙니다.”

-다행이구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여기 이 진충비도가 쓸데없는 선물을 갖고 오려다가 말았는데, 잘 했다고 칭찬하고 있었습니다. 공공.”

-......

가마 안에서 침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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