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믿음직스러운 친구 동창 (5)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허 중관은 가마 앞에 서서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뒤에서는 장등원이 진충비도에게 온갖 질문을 던지며 귀찮게 하는 게 보였다.
“군병을 불러놓는 게 좋겠다.”
“!”
근처 위소(衛所)의 장수와 병사를 불러서 대기시키겠다는 말에 허 중관이 놀라워하는 기색을 내보였다.
물론 병사들을 쓰면 훨씬 편했다. 동창 환관들의 무공이 뛰어나다지만 이들은 원래 싸움을 좋아하기보다는 아랫사람한테 시키는 걸 더 좋아하는 자들이었다. 병사 천 명만 동원해도 어지간한 중소문파는 감히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강호에 이득만 있는 계책은 없는 법. 이제까지 주 공공이 병사들을 부르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벼슬아치들이...”
관리들은 동창을 두려워하는 만큼 싫어하기도 했다. 당연히 반격의 기회가 찾아오면 칼을 휘두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나중에 위소를 맡고 있는 정천호가 보고라도 올리면 왜 군병을 동원했는지 해명해야 한다고, 공공이 사사로이 병사들을 불렀다고 귀찮게 굴 터.
주 공공 성격에 저런 식으로 트집을 잡힐 바에는 아예 깔끔하게 잘라내는 만큼 의외의 선택이었다.
“저만큼 증좌가 있으니 해명은 충분하겠지.”
“그렇긴 합니다만, 그 대질을 귀찮아하셨던 것 아닌지...”
“편한 길이 있으면 가끔 그 길로 가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다. 또,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 하더라도 판관을 불러와서 일을 시키는데 앞에서 싸우게 한다면 가혹하지 않겠느냐? 병사들을 대기시켜라. 싸움은 병사들에게 시켜야겠으니.”
“감복했습니다, 공공!”
허 중관은 자신이 모시는 상관의 마음씀씀이에 크게 감명받았다.
젊고 뛰어난 인재를 아끼는 모습이 실로 나라의 홍복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천 명에 가까운 군병을 과감하게 부리는 동창의 위세를 본다면, 저 젊은 판관은 자신이 선택한 연줄이 정말 대단한 연줄이라고 다시 한 번 느낄 것이다.
“병사들을 본다면 진충비도도 동창의 위세에 감탄해, 금의위와는 일을 해결하는 방식부터가 다르다고 느끼겠지요!”
“...허 중관 자네, 눈치가 빨라졌군...”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위소부터 가도록 하자꾸나.”
* * *
주 공공은 종남파의 무인들까지 데리고 위소로 향하진 않았다. 알아낼 건 다 알아낸데다가 무림인들을 데리고 위소에 들어가는 게 별로 좋은 행동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허 중관은 종남의 무인들을 먼저 황수장으로 보냈다.
-알겠나? 절대 먼저 들어가지 말게. 먼저 들어간다면 동창의 이름을 헌 짚신처럼 안다고 생각하겠네.
-걱,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 대인께서 크게 일을 도와주셨는데 어찌 멋대로 행동하겠습니까?
-나야 자네들을 믿네! 하지만 무림인들을 잘 알지 않나. 황수장 안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게 보여도 들어가지 말게. 하늘이 무너져도 들어가지 말라, 이 말일세. 알겠나?
-...예.
아까 장등원과 허 중관이 한 대화가 꽤 인상 깊었기에 연우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청불검에게 그렇게 말하실 이유가 있으셨습니까?”
연우혁이 보기에 장등원은 멋대로 들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우직하고 고집이 있는 성격에 구파일방 출신이면 쉽게 약속을 어기진 않을 것이다.
만약 황수장 안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가기라도 하면 괜히 원한만 살 것 같은데...
“무림인들에게는 이 정도로 말해줘야 알아듣는다네. 이렇게 말했으니 어지간해서는 먼저 들어가지 않겠지.”
“하지만 그 때문에 들어가야 할 때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럴 일은 없네!”
허 중관은 웃으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무림인, 그것도 종남의 무인이라면 정말 안 되겠다 싶으면 알아서 들어갈 걸세. 그런 다음에 자기 목을 내놓겠다 하겠지.”
“과, 과연. 하나 배웠습니다.”
“무림인들을 상대할 때에는 언제나 더 강하게 말해야 하는 법일세. 그리고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종남의 무인들이 그렇게 얼뜨기도 아닐 뿐더러, 적들도 아직 상황을 잘 모르고 있을 테니까. 시간은 충분하지.”
저 멀리 천호소가 보이자 허 중관은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마침 병사들이 목책 너머로 주먹을 맞부딪치며 훈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진충비도, 병사들을 부려본 적이 있는가?”
“제가 어떻게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겠습니까?”
군관도 아니고 그만한 고관도 아닌데 병사들을 부릴 일이 없었다. 허 중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래라면 그럴 일이 없네. 하지만 동창에서 일하다보면 가끔 병사들을 부릴 일이 생기지. 그게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라네. 환관들 중에는 일부러 자원하는 이들도 있을 만큼.”
손가락 하나로 천 명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강렬한 쾌감이었다. 괜히 관리들이 권력을 놓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매달리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환관들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권력의 쾌감을 누릴 일은 많지 않았다.
“과연 그렇습니까?”
연우혁은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 허 중관은 살짝 당황해서 물었다.
“별로 관심이 가지 않나?”
“뭘 말입니까?”
“병사들을 부리는 것 말일세.”
“전 지시를 내릴 자신이 없습니다만...”
“하나도 어렵지 않네.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 무슨 복잡한 진법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서 뭘 하라는 명령만 내려도 충분하네. 어차피 세세한 일들은 장수들이 할 텐데!”
‘이래도 되나?’
연우혁은 저번에 지부 어른이 군선을 빌려 강 위에서 호화롭게 놀던 일이 떠올랐다.
동창의 환관들이 병사들 부리는 걸 재밌어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전 정말 괜찮습니다.”
“허허. 경험해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네.”
“그보다 병사들을 이렇게 쉽게 빌릴 수 있는 겁니까? 좀 더 복잡한 절차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원래라면 지휘사에게 전갈을 보내서 허락을 받아야 하지. 하지만 동창은 조금 다르네. 명분만 있다면 얼마든지 빌릴 수 있지.”
허 중관은 동창의 권세를 이 젊은 판관에게 곧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해했다.
이 판관은 특이하게도 재물에 욕심이 없는 만큼 권세에도 별로 욕심이 없어서 감탄하게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 기껏 데려왔는데 실로 아쉬운 일이었다.
* * *
“안, 안 됩니다!”
“......”
“......”
허 중관은 오랜만에 당황했다. 이 천호소를 맡은 장수, 정천호(正千戶)가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이다.
“내가 귀를 먹은 건가? 이보게. 홍목대사는 자네도 들었을 것 아닌가. 최소한 흑도 무리 몇이 지원해주는 건 확실하네. 사교 무리가 엮였는지 아닌지는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이런 일이라면 급하게 병사를 빌려도 관례에 어긋나지 않는 일일세. 그런데 지금 못하겠단 건가?”
“제... 제대로 된 절차에 따르셔야 합니다.”
“제대로 된 절차라니. 무슨 소린가? 설마 지금 지휘사한테 전갈을 보내서 허락을 받으라고? 보름은 넘게 걸릴 텐데?”
“......”
정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긍정이란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허 중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눈앞의 장수가 건방지게 굴어서가 아니었다. 뒤에서 주 공공이 살기를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놈...! 사교와 결탁한 모양이구나.”
“아, 아닙니다. 무슨...!”
정천호는 그제야 동창의 환관들이 무력행사에 나설지도 모른다는 걸 느꼈는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동창의 위세가 대단하다지만 설마 천호소 안에서 장수를 베려고 할 줄이야!
“여, 여기서 이런 짓을 할 수는 없...”
“쯧쯧. 건방진 짓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허 중관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주 공공의 역린을 건드려도 이렇게 건드리다니. 젊은 판관 앞에서 체면이 보통 상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잘 가ㄱ...”
“알았습니다!”
“?”
허 중관과 주 공공은 물론이고 암기를 뽑아들려던 환관들도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뭘 알았나?”
“저 자가 왜 병사들을 안 내놓으려고 하는지 말입니다.”
“...그것도 이유가 있나?”
허 중관은 생각치도 못한 반응에 당황해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정천호가 주제 파악도 못하고 자신이 무슨 대장군이라도 된 줄 착각한 게 아니었단 말인가?
“모든 이상한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주 공공. 공공께서도 느끼시지 않으셨습니까?”
“확실히 그렇구나.”
정천호를 죽이고 시작하려던 주 공공은 암기를 내려놓더니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홍목대사와 관련된 일에 집중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이 정천호의 반응은 멍청하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가면 속에서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주 공공은 물었다.
“그렇다면 이 일에는 어떤 내막이 숨어있단 말이냐?”
“간단합니다. 이 천호소에는 병사들에게 들려줄 병장기가 없습니다.”
“...?!”
“생각해보십시오. 입구의 몇 명을 제외하고는 창을 들고 있는 병사가 하나도 없었잖습니까.”
“...그렇군!”
허 중관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전율했다.
생각해보니 맨주먹으로 대련하는 병사들만 보였지 그 흔한 창 하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그, 그...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천호는 겁을 먹은 와중에도 화들짝 놀라 어떻게든 부정하려고 했다.
천호소를 책임지고 있는 장수로서 병사들이 쓸 병장기가 없다는 건 목이 열 개여도 부족한 일이었던 것이다.
“지금 가서 확인해보면 되는 일일세. 정말 고집을 부릴 텐가?”
“...크흑!”
정천호는 좌절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제 잘못이 아닙니다! 그게...”
“아마 병장기를 옮기기로 한 부천호(副千戶)가 사라지면서 병장기도 같이 사라졌을 겁니다.”
“???”
정천호는 좌절하는 와중에도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저 젊은 놈은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저렇게 자세히 안단 말인가?
“어떻게...?”
“이 자리에 다른 부관은 보이지만 부천호가 없지 않습니까. 천하의 동창을 앞에 두고 부르지 않을 정도의 이유라면 범상한 이유는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걸... 그게 어떻게...?”
주 공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부천호가 병장기를 빼돌린 모양이구나.”
“도적들한테 습격당했을 수도 있... 지 않습니까?”
정천호의 말에 연우혁은 바로 설명했다.
“병장기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전부 쓰러뜨리는 건 아주 힘든 일입니다. 그보다는 부천호가 빼돌렸겠지요.”
“이, 이 놈...! 내가 그렇게 믿었는데...!”
주 공공은 분통을 터뜨리는 정천호를 내버려두고 연우혁을 불렀다.
“내 생각에, 여기서 빼돌린 병장기를 둘만한 곳은 인근의 복양이나 구릉 아닌가 싶은데. 이 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주 공공은 젊은 판관이 이 두 도시 중 어디를 수상쩍게 여길지가 궁금했다.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는 만큼 생각을 들어보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았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일을 어떻게 혼자 했겠습니까?”
연우혁은 그렇게 말한 다음 정천호를 보며 재촉했다.
“거기서 그러지 말고 빨리 나가서 동창이 부천호를 잡아왔다고 하십시오. 군관들 중에 제일 표정이 안 좋아진 놈이 내통한 놈입니다. 붙잡아서 심문하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주 공공은 사람의 재주가 너무 뛰어나면 그건 그거대로 예상을 벗어난다는 걸 새삼 느꼈다.
‘기껏 좀 이야기하려고 했더니...’
* * *
“으음. 주의하는 게 좋겠군. 공공께서 기분이 좋지 않으신 것 같네.”
“역시 그 군관 때문이군요. 괘씸한 놈들 같으니.”
연우혁은 멍청한 정천호를 탓하며 분개했다.
주 공공은 시늉만 내는 연우혁보다 훨씬 더 충신에 가까웠다. 그런 사람인만큼 저런 군관을 보면 격노할 수밖에 없으리라.
“맞는 말일세. 자네가 빨리 해결해서 망정이지, 거기서 시간을 끌었으면 공공께서 기분이 얼마나 편찮으셨겠는가.”
“감사합니다.”
“새삼스럽지만 자네 재주는 정말 대단하네. 탐관오리들이 눈빛만 봐도 벌벌 떨 거야. 황수장에 도착하면 바로 해결해버리게. 따라온 군관들이 놀라 자빠질 테니.”
허 중관은 생각만 해도 흐뭇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뒤의 가마 안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주 공공은 허 중관을 불렀다.
-예, 공공. 그냥 부르셨다고요? 제가 우둔해서 잘 이해를 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뒤에서 허 중관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연우혁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는 황수장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멀리서 피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오는 게 예삿일이 아니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죽은 것 같았다.
“저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차를 발견한 종남파 무인들이 달려오더니 외쳤다. 그들의 표정에도 당혹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저기 금의위 무인들이...”
“우리가 오기 전에도 이렇게 되어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정 교위는 발끈해서 외쳤다. 저 괘씸한 무림인 놈이 혈사의 책임을 금의위에게 돌리고 있었다.
“금의위 놈들이 한 것 같소?”
“아무래도 그럴...”
“확실히 그럴듯하군!”
허 중관까지 가세해서 떠들자 금의위 무인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