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97화 (97/107)

백성의 믿음직스러운 친구 동창 (3)

‘뭐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연우혁은 방금 대화에서 실수가 있었나 고민했다.

혹시 주 공공은 뇌물을 받고 싶었던 건가?

-무슨 선물?

“한경의 관리들이 성의를 보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선물이라기보단 뇌물이지요.”

-아아.

허 중관의 설명에 주 공공은 그제야 목소리에 담긴 예기(銳氣)를 풀었다.

-뇌물은 필요 없다. 나랏일을 보는 자라면 무릇 받는 것도 주는 것도 부끄러워해야 하겠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잘 거절했다.

주 공공은 가마 안에서 출발하라고 명령했다. 연우혁은 허 중관 옆에 있는 말 위에 올라탔다.

“혹시 제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겠습니까?”

“흐음.”

허 중관은 가짜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 가짜 수염은 동창의 환관들이 위장을 위해 사용하는 역용술 중 가장 기초적인 것이었다.

이렇듯 동창의 일이란 건 대부분 비밀스러운 것이라, 금의위와 달리 오고 가면서도 신분을 밝히지 않고 끝낼 때가 많았다.

“먼저 동창인 걸 들키면 안 되네. 이건 당연히 알고 있겠지?”

“예.”

“동창의 이름이 필요할 때는 당연히 밝히겠지만, 주 공공께서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죽더라도 밝히면 안 되네. 저 뒤의 이들이 죽더라도 개의치 말게. 나는 지금 청오표국의 허팔달일세. 주 공공은 명문세가의 규방규수시고.”

“청오표국, 허팔달, 규방규수. 예. 기억했습니다. 주 공공께서는 여인이신 거죠?”

“...어? 뭐라고 했나?”

“주 공공께서는 여인으로 위장하신 거냐고...”

허 중관이 당황하자 연우혁은 자신이 너무 무례한 말을 했나 싶었다. 동창의 환관이라면 좋아서 여인으로 위장하는 게 아닐 텐데 그걸 굳이 다시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아. 그렇지. 아무래도 그게 편하거든.”

“주 공공께서는 이런 위장을 싫어하십니까?”

“으음. 아니. 신경 쓰지 않으실 걸세. 방금은 잊어버리게.”

허 중관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연우혁은 믿지 않았다. 허 중관이 당황한 기색이 영안으로 잡혔던 것이다.

‘역린일 수도 있겠군. 여인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괜히 언급하지 말아야겠다.’

“신경 써야 할 다른 점들은... 사교와 엮이지 않은 일이라면 쉽게 처리해도 되지만, 사교와 엮인 일이라면 바로 처리하지 않고 기다려야 할 수도 있네.”

“더 큰 정보를 얻기 위해서군요.”

“그렇지!”

허 중관은 믿음직스럽다는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한 번 같이 일을 한 적이 있는 만큼 일머리가 괜찮았다.

보통 인근의 벼슬아치들은 일을 제대로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괜히 나섰다가 책임이라도 질까봐 꼬리를 말고 눈치만 보는 것이다.

녹봉을 먹는 놈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한심했지만 사실 관리들은 원래 그랬다. 진충비도 같은 경우가 희귀한 거였다.

“예외적인 상황이 있는데, 그건 아주 드무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어떤 상황입니까?”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이 일을 해결하러 왔을 때인데, 보통 그런 일이 많지 않지.”

으슥한 마을에서 괴상망측한 일이 생긴다고 해서 사람들이 쉽게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심지어 그 마을을 다스려야 하는 관리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끔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해결을 하러 오는 이들이 있는 법.

협행을 하러 나선 무림인이나 주변을 돌다가 우연히 소문을 들은 순안어사, 혹은 머리는 나쁘지만 운이 좋아서 들린 금의위 등이 있었다.

“음. 그렇군요.”

금의위 욕은 대충 걸러듣고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림에서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누가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더 중요할 때가 많았다.

거의 대부분 정답을 알고 있는 연우혁도 그걸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훨씬 더 고민을 해야 했었으니까.

“그보다 일에 대해서 짐작가는 건 좀 있나?”

“몇 가지 있긴 합니다만, 직접 가서 본 다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최근 제남 인근에서는 고명하고 법력 높은 대사(大師), 홍목대사가 명성을 높이고 있었다.

원래 어느 시대든 지역에 명성 높고 도력이나 법력 높은 도사나 스님 한 명은 있기 마련.

이 사람이 사이비든 진짜든 동창이 일일이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설령 사이비라 하더라도 하찮은 약장수 같은 놈을 다 잡아낼 만큼 동창이 한가하진 않았으니까.

문제는 이 홍목대사가 꽤나 대단한지 주변의 거상들이나 관리들도 법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거기까지도 아슬아슬하게 괜찮았지만 그 뒤가 주 공공의 심기를 거슬렀다.

“제대로 확인한 게 맞겠지요? 현령이 동시에...”

“몇 번이고 확인했네.”

법회에 참가한 관리들 중에는 인근의 현령도 있었다.

원래 이런 법회는 체면이 있는 만큼 눈치껏, 적당히 참가해야 하는데 이 현령은 대사한테 홀딱 빠졌는지 꽤 노골적으로 참가한 모양이었다.

정무에 몰두해도 모자랄 판에 자꾸 법회에 참가해서 관아의 돈을 바쳐대니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소문을 들은 동창의 간자들도 확인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령이 두 자리에서 동시에 발견된 것이다.

분명 법회에 참가했다고 증언이 올라왔는데, 동시에 관아에서 관무를 보고 있다는 증언도 올라왔다. 주 공공은 현령이 무슨 술법을 부린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술법을 부렸다면 가장 연관되기 쉬운 건 역시 혈교 같은 사교(邪敎)였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재주도 좋군.’

연우혁은 솔직히 좀 놀랐다.

저런 식으로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불가능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손이 많이 들어가고 지혜가 필요한 방법들이었다. 법회 하나 보자고 하기에는 수지가 맞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혈교와 관련되어 있고 현령의 부탁에 혈교가 술법을 빌려준 걸지도 몰랐다.

“싸움이군.”

“!”

허 중관이 앞을 보며 말했다. 가마를 메고 있던 가마꾼 환관들은 재빨리 가마를 내려놓고 싸움을 대비했다.

다행히 앞에서의 싸움은 목소리와 살기만 요란했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 중관은 목소리에 묵직하게 내공을 담아 외쳤다.

“여긴 청오표국의 허 모요! 대낮에 관도에서 이렇게 싸움을 일으키다니. 그대들은 도적떼요?”

살벌하게 외치던 두 무리의 사람들은 새로 나타난 자들을 보고 멈칫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이 일순 풀린 것이다.

“대낮에 흉한 꼴을 보여드린 건 사과드리겠소. 그러나 이 자들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서 어쩔 수 없었소.”

“우리가 할 소릴! 이 작자들이 정말!”

“그만! 싸울 거면 싸우시오. 하지만 이 허 모는 결코 방금 본 일을 잊지 않을 것이오. 어느 누구든 간에 관에서 부른다면 그 책임을 지게 될 거요!”

단호한 압박으로 상대의 기세를 순간 끊은 허 중관은 압박을 풀고 슬며시 물었다.

“말해보시오. 대체 무슨 일이오?”

“우린 위의상단의 사람들이오. 상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저 자들의 마차가 보였소. 보아하니 마차의 굴대가 부러졌다더군! 도와달라고 부탁하길래 도와줬소.”

“도와주긴 무슨! 저 자들이 먼저 도와주겠다고 다가왔소.”

상단의 사람들이 하는 말에 마차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발끈했다.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도와주겠다고 자꾸 다가오더군. 그러더니 마차 굴대를 만지면서 안을 뒤지려고 하지 않소! 당연히 화를 낼 수밖에 없지!”

“누명도 이런 누명이 없군. 부러진 굴대를 고쳐주려고 했는데 이런 꼴을 당할 줄이야!”

상단을 이끄는 사람은 허탈한 표정으로 한탄했다.

둘의 말을 들은 허 중관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위의상단이 좀 더 믿음직스럽다.’

상황을 보면 저기 마차를 몰고 온 사람들이 괜한 누명을 씌웠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일단 위의상단은 상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이들이었지만, 저들은 별다른 목적 없이 여행을 하고 있다고만 밝히고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행객치고는 그 숫자와 짐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상단 입장에서 저 마차 안을 굳이 뒤질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도적이나 흉흉한 꿍꿍이를 갖고 있는 자들이 마차 굴대가 부러졌다고 끌어들였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잘못은 상단 사람들이 했습니다.”

“?!”

예상이 빗나가자 허 중관은 깜짝 놀랐다.

“그런가? 어째서? 어떻게 알았나?”

“그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니? 그럼 뭐가 중요하단 건가?”

“저기 저 상단 놈들은 금의위고 저 마차 놈들은 무림인들 같습니다만...”

“...!”

* * *

“어떻게 알았지?”

보고를 들은 주 공공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

가마 안에서 드리운 발을 치우고 봤을 때 상단이든 마차든 특별하게 수상한 점은 없었다. 직접 이야기를 나누거나 계속 행동을 관찰했다면 모를까 그냥 보는 것만으로 알아차리는 건 힘들어보였다.

그렇다면 과연 이 판관은 무엇을 근거로 상대의 신분을 파악했단 말인가?

“저들은 상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만, 그런 것치고는 마차 안에 지나치게 물건이 많았습니다.”

“물건을 판 뒤 새 물건을 사들였을 수도 있지.”

“예. 그러나 그런 여행이었다면 말들이 좀 더 지쳐있어야 합니다. 말들의 갈기에서는 윤기가 흐르고 눈빛은 빳빳하니,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상행은 위장이었다는 뜻이겠지요.”

허 중관은 자리도 잊고 탄성을 내뱉을 뻔했다. 같이 옆에서 봤는데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부끄러울 뿐이었다.

가마꾼 노릇을 하던 환관들도 연우혁의 말이 흥미로웠는지 웅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니 수상하다고 생각해서 복장을 눈여겨봤습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은 평범해보이도록 칼집을 만들어놨지만, 거기에 달린 장식은 숨기지 않았더군요. 금의위 무인이 하고 다니는 패용 장식이었습니다.”

저번에 만났던 하 교위면 모를까 저 눈앞의 금의위 무인은 조금 허술한 면이 있었다.

검도 완전히 숨기는 대신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장식을 조금이나마 남겨놓은 것이다.

덕분에 연우혁은 보자마자 상대가 금의위 출신이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훌륭하구나! 벌써 데려온 보람이 있다.”

주 공공은 유쾌하다는 듯이 웃으며 재촉했다.

“그럼 저 마차 놈들은? 저 놈들 중에 무공을 익힌 놈들이 있다는 건 허 중관도 느꼈을 거다. 하지만 호신으로 익혔거나 보표일 수도 있을 텐데? 왜 무림인이라고 말한 거지?”

“금의위의 태도 때문에 알 수 있었습니다.”

연우혁은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금의위가 신분을 숨기고 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건 해야 할 일이 있어서인데, 저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가며 마차를 뒤지려고 하는 건 상대에게 그럴 이유가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마 마차 굴대도 저들이 부러뜨린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러진 흔적이 인위적입니다.”

“그 이유는?”

“저희와 비슷한 목적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주 공공은 흡족해하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저 무림인 놈들이 자체적으로 조사를 한 모양이구나. 금의위 놈들은 그걸 탐내는 모양이고. 마차 안을 뒤져볼 수 있겠느냐?”

“충분히 가능합니다.”

허 중관은 맡겨만 달라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저기 무림인이나 금의위의 무리들이 투닥거리고 있었지만, 허 중관은 다른 환관들을 데리고 제압할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이들의 무공과 합격진은 저 정도 이들로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다. 힘을 쓰지 말고 조용히 해결하자꾸나. 말로 해결할 수 있겠나, 연 판관?”

“저 말입니까?”

연우혁은 고민에 잠겼다.

확실히 무림인들이 마차 안에 뭘 숨겼는지 궁금하긴 했다. 괜찮은 정보라면 이번 사건과 관련되어서 훨씬 빠르게 일을 진척시킬 수도 있었다.

문제는 말로 해결할 수 있느냐였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다.”

주 공공은 물론이고 환관들까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연우혁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과연 저 판관이 조용히 해결할 수 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사건의 전후를 맞히는 건 지혜로 됐지만, 저렇게 경계심을 곤두세우고 있는 자들까지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말도 안 되오!

-진실이오...

이야기를 끝낸 무림인들은 눈에 분노한 기색을 담고서 외쳤다.

“감히 살수가 우리의 짐을 노리다니. 누구의 의뢰를 받은 것이냐?! 역시 사교의 의뢰를 받은 것이냐!”

“뭐... 뭐? 살수라니. 무슨 소리요?”

“닥쳐라! 네놈들이 상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는 건 이미 파악했다. 그렇게 긴 거리를 뛴 말이 저렇게 건강할 리 없지!”

“아, 아니...!”

주 공공은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 중관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렇게 즐겁게 웃으시는 건 처음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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