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믿음직스러운 친구 동창 (4)
설득에 넘어간 무림인들이 살기를 노골적으로 뿜어내자 금의위 무인들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재빨리 경공을 펼쳐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무림인들이나 정체불명의 표사들이 괘씸하긴 했지만, 여기서 싸워봤자 정체만 드러낼 가능성이 있는 만큼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두고 보자!”
“멍청한 놈들 같으니!”
금의위들은 빠르게 멀어졌다. 그 모습에 무림인들은 더더욱 확신을 가진 모양이었다. 상단의 인원들이 전부 다 무공을 익힐 수는 없는 것이다.
“살수가 맞았군!”
“쫓겠습니다!”
“기다려라. 짐을 지키는 게 우선이다! 살수 놈들이 짐을 노린 거라면 더더욱.”
다른 이들보다 나이가 조금 있는 무림인 하나가 말리자, 다른 무림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추적을 멈췄다. 연우혁은 그 모습에서 상대방이 꽤 이름 높은 문파 출신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저런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며 같이 호흡을 맞춘 무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했고, 그런 무인들은 보통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정도는 되어야 볼 수 있었다.
세가 특유의 사치스럽거나 과시하는 듯한 복장이 없는 걸 보니 아마 구파일방일 가능성이 높으리라.
그리고 인근 지역을 생각해보면 구파일방 중에서도...
“종남파의 무인이로구나!”
가마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종남파의 무인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놀라움이 끝나자 경계심이 올라왔다.
무인들은 경계심 섞인 눈으로 가마를 쳐다보았다.
“...누구시오?”
“그렇게 경계하지 마시오. 수상한 뜻이 있었다면 아씨께서 종남파의 무인이라는 걸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우린 청오표국에서 나왔고, 나는 허팔달이요. 믿지 못하겠다면 얼마든지 연통을 넣어서 알아봐도 좋소.”
허 중관의 태도가 워낙 당당한데다가 방금 연우혁이 살수의 습격도 알려준 만큼, 종남파의 무인들은 경계심을 줄이고 자신의 신분도 밝혔다.
“...종남의 장등원이라 합니다.”
삼십 중반은 된 것 같은 무인이 입을 열었다. 아까 다른 젊은 무인들을 말리는 걸 봤을 때 이 무인이 조장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름을 밝히자 허 중관은 감탄했다.
“청불검(靑佛劍) 장등원! 장 대협을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이야!”
“허명일 뿐입니다... 그보다 우리가 종남에서 나온 걸 어떻게 아셨는지 말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장등원의 태도는 공손했지만 그 안에서는 쉽게 물러나지 않을 단단한 심지가 느껴졌다. 과연 구파일방 출신의 무림인이었다.
가마 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수들이 접근한 걸 알아차린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알아챘다.”
“예?”
“무림에서 너희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협행을 하고 있으니 사파는 아닐 것이고, 복장이 검소하니 오대세가 또한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구파일방일 텐데, 이 근처에서 보일 문파는 종남과 화산뿐.”
“...!”
종남파의 무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경계심을 낮추고 감탄의 눈빛으로 가마를 쳐다보았다.
“화산파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가 매화를 달고 있지는 않지만, 잠행을 할 때에는 화산의 무인들도 매화를 숨깁니다.”
“화산의 무인이라면 염주(念珠)를 차고 있지 않겠지.”
“!”
장등원은 자신이 차고 있는 염주를 깨닫고 전율했다.
완전한 도가 문파인 화산파와 달리 종남은 도가의 무공이든 불가의 무공이든 가리지 않고 실용적으로 익히는 문파였다.
장등원의 별호 또한 도가 무공과 불가 무공을 같이 익혔기에 얻은 별호 아니던가.
하지만 그 사실과 염주만으로 정체를 알아차리다니. 과연 강호는 넓고 기인이사는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살수 집단의 접근을 알아차린 것도 저 가마 안에서 나온 지혜리라.
“저 분은 누구십니까?”
“신분을 밝힐 수 없소. 귀한 분을 모시고 가는 길이라.”
허 중관은 당당하고 오만한 자세로 말했다.
무림에서는 때때로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위세를 부리는 게 더 효과가 좋았다. 표국의 표사들이 이렇게 쩔쩔매는 걸 보면, 무림인들은 귀한 신분인가보다 하고 알아서 판단하는 것이다.
실제로 종남파 무인들은 알아서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사해가 동도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종남의 의기는 강호에 그 이름이 높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셔도 좋소. 부러진 굴대 같은 것 말이오.”
종남파 무인들은 어지간히 곤란했는지 반색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오. 여봐라. 남는 물건이 있나 찾아 보거라.”
표사로 위장한 환관들이 쓸만한 물건을 찾는 동안 연우혁은 종남파 무인들이 지키고 있는 마차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장등원이 물었다.
“왜 그러시오?”
“마차 안에 뭐가 들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소?”
“...서책이오. 양이 꽤 많지.”
장등원은 그 이상은 말해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 인근에서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리가 있는데, 이들과 결탁한 곳을 뒤져 장부를 싹 긁어낸 것이다.
뒤지는 데에 시간이 꽤 걸릴 테지만 꼭 필요한 일인 만큼 남들한테 알려줄 수 없었다. 게다가 살수들이 찾아온 걸 보니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연우혁은 물러서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중요한 물건인 것 같소.”
“...그렇소만.”
“그러면 조금 더 조심해서 지켜야 할 것 같소. 지금은 누가 들어가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으니.”
“무슨...?”
장등원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차의 문들은 단단히 잠겨 있었고 열쇠 또한 본인이 갖고 있었다. 수레 목적으로 쓰고 있는 만큼 창도 덧대서 빈틈이 없는데 누가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아까 굴대를 고쳐주겠다고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았소?”
“그렇긴 했지만, 문은 열리지도 않았고 그들이 건드리지도 못했소. 누가 어떻게...”
“그렇겠지.”
연우혁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돌멩이를 들어 마차 아래를 향해 던졌다.
딱딱한 나무와 부딪치는 소리 대신 뭉툭한 소리가 났다.
-윽!
“?!”
욕설과 함께 마차 바닥에 딱 붙어있던 금의위 무인 하나가 튀어나왔다. 종남파 무인들은 자신들이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경악해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비켜라!”
먼저 반응한 건 환관들이었다. 환관들은 재빨리 포위망을 만든 뒤 금의위 무인을 덮쳐들어갔다. 일개 표사라고 생각해 정면돌파를 하려던 무인은 생각보다 훨씬 엄중한 기세에 경악했다.
‘무슨...!?’
“이 살수 놈!”
“커헉!”
금의위 무인의 손발이 어지러워지자 허 중관이 벼락 같이 출수했다. 얕보고 있던 표사들의 무공에 당황하던 금의위 무인은 그대로 제압당했다.
연우혁은 종남파 무인들을 보며 말했다.
“애초에 이 살수들은...”
“살수가 아니다. 제기랄!”
“...문을 열 생각이 없었소. 종남파의 무인들이 눈을 크게 뜨고 있는데 어떻게 문을 열고 들어가겠소. 그저 시선을 끈 다음 한 명을 아래에 남길 생각이었겠지.”
“이... 이런 비겁한 살수 놈들!”
종남파 무인들은 살수들의 교묘함에 경악했다.
청불검은 허 중관을 보며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장 모가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무림의 귀계가 무섭다는 걸 오늘 다시 한 번 배웠습니다.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당했을지...”
“그, 그렇지. 무림의 귀계가 참으로 무섭소.”
‘말이나 좀 해주고 할 것이지...’
허 중관은 놀란 가슴을 속으로 쓸어내리며 연우혁을 원망했다.
금의위 놈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면 언질이나 주고 할 것이지 저렇게 대뜸 움직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저 젊은 판관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악취미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이 살수는 우리가 심문하겠소. 인근을 돌아다니는데 이런 살수가 있다는 건 우리도 그냥 넘기기 힘들군.”
“으음...”
장등원은 망설였다.
저 살수를 조사하면 그들이 찾는 수상한 무리의 비밀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저 표국 무인들에게 도움을 받은 게 너무 많았다.
“혹시 심문한 결과를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오!”
허 중관은 인자하게 웃었다. 이 환관은 어느 누구든 신뢰할 수밖에 없는 넉넉한 인상을 갖고 있었다. 종남파 무인들도 자신도 모르게 넘어가버렸다.
그 모습에 연우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소싯적에 연쇄하물절단을 하고 다녔단 말인가?’
* * *
“네놈이 누구를 건드리고 있는 줄 아는 것이냐?”
“놈. 우린 동창이다.”
“...살, 살려만 주십시오! 정 교위가 시킨 겁니다! 금의위 정 교위! 그 놈이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목을 자르겠다고 협박을 해대서!”
마차 밑에 붙어 있던 금의위 무인은 교위가 아니라 무림에서 고용된 자였다. 사파 출신으로 나름 신투라고 자부할 만큼 재주가 있었지만, 금의위 교위한테 붙잡혀서 일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원래라면 금의위의 위세를 믿고 역으로 성을 냈겠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동창이었다. 무인은 동창의 이름을 듣자마자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애걸복걸했다.
“살려주십시오. 아니, 차라리 그냥 편하게만 죽여주십시오.”
“이보게. 우리가 그렇게 악독한 사람 같나?”
“예...”
“......”
“......”
연우혁과 허 중관이 어이가 없어 말이 멈추자 그제야 무인은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대인! 대인!”
“됐고. 알고 있는 것만 말하게. 그럼 편히 죽이든 편히 살리든 해줄 테니.”
허 중관은 바늘을 꺼내 탁탁 두드렸다. 그러자 무인은 겁에 질려서 알고 있는 걸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금의위도 홍목대사와 그 무리가 혈교나 혹은 다른 사교 무리 아닌지 의심을 하고 있다 이건가?”
“예... 들어보니까 꽤 덩치가 크던데요...”
고명한 홍목대사는 검소한 행색을 하고 있었고, 머무르는 사찰의 크기도 그리 크지 않았지만, 엮인 무리의 크기는 생각보다 제법 되는 모양이었다.
절에 바친 돈을 옮기는 놈들부터 시작해서 소문을 내는 바람잡이들 등 결코 깨끗한 사람이 아닌 건 확실했다.
허 중관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그냥 잡아다가 심문해도 될 것 같은데...”
이쯤이면 혈교와 엮인 사이비거나 혈교와 엮이지 않은 사이비거나 차이밖에 없어보였다. 그리고 후자여도 별로 억울하지는 않으리라.
“그, 저한테 일을 맡긴 정 교위가 그랬습니다. 아무리 수상해보여도 증거 없이 저런 스님을 끌고 갔다가는 관리들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고요.”
“그건 그렇긴 하지.”
“무식한 동창 놈들이라면 모를까 금의위는 다르다고...”
“......”
“......”
환관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첩자를 쳐다보았다. 첩자는 뒤늦게 깨닫고 굽신거렸다.
“살, 살려주십시오!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음. 자네는 참 용케도 살아있군그래. 그래서 그 증거가 저 마차 안에 있다는 건가?”
“예... 장부를 뒤지면 어느 세력이 지원하는지 나올 거라고 정 교위가... 근데 아마 힘들 겁니다.”
“왜지?”
“종남 놈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암호로 되어 있나 봅니다.”
“하여간 머리는 쓸데없이들 쓰는군.”
허 중관은 귀찮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근처에 똑똑한 유생이나 서생을 찾아가 일을 맡기면 되겠지만 시간이 낭비되는 게 거슬렸다.
“저. 중관 어른.”
“왜 그러나?”
“아까 신통력으로 마차 안에 있는 장부 확인했습니다만...”
“암호는?”
“그것도 풀었습니다.”
어차피 영안이 있는데 암호는 별 의미가 없었다.
허 중관이 경탄하는 동안 붙잡혀 있던 무인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저 놈은 대체 뭐하는 놈이란 말인가??
* * *
상황을 대충 마무리 짓자 허 중관은 주 공공의 허락을 받은 뒤 종남파 무인들에게 신분을 밝혔다.
“사실 우린 동창의 무인일세. 홍목대사가 수상해서 조사를 하고 있었지. 이제 우릴 돕게.”
“......”
“......”
종남파 무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지만 허 중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들을 재촉했다. 갈 길이 바빴던 것이다.
장등원은 멍한 얼굴로 물었다.
“어딜 가는... 겁니까?”
“황수장(黃手莊)에 가네. 홍목대사의 일을 도와주더군.”
“황수장!”
장등원은 깜짝 놀랐다.
어딘가 수상쩍은, 사파의 무리들이 세운 장원 아닌가 생각하긴 했었는데 홍목대사와 엮여 있었다니!
“그 놈들이... 그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자네들이 갖고 있는 장부를 읽어봤네.”
“언, 언제 어떻게 말입니까?? 그리고 암호가...”
그 때 마침 가마 안에 있던 주 공공이 허 중관을 불렀다. 허 중관은 가기 전 연우혁에게 손짓해서 오라고 했다.
“자. 저 친구가 다 했으니 알아서 물어보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